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가진 것들은 슬프다 - 어제와 오늘, 그리고 꽤 괜찮을 것 같은 내일
오성은 지음 / 오도스(odo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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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상태에 머물기를 원한다. 누구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기도 한다. 그것이 지금의 상태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태라고 판단해서다. 이때 변화를 추구하는 소수가 급격한 변화를 원한다면, 즉 폭력과 무력 등의 수단을 동원하면 전쟁이 된다. 그러나 그 소수가 평화와 서로간의 협력을 통해 변화를 꾀한다면 인간의 삶에 발전을 가져다준 변화가 실행될 수 있다. 그 변화가 지금 현대 사회에서는 점점 빨라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다수의 협력자를 얻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때문에 변화는 빨리 진행되고 그 속도를 빨리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퇴보하고 저항하다가 마침내 도태된다. 이것은 독자의 생각이지만 이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서는 독자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감히 주장할 수 있다.

 

세상에는 슬픈 것이 가득하다. 그러나 속도를 멈춘 모든 것은 슬프면서 또한 아름답다. 그러므로 제목으로 삼은 모호한 슬픔 뒤에 각주처럼 달린 일상의 문장들을 반갑게 맞이해주시면 좋겠다. 우리의 일상이 일상으로 이어지는 순간의 웅숭깊음을 사람을 가까이하기 힘든 이 시기에 사진과 문장으로 매만지려 해보았다. 나는 본래 슬픔을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더더욱 슬픔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그대의 슬픔도 잘 씻길 수 있도록 속도를 잠시 버려둔 채 오래 들여다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이 책 『속도를 가진 것들은 슬프다』의 저자 오성은이 화두로 들고 나온 '속도'는 현대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원하는 속도보다 엄청나게 빠르다. 미처 속도를 느끼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는 변화에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삶의 뒷전으로 밀리는 것들이 많다. 뒷전으로 밀려 사라지는 것들은 우리의 직업이라든지, 아날로그 문화도 포함되지만 그것보다는 그 속에 녹아 있는 인간의 가장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기 어렵게 빠르다는 데 문제가 있다. 현대의 우리는 속도 속에 살고 있다. 지구의 속도와 계절의 속도와 노화의 속도, 게다가 온통 우리의 몸과 마음을 끌어당기는 욕망의 속도까지 더해져 하루하루가 쏜살같이 흘러간다.

어린 시절에는 잘 느끼지 못하던 시간의 흐름이 나이가 들수록 빨라지기 시작한다. 저자는 그래서 슬퍼한다. 이를테면 어머니의 흰머리가 하루하루 늘어가는 게 보일 때, 주름이 깊어질 때, 통증이 쉬 낫지 않을 때, 행복했던 추억만 자꾸 떠오를 때 우리는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다. 이것은 디지털 문화로부터 느껴지지 않는 사람의 마음과 감정에 관한 변화다. 저자의 느낌은 속도가 우리를 자꾸만 시간의 끝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슬프다고 한다.

 


 

그렇다면 멈출 수는 없는가? 혹은 반대 방향으로 되돌릴 수는 없을까? 앞으로 계속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해도 잠시 과거로, 이전의 행복했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까?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저자가 몰라서 되묻는 것은 아닐 터, 안타까움과 아쉬움일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알랭 드 보통은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보고 생각하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라고 했다. 속도를 잠시 멈추고 진정으로 귀중한 것을 보고 생각할 때 우리는 속도를 잠시 멈출 수 있다. 그리고 사진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카메라 렌즈 넘어, 뷰파인더 너머로 사물의 속도를 붙잡을 수 있다. 우리를 자꾸만 밀어붙이는 슬픈 속도의 압박을 잠시 멈춰보자.

그리고 멈춰진 속도 속에서 슬프지만, 또 아름다운 진정으로 귀중한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 속도 속에 있다 보면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들조차 제대로 생각하거나 돌아볼 시간이 없다. 사진은 그 태연한 일상을 영원한 일상으로 남기는 것이다. 자칫 아무 의미 없거나 혹은 나만의 기준으로 보고 넘겼을 많은 것들을 머무르게 한다. 그때 조금 더 지혜로웠어야 한다고, 그때 더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야 한다고, 혹은 다시 저 기쁜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가 마주한 사진들은 묘한 감정이 교차한다.

