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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인들 세트 - 전2권 - 서로마 몰락부터 종교개혁까지, 중세 천년사를 이끈 16개 세력
댄 존스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10월
평점 :
제목 : 중세인들1
작가 : 댄 존스
출판사 : 책과 함께
읽은기간 : 2024/01/10 -2024/01/20
요즘 중세에 대한 책들이 쏟아진다.. 덕분에 읽을 수 있는 중세관련 책들이 많아졌다.
중세는 관광지 상품으로나 알려져있지, 그 시대 자체는 폄하되고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새롭게 중세를 보는 책들도 많아지고 연구들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유럽과 이슬람의 이야기가 주류였는데 훈족의 이동에 따른 혼란들을 설명하면서 동서양의 만남도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십자군은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가며 설명하고 있어, 훨씬 입체적이다.
2권을 빨리 읽어야겠다.
p14 훈족의 왕 아틸라부터 잔 다르크까지 수많은 남자와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적어도 10여개 분야(전쟁과 법에서 미술과 문학에 이르기까지)에 무모하게 뛰어들게 될것이다.
p29 아우구스투스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로마인의 생각은 갈렸다. 고상한 선지자이자 비길데 없는 정치군인인가, 아니면 부패하고 잔인하며 믿을 수 없는 폭군인가?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물었으나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황제로서 이룬 성과는 부정하기 어렵다
p36 세계를 강타한 자들이 도시를 약탈해 육지가 남아나지 않았는데, 그들이 바다를 털고 있다. 적이 부유하면 그들은 탐욕을 부리고, 적이 가난하면 그들은 지배하려 한다. 동쪽도 서쪽도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만이 빈자와 부자에 대해 똑같은 열의로 탐낸다. 그들은 강도와 살육과 약탈에 제정이라는 거짓이름을 붙인다. 그들은 황무지를 만들어놓고 이를 평화라 부른다
p40 이 주장의 핵심에는 태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왕국의 지배자들을 고무해온 두 가지 오래된 논쟁이 있다. 국가가 이전의 적을 어떻게 자기네 사회에 끌어들일 것인가. 그리고 국가 또는 사회의 구성원 자격에 대한 문호를 외국인에게 개방하는 것이 그들의 혈통과 특성을 강화하는가, 희석하는가? 이는 로마의 수백 년 제정 시대를 시끄럽게 했던 논쟁이었고, 중세와 그 이후까지 유산을 남겼다.
p57 데키우스 치하에서, 그리고 이후 발레리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기독교도는 채찍질을 당하고 가죽이 벗겨지고 야생동물에게 던져졌으며 여러 창의적인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p65 훈족은 전문적인 기마궁술을 이용해 잔인한 도살자의 명성을 쌓았고 스스로도 그것을 열렬하게 강조했다. 그들은 전사 계급이 이끌고 혁명적인 군사기술을 이용할 수 있었던 유목 문명이었다.
p67 티베트고원의 칭하이성에서 나온 치렌향나무 표본이 제공한 나이테 자료에 따르면 아시아 동부 지역은 350년에서 370년 사이에 큰 가뭉을 겪었던 듯하다. 이 가뭄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록된 가뭄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었다.
p110 티우다레익스는 대왕이라는 별호를 가질 운명이었고, 자신이 알았던 대로의 삶을 살았다. 수도 라벤나 같은 시범 도시들에서 그는 방어 성벽, 거대한 궁궐, 대성당, 영묘, 공공건설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p120 여 해 동안 믿음직한 제국 행정 요원이었던 프로코피오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과 대민 행정에서의 업적에 관한 역거운 기록 몇 가지를 썼다. 역사 이야기와 뻔뻔한 선전을 섞은 것들이었다.
p123 이들 법률가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즉위한 지 불과 20개월 만에 이 법률들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알려진 로마법의 단일 확정본으로 요약하고 편집하고 정리했다. 이 법전은 529년 4월 7일 반포되었으며, 제국의 모든 속주에 전달되어 그곳에서 자동적으로 다른 모든 법전을 대체했다.
