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 - 황혼이 깃든 예술가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분투기
윌리엄 E. 월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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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

 : 윌리엄 윌리스

 : 책과함께

읽은기간 : 2024/05/09 -2024/06/04


인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이름. 미켈란젤로..

사실 미켈란젤로에 대해 알고 있는 에피소드와 작품은 모두 젊은 시절 이야기다.

피에타나 다비드상의 멋진 작품.. 천지창조를 그리며 교황과 싸웠던 이야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티격태격했던 이야기나 라파엘로의 베끼기 능력을 무척 미워했던 이야기...

이 책은 미켈란젤로의 노년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노년기의 미켈란젤로는 내가 알던 괄괄하고 화많이 내던 모습이 아니다. 

수도자의 모습에 가깝고, 신에게 다가가는 경건한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인간적인 나약한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도 역시 연약한 한 인간이었음을 보면서 연민을 느낀다.

그는 코시모 메디치의 간곡한 부탁을 받으면서도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위해 피렌체에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다시 피렌체에 가지 못하고 로마에서 죽는다.

죽기전까지 피에타를 만들던 미켈란젤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마지막 작품을 만들었을까? 결국 자신은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하며 열심히 설계하고 지었던 베드로 대성당을 보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켈란젤로의 또다른 모습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p15 더 중요한 사실은 고향 사람들이 그를 피렌체에 데려오려고 거듭 노력했는데도, 그가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립하겠다는 약속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느님이 나 자신을 여기에 있게 하셨다”라는 확고한 믿음을 간직했으며 대성당 건설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p21 역사가 존 엘리엇은 이런 말을 했다. 좋은 역사서를 집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상력을 발취하면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회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행동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다.

p32 그들이 석상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기독교인 구경꾼들이 거칠게 제지했다. 유대인의 오염된 손길이 석상을 더럽힐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교도는 볼 수만 있을 뿐 직접 만져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p35 율리우스는 고집불통이었고 성질이 사나웠으며 그 어떤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 동시대인들은 강인한 의지와 까다로운 성품을 지닌 이 두 사람을 가리켜 테리빌리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p37 서른 살의 미켈란젤로는 실제로 영묘를 마침내 완공한 60대 후반의 아주 명상적인 인물과는 크게 다른 사람이었다. 예술가 자신과 영묘를 지어 기념한 교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미켈란젤로와 그의 예술이 그전 40년 동안 어떻게 성숙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p48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석상들은 대리석 덩어리의 한계를 뚫고 나오려는 폭발적인 힘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라헬과 레아의 수수한 크기와 온유한 모습이 그 주위의 벽감에 의해 더욱 제약을 받고 있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p72 에르콜레 곤차가는 예술을 애호하는 교양 높은 사람이었고, 미켈란젤로 작품을 열렬히 숭배하면서 모아들이는 수집가였으며, 비토리아 콜론나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p85 루이지 델리초가 죽은 지 석 달 뒤인 1547년 2월, 미토리아 콜론나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그녀는 57세였고 미켈란젤로는 15세 연상이었다. 자신보다 젊은 가까운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났는데 왜 그는 아직도 살아 있는가?

p91 비록 간접적으로 아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존경하는 사람들의 함구, 추방, 죽음을 목격하고서, 미켈란젤로는 어쩔 수 없이 이단심문소를 의식하면서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p102 또다시 여인의 아름다움이 나를 뒤흔들고 나를 격려하며 내게 채찍질을 가한다. 이제 오전 아홉 시의 기도는 지나갔고, 오후 세 시의 기도 그리고 저녁기도도 지나가서, 밤이 오고 있다.

p130 그 모형 지지자가 상갈로 설계를 풀이 모자라지 않는 풀밭이라고 말하자, 미켈란젤로는 까칠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예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황소와 어리석은 양 떼를 위해서라면.

p143 미켈란젤로는 공사의 세부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공사의 윤곽을 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공부를 많이 한 인문주의자의 책상물림 지식이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장인의 실무적 지식이었다.

p161 선배 건축가의 설계에 신경 쓰면서도 미켈란젤로는 그 자신의 독창적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p163 파울루스가 오래 살수록-실제로 그는 아주 장수한 교황이었다- 미켈란젤로가 맡아야 할 공사 수는 늘어났다. 처음에는 최후의 심판이 있었고 그다음에는 대성당 공사, 파루네세 궁전, 그리고 아직도 덜 끝난 캄피돌리오와 파올리나 예배당이 있었다.

p178 만약 그가 반란자들과 어울린다고 고소를 당한다면 부오나토리 가문은 얼마든지 국외 추방과 재산 몰수를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언제나 혼자라든지, 누구한테도 말을 걸지 않는다는 노골적이지만 잘 계산된 과장법을 이용해 평소에 권력자들을 조심하고 정치와는 단호하게 무관한 태도를 유지해 온 그의 습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p223 자신의 다양한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 그는 협력자들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에게 점점 더 많은 권한을 위임했다. 미켈란젤로의 후반기 예술과 건축은 이런 개인적 관계에 크게 의존했다.