 


 

멈추었다면 이제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속도 속에 있다 보면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들조차 제대로 생각하거나 돌아볼 시간이 없다. 속도 속에서 어떤 순간이나 상황을 보는 것과 속도가 멈춘 상태에서 들여다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속에 있었지만, 서로가 보는 세상은 바라보는 지점에 따라 분명 서로 다르다. 너의 시선과 나의 시선, 너의 상황과 나의 상황은 달랐고 우리는 그것을 서로 나눌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세상을 우리는 늘 하나의 세상이고 같은 세계라고 여기며 아무런 의심 없이 살아왔다. 이를 착각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 착각 속에서 태연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좋은 사진은 빛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좋은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림자의 예술인 경우가 많다. 사진 속 밝게 드러난 빛은 화려함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그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삶의 쓸쓸한 단면을 보여주면서 말을 걸기도 한다. 일상의 본 모습을 드러내 주는 속도의 멈춤, 그리고 감추어진 속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자.

 


 

한 인플루언서 인스타그램 계정에 “시간을 딱 한 번만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다. 그때 속으로 후회하는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후에 그 내용이 책으로 나와 살펴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모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답했고, 나이가 어린 사람일수록 후회했던 때로 돌아가서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싶다고 답했다고 한다. 작가는 말하기를 나이가 많을수록 과거에 어떤 후회가 있었든 그 시절이 찬란했다고 여기고, 나이가 어릴수록 후회했던 일만 눈에 밟혀 현재의 젊음이 찬란한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렇다면 결국 행복했든 후회했든 결과와 상관없이 모두의 삶은 그 순간이 가장 찬란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살아 있는 현재가 모두 아름다운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스펙타클한 시대에 사진이라니, 뭔가 어색해 보이고 멈춘 듯한 시선 속에 어떤 쓸쓸함 같은 것이 느껴지지만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늘 번잡하고 바쁘고 휘황찬란한 시대에 속도를 멈추고 호젓한 쓸쓸함을 느끼는 것도 현재를 즐기는 멋진 방법이 될 것이다.

 


 

책에 따르면 행복했든 후회했든 결과와 상관없이 모두의 삶은 그 순간이 가장 찬란하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살아 있는 현재가 모두 아름다운 건지도 모른다. 늘 번잡하고 바쁘고 휘황찬란한 시대에 속도를 멈추고 호젓한 쓸쓸함을 느끼는 것도 현재를 즐기는 멋진 방법이 될 것이다. KBS TV(부산)에서 ‘바다 에세이 포구’라는 프로그램과 라디오 ‘시시(詩詩)한 남자 오성은입니다’를 진행했던, 소설가 오성은의 사진 에세이는 출발이 아날로그 감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날로그 감성을 책 잡을 일이 없다. 독자 역시 같은 감정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저작 활동과 문예활동을 하는 다재다능한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그리고 뮤지션이라고 한다. 무심하게 스치듯이 누르는 셔터 한 번에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사진이 찍힌다. 찾고 싶은 어떤 흔적들이 사진을 통해 말을 걸어주는 듯하다. 먼지가 쌓인 선반을 더듬고, 오래된 궤짝을 열어보고, 텅 빈 장독대를 들여다보며 할머니의 모습을 찾아보려 했다는 그의 글처럼 우리는 모두 아름답지만 쓸쓸한 어떤 기억들이 있다. 속도에 묻혀 잊고 지냈던 우리만의 아름답고 쓸쓸한 순간들을 이 책을 통해 만나보길 바란다. 소설가의 마음으로 담아낸 사진과 기록들을 읽다 보면 오늘 독자들의 마음에 숨겨진 추억이 아직 그곳에 있다고 일깨워줄 것이다.