p127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후 어디서든 동성애자와 남색으로 드러난 자들을 거세한다는 포고를 내렸다. 많은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었다. 말랄라스는 이렇게 썼다. “그때 이후로 동성애 욕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심이 생겨났다”
p143 539년(또는 540년)에 또 하나의 거대한 화산 분출이 있었다. 아마도 현대 엘살바도르의 일롱팡고였을 것이다. 이런 자연적인 폭발이 한데 합쳐져 수천억 세제곱미터의 돌을 토해내고 100만톤 이상의 유황과 재를 지구의 하늘로 뿜어 올렸다. 이로 인해 인류 역사상 가장 격심한 지구 환경 위기 가운데 하나가 발생했다.
p147 영광스러운 이 새 성당을 장식한 근사한 모자이크 가운데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은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황제 테오도라의 초상 차지가 되었다.
p164 7-8세기 이슬람 정복전쟁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이, 다마스쿠스 포위전에 관한 당대(그리고 당대에 가까운 시기)의 기록은 뒤엉켜 있어 정리하기 어렵다. 그러나 약간의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랜 기다림 끝에 할리드 이븐알왈리드와 아라비아군이 다마스쿠스인의 저항을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줄여갔다는 것이다.
p167 632-642년 아라비아인의 시리아 정복은 그 시기의 가장 놀라운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우선 그것은 동로마 제국의 동쪽 날개를 최종적으로 그리고 영구히 잘라버렸다. 700년 가까이 로마 영토였던 곳이었다. 동로마의 국경은 이제 소아시아 동쪽 끈의 아마누스산맥(현재의 누르산맥)으로 후퇴했다. 중세 시기에 이르면 그 너머로 진출하는 일이 거의 없다.
p169 다마스쿠스는 630년대에만 포위된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1120년대 2차 십자군 병사들에게 공격당했고, 1400년에 몽골족과 튀르크족 이슬람교도들에게 포위당했고, 1840년대와 1860년대에 종교적 대량 학살을 겪었고, 1920년대에 프랑스의 폭격을 당했고, 현재의 시리아 내전에서 여러 파벌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들 충돌 가운데 마지막 것에서는 야르무크 수용소로 알려진 다마스쿠스의 한 지역에서 악명 높은 전투가 벌어졌다.
p189 우마이야 왕조는 100년도 못 되는 기간 동안 권력을 행사했지만, 이 시기는 흥미로운 전화기였다. 이슬람 세계의 수도가 마디나에서 다마스쿠스로 옮겨 갔고, 이슬람교도 거주지의 경계가 서방 이방인이 사는 남프랑스까지 멀리 뻗쳤다.
p194 우마이야는 로마를 모방하려는 의욕이 강했기 때문에 660년대에서 710년대 사이에 반복적으로 옛 로마 국가를 대대적으로 탈취하려 했다. 그 결과로 서아시아와 남부 지중해 일대에서 광범위한 전쟁이 벌어졌고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p197 이 경험은 소아시아에서 가졌던 우마이야의 야심을 영원히 좌절시켰고, 이를 돌이켜 본 많은 역사가가 두 번째 포위전의 실패를 서방 역사의 전환점으로 보았다. 이슬람 군대의 첫 번째 발칸반도 확산이 멈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중세 말까지 기독교도의 손에 남았고, 이슬람교도는 15-16세기에 이르러서야 오스만의 정복으로 옛 로마 영토에 뛰어들어 동유럽에 진출했을 뿐이다
p205 우마이야 이슬람 사원이 이런 점에서 이국적이고 낯설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수백 년에 걸쳐 현지 양식을 흡수해 이슬람 특유의 요소와 융합한 여러 대형 이슬람 사원의 선구이기도 했다.