p220 미켈란젤로와 그의 친구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발굴 현장에 호출되어 그 조각 난 고대 작품의 파편을 맞추어보니 하나의 돌덩이리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대리석 덩어리 여섯 개를 가지고 만든 다음에 잘 이어붙인 것이었다. 플리니우스의 기록은 오류로 판명되었다.

p245 미켈란젤로가 신임하는 그 젊은이는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여 그 작품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는 이 작업으로 별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피렌체의 두오모 오페라 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사실은 그의 보수 작업이 성공적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p249 단테는 현명한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라는 두 안내인에게 동정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단테보다 두 배나 더 나이가 많은 미켈란젤로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안내자로 모시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미켈란젤로의 주님은 단테의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만큼 도움을 주지도 않았고 동정을 베풀지도 않았다.

p262 나는 그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 피렌체의 인구를 늘려주는 것은 우리 가문의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지금 곁에 두고 있는 자식(당시 두 살 반이던 부오나로토)만이라도 살려달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거라

p263 1556년에서 1560년까지 다섯 해 동안, 미켈란젤로는 조카손자 중에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셋을 잃었다. 이런 여러 슬픈 사건들은 미켈란젤로를 전보다 더 부드럽고 관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미켈란젤로의 이런 여린 마음을 동시대인들은 때때로 목격했으나 미켈란젤로의 전기 작가들은 대체로 무시해 버렸다.

p274 1556년 7월, 미켈란젤로는 와인이 지금껏 받아본 것 중에 최상품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런 슬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을 나눠줄 사람이 이제는 없구나. 내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p300 파울루스 4세 치하 교황청의 억압적 분위기는 미켈란젤로에게 광적인 수도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연상시켰다. 미켈란젤로는 그 수도자가 처형된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찢어지는 목소리를 기억했다.

p312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이런 시련의 시기일수록 코시모 데 메디치, 조르조 바사리, 조카 리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를 고향 피렌체로 데려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와 같은 의무는 전혀 지는 일 없이 평화와 안정을 보장받을 것이라는 약속도 받았다. 미켈란젤로가 이런 권유를 모두 물리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로써 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공사에 기울인 헌신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p333 미켈란젤로는 창조적인 천재였을 뿐만 아니라 눈 밝은 사업가, 노련한 엔지니어, 융통성 있는 건설업자, 성공적인 기업가였다. 그는 성과 속을 무시로 오가는 사람이었다.

p336 미켈란젤로의 후기 경력 중 가장 큰 특징은 작업 요청이 점점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가 나이 들어가면서 모든 사람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을 점점 더 많이 요구하는 듯 했다.

p344 건축가인 자코도 델라 포르타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아름다운 돔을 미켈란젤로의 설게대로 건설했다. 그러므로 그는 미켈란젤로의 대성당을 완공한 사람인 셈이다.

p351 우리는 산 로렌초의 파사드를 위한 도면, 그리고 같은 교회의 목재 모형 등에서 미켈란젤로가 초창기부터 2열 기둥을 실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p360 피렌체의 경우 그 대답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에게서 나왔고, 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가 해결안을 내놓았다.

p371 미켈란젤로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 코시모는 거듭하여 귀향을 요청했고, 심지어 의무 없는 한직을 마련해 주겠다는 얘기까지 했다. 예술가는 솔깃했지만, 그런 요청이 올 때마다 “여기 일을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며 완곡하게 물리쳤다.

381 미켈란젤로는 분노하고 좌절했다. 그 공사의 수석 건축가로 무려 15년이나 일해 왔는데도 현장 감독 한 명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한 달 동안 공사 현장에 나가 보지 않았고 마침내 1563년 9월에 교황이 개입하여 그에게 현장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했다. 그리하여 무명의 피에르 루이지 가에타는 마침내 고용되었고 미켈란젤로의 현장 대리인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p404 필생의 가장 중요한 과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그 얼마인가?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최종 프로젝트가 도다시 미완의 작품으로 끝난 것을 고통스럽게 의식했다. 그의 인생 여정이 끝나는 판에, 그의 최고 걸작은 막 생겨나기 시작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의 최고 업적일 뿐만 아니라, 교황청과 보편 교회의 가장 우뚝한 상징이었다.

p406 미켈란젤로 생애 후반의 특징은 그가 많은 프로젝트에 창의적인 책임을 맡았고 또 그를 주요 건축가로 인정하는 그보다 더 많은 프로제그에 활발히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가 생애 만년에 정성을 기울여 이룩한 높은 업적 덕분에 로마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가푸트 문디(세상의 머리)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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