 


 

일상을 찾겠다며 무작정 거리를 떠돈 건 조금 바보 같은 일이었다. 무언가를 찾아 나선다는 건 여행에 가깝지, 일상은 그 반대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상을 잃어버리기 위해 거리를 떠돈다는 건 어떤가. 나의 일상을 내가 잘 모르는 거리에 슬며시 놓아두고 오는 것이다. - 「살며시 두고 온 일상」 중에서

 

셔터를 누른 순간 당신은 잠시 사라집니다. 제가 당신을 카메라의 작은 암실 속에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당신은 벌써 갑갑해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다시 그 자리로 보내줄 마음이 없습니다. - 「에필로그」 중에서

 

저자 : 오성은

 

외항선 선원이었던 아버지께서 에스파냐령 라스팔마스에서 옥편을 펼쳐 들고 지어 편지로 써 보낸 이름입니다. 이름이 어머니에게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을 타고 도장밥을 먹고 멀미를 안고 파도에 휩쓸렸을까요. 이름이 제대로 와주어 참 다행입니다. EP 앨범 〈THIS IS MY〉, 단편영화 〈향기〉 〈응시〉를 만들었습니다. 쓴 책으로 여행 산문집 『바다 소년의 포구 이야기』 『여행의 재료들』, 영화 소리 산문집 『사랑 앞에 두 번 깨어나는』, 앤솔러지 소설집 『미니어처 하우스』가 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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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크리스마스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3
쥬느비에브 브리작 지음, 조현실 옮김 / 열림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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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엄마의 크리스마스』는 프랑스 소설가이자 아동문학 작가인 쥬느비에브 브리삭의 소설 작품을로 1996년 페미나상 수상작이다. 출판사 열림원의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세 번째 작품이다. 12월 23일에서 26일까지 나흘 동안 엄마의 아들, 둘이 겪은 고독을 소름 끼치도록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은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나흘 간의 일상을 그려낸다. 삶의 활력을 잃어버린 엄마와 영악해질대로 영악해진 아들 간의 나날일 뿐이다.

기승전결을 갖추거나 잔잔하게 시작되어 클라이맥스로 치달아가는 내용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이 모자의 일상 속에서 이 나흘 간만을 뚝 떼어 내어 그대로 서술한 듯한 소설이다. 소설의 흡인력은 예리한 관찰자이며 이야기꾼인 누크로부터 나온다. 예술가로서의 끼를 억지로 누르고 사는 그녀는 지나친 자의식 때문에 주변의 사소한 것들도 그냥 흘려보내지 못한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감수성으로 집요하게 까발리는 것이다. 누크의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시선 속에선 어떤 공간, 어떤 인물이든 음울하고 몽환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마치 세상 전체가 누크를 더 쓸쓸하고 더 초라하게 만들기 위한 무대장치로 변해버린 듯.

 


 

도시 전체가 휘황찬란해지는 크리스마스. 그 들뜬 분위기를 마치 전투하듯 '통과해야만 하는' 젊은 엄마와 어린 아들이 있다. 저명한 화가로서의 경력을 한순간에 내팽개쳐버리고 남편과도 이혼한 채 도서관 사서로 쓸쓸히 살아가는 엄마 누크.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영악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고 있는 아들 으제니오. 찾아와줄 손님 하나 없이, 그들 둘이서만 크리스마스 축제를 즐겨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장난감 가게, 잡화점, 공원, 워터파크, 백화점 등을 쏘다니지만, 가는 곳마다 그들은 희한한 사람들과 마주친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과 마주할 때마다 상처받을 일이 또다시 생길까봐 잔뜩 긴장한 채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는 둘의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엄마의 좌절과 아들의 고통은 점점 더해간다. 마침내 친구의 별장으로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난 모자를 기다리는 것은, 속물적이고 괴팍한 친구의 가족들과 누크의 전 남편이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며, 이것이 자신이 엄마로서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모자의 나흘을 따라가다보면 한 사람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에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사람의 헌신과 희생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성이라는 이 맹목적인 사랑의 실체가 실은 한 사람의 의지와 노력, 안간힘으로 지속된다는 사실도.” 소설가 김혜진의 평이다. 김혜진 소설가는 이 소설 속의 엄마 누크를 통해 “아이를 키우는 일상이 행복하거나 평화롭지만은 않다”며 “그것은 자비 없는 세상과 싸우는 일이며 수시로 들이닥치는 두려움과 절망감을 이겨내야 하는 일”임을 확인시켜 준다고 말한다.