p225 왕릉 주위에 건설되어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 힐디릭 1세의 무덤은 프랑크인이 단순한 떠돌이 전사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 지배자들은 5세기 말에 이미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고, 사방으로 말을 타고 며칠 거리에 이르는 지역의 통치자로 자임했다
p228 743년 샤를 마르텔이 죽고 그의 아들들 및 친척들이 그 유산과 상속을 놓고 다투게 되자 불운한 힐디릭 3세가 테우데릭의 후계자로 점지되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힐디릭 3세는 메로빙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751년, 그의 머리칼은 마르텔의 아들 고마 페팽의 명령에 따라 잘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왕조가 멸망했다
p232 스테파투스 교황의 방문 이듬해에 이 프랑크왕은 두 번 이탈리아로 진격했고, 두 번 모두 랑고바르드와 그 왕 아이스톨프를 매우 강력하게 응징했다. 역사 기록자 프레데가리우스는 이렇게 썼다. “그는 이탈리아땅을 사방으로 광범위하게 파괴하고 불태워 이 지역을 초토화했다. 랑고바르드의 모든 요새를 무너뜨리고 많은 금은보화와 수많은 장비, 그들의 모든 천막을 빼앗아 가졌다”
p237 샤를마뉴의 군대는 피레네산맥의 론세스바에스 고개에서 몰라 그 뒤를 추격한 적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프랑크군은 기습에 허를 찔렸다. 그들의 보급품을 노획당했다. 그들의 후위는 포위당해 잘려 나가고 긴 시간의 싸움 끝에 살육당했다. “그 죽음에 대해서는 복수를 할 수 없었다”라고 아인하르트는 썼다. 공격자들이 어둠 속으로 재빨리 달아났기 때문이다. 이일은 굴욕으로 기억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샤를마뉴 군대의 사망자 가운데 흐로딜란트(프랑스어로 롤랑)라는 장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p262 869년에 이스트앵글리아왕 에드먼드가 노르드인의 손에 죽었다. 880년대가 되면 잉글랜드의 절반 정도가 스칸디나비아인의 통제하에 들어가거나 직접 지배를 받았다. 노르드인의 전진은 웨식스왕 앨프레드가 색슨쪽에서 용감하게 이끈 긴 투쟁 끝에야 저지되었다.
p270 멍청이 샤를에게 공식적으로 항복을 할 시간이 되자 흐롤프르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무르ㅠ 아래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고, 누구의 발에도 키스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부하 하나를 시켜 자기 대신 그일을 하게 했다. 뒤동은 이렇게 썼다. 그 전사는 “즉각 왕의 발을 붙잡아 그것을 자기 입까지 올린 뒤 거기에 키스를 했다. 그는 여전히 선 채였다. (그 때문에) 왕은 벌러덩 나자빠졌다. 그러자 커다란 웃음이 터졌고, 사람들은 크게 고함을 질렀다.”
p278 유의 대표 수도원으로 발전하는 것은 바로 클뤼니였다. 부르고뉴에 있었지만 프랑스 전역과 함께 잉글랜드, 이탈리아, 이베리아반도, 독일 서부가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10세기 중반 이후 이곳은 한창때 수백군댕의 부속 수도원을 거느린 국제 조직의 본부였다.
p291 오동의 조치가 지금은 가혹해 보이겠지만 그런 개혁의 필요성은 컸다. 카롤링 지배자들이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수도원이 제대로 운영되어야 하고 베네데토 규칙이 준수되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요구했지만, 지금 남아 있는 당시의 자료에는 수도원의 표준이 무너진 충격적인 사례가 많다. 수행자와 수녀가 조금 편해지려 하고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즐기려 한 때문이다.
p304 이상한 일이지만 클뤼뉘에 있는 모수도원은 이들에 필적할 만큼 훌륭한 유물을 기증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수도원이 그러한 개혁된 수도원의 거대한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선 10-11세기에 클뤼니는 엄청나게 부유해졌다.