누크는 어린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외로움과 좌절뿐인 현실을 이겨내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오히려 아이를 망쳐놓을까봐 두렵기도 하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픔을 주지 않는 엄마, 한없이 자애롭기만 한 엄마, 완벽한 엄마는 오로지 죽은 엄마밖엔 없을 거라고.” 소용 없는 사랑이 타고 남은 자리에는까만 그을음만 남는다. “어떻게든 잊어버리고 싶은” “사랑으로 베풀었지만 전혀 기쁨을 주지 못한 선물” 같은 크리스마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게 어떤 건지 우리는 과연 알고 있을까?” 이 물음에 확신을 찾아가는 날들이 언젠가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게 아닐까.

 


 

“이번 크리스마스는 완전히 망쳤다.” 애쓴다고 모든 결말이 해피엔딩은 아니다. 카나리아는 죽고, 워터파크의 인파는 불쾌하고, 백화점은 을씨년스럽다. 초대받은 친구네 집에서는 불청객 취급을 받아 기가 죽는다. “알지, 너의 그 대단한 희생, 그 엄청난 사랑이 아이한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는걸?” 친구, 전 남편, 심지어 당사자인 아들까지 모두가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는 누크가 그의 곁을 떠나야 한다고 속을 긁어댄다. 화가로서의 은퇴, 남편과의 이혼, 아이의 양육······ 행복을 위한 누크의 선택은 모두 좌절된다.

매사 냉담한 그녀는 이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도 별로 없는 사람 같다. “그림의 떡일 뿐”인 행복은 꼭 “원수 같다고 되뇌인다. “억지로라도 행복해져야만 한다는 그 안간힘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은 결코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고, 예기치 않은 불행을 자책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빚진 게 없다.” 그러니 “바다로 나가라. 두려워 말고.” “난파를 당해보는 것만이 바다의 거대함을 알 수 있는 방법이라면, 어떤 희망인들 못 가져보랴.” 실망스러운 크리스마스를 겪어본 아이만이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알 수 있다. “나도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긴 한가···” 아무런 확신도 없지만 행복을 향한 고통의 항해는 계속된다. “꿈꾸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행복이 될 테니. 부딪치고 깨지고 애쓰는 “모습이 우습긴 하겠지만, 그냥 상관 않기로 했다.” “늘 숨기만 하고 결국은 떠나가버리는 사랑”이라 해도, 그것을 지키려는 분투야말로 우리를 살게 만드는 ‘진짜’ 힘의 원천일지도 모르니. 미련한 사랑인 것을 알면서도 놓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으니제오의 엄마 누크는 으니제오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정신적인 것들을 차치하고라도 물질적인 것들을 채워가려는 심리일까? 원하는 동물을 키우게 하고 원하는 곳들을 데려가보지만 아이에게 정성의 마음이 닿기 어려워 보인다. 결국 으니제오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데려온 카나리아 한 마리는 죽고 만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엄마를 향한 마음의 일정 부문이 으니제오의 마음속에서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누크가 아들 으제니오와 전 남편이 함께 있는 것을 바라보며 삶의 잿빛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누크는 자신에게 남은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아들 으제니오를 전 남편에게 뺏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똑같은 잿빛을 그린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누크의 마지막 독백은 쓸쓸하게 혼자가 되어버린 그녀의 우울과 불안 슬픔이라는 감정의 깊이를 담아내는 것이 아닐까?

"거실 벽난로 앞에선 으제니오와 아이 아빠가 나이팅게일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현실에선 기쁨도 결국은 슬픔을 낳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견딜 수 없는 불안이 생겨난다. 우리 집은 어떻게 되는 걸까? 작은 녹색 그림, 아담, 우리 카펫에 가위로 새겨넣은 미로, 우리가 맞춘 퍼즐들, 그리고 붉은 커튼, 영원히 잃고 마는 것인가. 이제 더 이상 길을 그린 그림도, 길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p.271)

 


 

크리스마스 전전날 엄마와 아들은 뭔가 신나거나 예쁜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듯한 대화를 나누지만 결국 크리스마스 다음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되뇌인다. 늘 기대와 현실은 딱 맞아 떨어지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 삶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엄마는 동물들 중에 뭐가 제일 좋아?" 길을 걸어가면서 으제니오가 물었다. 크리스마스 전전날 밤이었다. "코알라, 다람쥐 그리고 수달. 코알라는 유칼립투스 나뭇가지에 네 발로 매달려 있는 게 귀엽고, 캥거루랑 가까이 산다는 점도 좋아. 다람쥐는 도토리 때문에 좋고. 맨날 하는 이야기지만, 도토리 먹는 모양이 정말 귀엽잖니. 수달은··· 글쎄, 멋대가리 없으면서도 처량하게 들리는 이름 때문인가, 물이 생각나기도 하고."(p.9)

"해변으로 내려갔다. 오래된 길을 따라 물을 향해 걸었다. 주머니에 조약돌을 주워 넣고서. '주머니에 조약돌을 주워 넣고서' 이 표현을 누가 썼더라? 모든 게 다 바보 같은 이야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한 일은 없다. 정말로 없다. 물이 이토록 잿빛인 적이 없다. 똑같은 잿빛을 그린다는 건 불가능하다."(p.272)

 

저자 : 쥬느비에브 브리삭

1951년 10월 1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센생드니에서 육 년 동안 교사로 일하다가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편집자가 되었다. 1988년 첫 소설 『소녀』로 아카데미프랑세즈상을, 1996년 『엄마의 크리스마스』로 페미나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다수의 소설과 『올가는 괴로워』 『올가는 학교가 싫다』 『마법의 분필』 『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등 어린이 및 청소년 도서들을 출간했다.

 

역자 : 조현실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석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뫼르소, 살인 사건』 『몸의 일기』 『뚱보, 내 인생』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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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지도, 그러다 떠날지도 - 지리덕후들의 입체적 문학 여행
김경혜 외 지음 / 하모니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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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재미도 있고, 역사 지식도 높이고... 굉장히 의미 있는 에세이이다. 이 책 『읽을지도, 그러다 떠날지도』는 여러 명의 작가가 저마다의 여행지를 따라 그곳의 역사와 문학 속의 무대가 된 이유를 알아볼 수 있는 여행 안내서 같다. 그러나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목적 있는, 시사성 있는 한국의 근현대의 무대로 떠나기 때문에 역사는 물론 그곳 사람들의 당시 생활상도 유추해볼 수 있는 큰 의미가 함유돼 있다. 이 책에는 4명의 저자가 여섯 편의 한국의 근현대 문학의 무대가 되었던 곳들을 직접 살펴본다. 또 내친 김에 역사적 사건이나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자료를 찾아 독자들에게 안내한다. 한 편의 문학 작품을 대할 때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간적 배경부터 찾아봐야 한다늘 말에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이란 너무나 복잡한 존재여서 안정된 거주지와 배우자 이외에 또 다른 것들이 필요하기도 하다. (중략) 행복해지는 방법이 정해져 있지는 않을 거다. 사실 그럴 수도 없고.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등장한 친구들만 보아도, 계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복하게 다가갔다. 삼미 친구들이 보여준 방법은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잘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책 속의 사람들은 이 팬클럽과 아마추어 야구단 활동을 통해서 사회의 보편적 기준과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방법을 찾아냈다. 타인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몰입은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행복을 갖는 또 다른 방법은 계나처럼 싫어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 「프로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나만의 행복을 찾는 법」 중에서

 


 

문학 속 장소를 지도에 찍어보며, 평생을 한 동네에서 살았다면 그토록 편협한 사고를 가졌을 법하다며 주인공의 상황을 이해한다. 작품 속 배경으로 직접 여행을 다녀와, 주인공이 ‘동네 사우나탕 정도의 규모를 지닌 해수욕장’이라고 했던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님을 증명한다. 작가들이 직접 그린 지도와 생생한 여행 후기를 통해서 공간을 통한 문학 읽기의 새로운 재미를 찾아주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문학 이해를 위해서는 역사적, 지리적 배경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미리 이해한다면 작품에 대한 이해가 훨씬 깊고 넓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문학의 공간적 배경과 연관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현재 우리의 삶에 비추어 해석하고 있다. 저자들은 민주화 운동을 겪었던 두 지역을 함께 돌아보다, 부모님께 "그때 그 사건이 정말 북한 괴뢰군 소행이었다고 믿었어요?"라는 다소 불온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또한 호주나 남양주에 가면 정말 우리가 원하는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