p315 어떤 의미에서 이것들이 모두 개인적인 것은 아니었다. 베르나르와 피에르는 경쟁자로서 충돌했지만 적으로서 충돌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양피지 위에서 번갈아 상대를 후벼 파고, 생색을 내고, 무시하고, 아는 체하고, 헐뜯고 노골적인 무례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존경했으며, 1150년에는 예수 탄생 기념일을 함게 보내기도 했다. 물론 극도로 금욕적인 클레르보가 아니라 안락한 클뤼니에서였다. 그들을 연결해 주는 것(수도원 생활, 명상, 규칙, 질서, 속세의 죄, 천국의 보상, 외교)이 그들을 갈라놓는 것보다 강했다.
p339 그는 완강하고 확고하게 전쟁터에서 자신의 맹렬한 공격 원칙을 고수했으며, 전장을 벗어나면 신사도를 세심하게 지켰다. 그리고 결국 그의 노력은 보상을 받았다. 1094년 6월 15일, 발렌시아가 함락되었다. 로드리고의 부하들은 도시를 열심히 털었고, 시민들로부터 많은 양의 금과 은을 빼앗아 차지했다.
p355 크레티엥 드트루아의 아서 로망스 수레의 기사 랜슬럿에서 비극적이고 용감한 기사 렌슬럿은 자신의 기사도적인 귀네비어 왕비 숭배를 갈 데까지 간 연애로 변질시킴으로써 아서왕을 배신했다. 반복되는 이 로망스의 주제는 바로 순결하고 품격 있는 사랑과 실제의 간통 및 불륜 사이에 선을 긋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이다.
p369 중세 분장놀이에 탐닉한 잉글랜드 왕은 헨리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런던탑에는 또한 찰스 1세와 제임스 2세를 위해 만들어진 멋지고 화려하게 장식된 갑옷도 전시되어 있다. 그들의 치세가 다사다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갑옷들은 의례에서 과시하는 외에는 중세의 갑주로서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다.
p392 그들이 서로를 짖어발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과 이슬람 교도가 서로 목을 베고 불태워 죽일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고 가까이 사귀고 교역하고 교류하던 시기와 장소가 매우 많았다. 이것은 십자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쓰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중세사에서 십자군의 중요성과 그것이 현대 세계에 남긴 유산에 대해 너무 흔히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며 그 이상은 없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일 뿐이다.
p402 라인란트의 새로운 세대 유대인이 매 맞고 강탈당하고 불구가 되고 눈이 멀고 살해되거나 쫓겨다니다가 결국 자살했다. 어처구니없는 규모의 역사 재연이었다.
p419 자기네가 십자군에 들인 경비를 돌려받은 베네치아인은 알렉산드리아나 그 밖의 어느 곳으로도 가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닻을 올리고 고국으로 돌아가 딴 돈을 계산했다. 그리스 역사 기록자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이 모든 것을 폭거라고 표현했다.
p421 카타리파는 서방 교회의 위계를 거부하고 자기네 스스로 독자적인 성직자를 택했으며, 성찬식과 세례, 기타 교회 의식을 거부함으로써 기독교 금욕주의에서 이단으로 넘어갔다. 이는 그들을 매우 용인할 수 없는 처지로 내몰았다. 특히 인노켄티우스처럼 교회 전반에 명령과 통제의 권위를 강제하려고 심하게 집착했던 교황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p428 프리드리히 호엔슈타우펜은 일생 동안 교황들과 끊임없이 다투었고, 놀랍게도 네 번이나 파문당했다. 사실 그가 1229년 성묘교회에서 예루살렘왕으로 즉위하던 그 순간에 그는 서류상 로마 교회와 교신이 금지된 상태였다.
p431 이것은 십자군이라는 말의 마지막 언급은 결코 아니었다. 십자군은 중세가 끝난 뒤에도 이어졌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극우, 신나치주의자,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좋아하는 표현법이다. 이 모두는 그것이 1000년 동안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관계를 규정했다는 생각(분명히 허점이 많은 생각이다)을 고수하고 있다. 그들은 옳지 않지만, 그 잘못이 그들의 독창인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