꼼꼼히 따져본다. 비록 노답 세상에 대한 교과서적 정답을 찾지는 못한다. 하지만 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방법을 함께 고민하며, 같은 고민을 가진 모든 이에게 유쾌한 공감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제 지도 없인 못 살겠나요?” 그렇다면 이미 당신도 ‘호모 지오그래픽쿠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도 앱과 내비게이션을 켜고 길을 찾는다. 매일매일 정신없는 세상에서 ‘내가 지금 어느 길에 서 있는지’,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항상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반영된 것일까? 이렇게 지도 검색이 일상이 된 시대답게, 『읽을지도, 그러다 떠날지도』는 문학 작품을 읽을 때에도 지도를 활용해볼 것을 제안한다.

“책 속에 나오는 장소가 어디지?”라는 단순한 질문이 필요할 때마다 저자들은 문학을 읽으며 이야기 속에 나오는 장소가 궁금할 때마다 지도 앱을 켰다. 그리고 책 속의 장소를 지도에 표시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그 지도를 따라 함께 여행을 떠났고, 상상하던 곳을 직접 보고 느끼며 걸었다. 자연스럽게 장소와 연계된 역사적 사건들이 궁금해했고, 여행에서 돌아와 관련된 정보를 찾았다. 그리고 함께 나눈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이렇게 종이에 쓰였던 2차원적인 텍스트는 지도를 통해 3차원의 시공간으로 확장되었고, 다시 책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이 소설이 그런 얘기였다고?” 알고 읽으면 훨씬 더 재밌는 한국소설 6권이 나온다. 책장을 넘기면, 저자들이 직접 여행을 하며 새롭게 해석한 한국문학 6권을 만나게 된다. 교과서에서 접했던 작품도 있고, 흥미롭게 읽었던 소설도 있고,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제목만 봤던 책도 있다. 1장에서 다루는 『김약국의 딸들』과 『운수 좋은 날』은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쓰여진 소설로, 각각 통영과 서울(경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동시대의 다른 공간에서 사람들은 각각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2장의 『소년이 온다』와 『차남들의 세계사』는 1980년대 초반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며, 광주 민주화 운동을 중요한 소재로 다루는 소설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광주와 원주라는 각각의 도시에서 어떤 형태로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본다. 3장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2003년에 출판된 소설로,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한국이 싫어서』는 2015년에 출판되었고 동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두 작품을 통해서는 ‘오늘날 한국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의 행복에 공간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묻는다.

『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통영)

『운수 좋은 날』 - 현진건(경성)

『소년이 온다』 - 한강(광주)

『차남들의 세계사』 - 이기호(원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박민규(인천)

『한국이 싫어서』 - 장강영(시드니)

 


 

이 책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 등장했던 곳들을 소개하고, 그 시절의 뉴스 기사 등을 통해 소설 속 주인공이 정말 이 무대에 존재했던 것처럼 믿게 해준다. 공감되고, 안타깝고 또 같이 웃기도 할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삶을 이해하고 실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대체적으로 공감이 간다. 저자들은 지금의 당시의 신문 기사 등 자료를 함께 게재해 실감을 더해주고 작품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이 책을 읽다보면 책의 제목처럼 '읽을지도, 그러다 떠날지도' 모른다. 문득 문득 여행에 대한 갈망이 높아지고, 또 때로는 오랫동안 여행을 못했구나 하는 아쉬움의 현실로 되돌아오면서 독서의 재미를 높여준다. 에세이에 등장하는 소설 속 현장에 대한 상상을 하면서 소설의 내용을 더듬어보기도 하고, 못 가본 곳에 대한 동경심도 생겨 코로나가 끝나면 첫 번째 여행지로 꼭 가봐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현장에서의 생생한 표현이 그 갈망을 더욱 끌어올려 당시 소설책 한 권을 들고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을 체크해 보기도 한다.

 

'내가 지금 사는 시대가 어떤 사회인가'에 따라서도 개인의 삶이 너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스스로 아무리 최선의 선택을 했더라도, 사회적 한계에 부딪히기도 한다. (중략) 지리적 한계보다는 시대적 한계가 개인의 운명과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셈이다. (중략)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더 많은 기회는 '삶의 반경을 넓혀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게다가 삶의 반경은 육체적으로 직접 가볼 수 있는 물리적 공감은 물론이고, 오늘날에는 가상의 공간까지도 동시에 포함하는 확장된 개념이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인지하고, 그에 따라 내 삶의 반경을 정하는 것.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아닐까. 「삶의 반경은 삶의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중에서

 


 

한나 아렌트는 2차 세계대전 나치 정권 아래 유대인 수송의 총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을 통해 '평범한 악'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사실 악이라는 건 어쩌면 대단히 거창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심히 행한 일들의 합일지도 모르겠다. (중략) 또한 대부분 사람은 그들 모두가 일상 속에서 가해자였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고 있다. - 「두려움의 일상화, 공포의 지형도」 중에서

 

저자 : 김경혜

간호사 중 제일 기동력 좋은 간호사라고 자부한다. 커피 마시고 싶다고 춘천에 다녀오다가, 하늘이 맑아 별이 잘 보이겠다며 강화도로 느닷없이 운전대를 꺾어버리는 낭만파니까. 오늘도 인류 건강에 소소하게 이바지하며 다음엔 또 어디로 떠나볼까 즐거운 고민을 한다.

 

저자 : 윤메솔

한 때는 은혜로운 회사느님 덕분에 일 년에 한 달씩 외국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새로운 여행지 후보를 지도에서 찾아보는 건 이제 관뒀지만, 술만 마시면 2차 장소를 찾아가며 “나 지도 잘 봐, 길 완전 잘 찾아.”라고 갈지자로 파워워킹하는 술버릇은 여전하다.

 

저자 : 이수연

매일매일 세상의 온갖 제품들을 팔던 PD가 드디어 자신의 책도 팔게 되었다. ‘이렇게 언젠가는 모든 꿈이 이루어지겠지’ 낙관하며 슬렁슬렁 산책하는 일을 좋아한다. 그리하여 주변의 낯선 동네와 골목을 탐방하는 것이 일상의 취미다.

 

저자 : 정민화

여행을 통한 직접체험만큼이나 독서를 통한 간접 체험을 좋아한다. 어릴 때 이 세상의 모든 책을 읽고 모든 장소를 여행하는 것을 꿈꾸기도 했었다. 현재는 방학을 이용하여 여행을 즐기고 일상에서 틈틈이 책을 만나는 선생님의 삶을 살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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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나기라 유 지음, 김선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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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등장하는 두 개의 도시가 인간이 그리워하는 '유토피아'를 상징한다. 샹그릴라(shangrila)와 엘도라도(El Dorado)가 그것이다. 이상향이라 불리우는 가상의 도시이자, 실제 지명들이다. 샹그릴라는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이 1933년에 펴낸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이란 소설에서 이상향으로 창안해 낸 도시 이름이다. 샹그릴라는 히말라야에 실제로 존재하는 어느 지역의 지명인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소설 속 가상 도시다. 히말라야 산맥 어딘가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샹그릴라는 이상향을 가리키는 일반 어휘로 영어사전에까지 등재되어 있다.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은 간행 이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제임스 힐튼은 이 작품으로 ‘호손덴문학상’까지 수상하였으며, 두 세대 이상에 걸쳐 지금까지도 계속하여 독자층을 넓혀가고 있다.

인류의 이상향 샹그릴라는 칸첸중가의 해발 4,500미터 산록, 가르왈 히말라야와 티베트 국경 지대, 라다크에 인접한 두 사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대 인도의 경전에도 이 신비한 지역이 언급된 바 있다. 중국에는 이 이름을 가진 도시가 실제하고 있으나 소설의 배경과는 무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엘도라도 역시 16세기, 갓 발견된 신대륙을 향하여 많은 남자들이 바다를 건넜다. 그들을 흥분시킨 것은 황금으로 만든 집에 살며 온몸에 사금을 칠한 인간에 대한 전설이었다. 남자들의 욕망은 절정에 달해 대지에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러나 황금향은 욕망의 깊이에 반비례하는 것처럼 지금껏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이것은 나중에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피사로의 부관이었던 남자가 전했다는 체험담이다. 남자의 이름은 오레야나라고 한다. 그는 피사로의 지시로 부대를 이끌고 페루를 출발했지만 산속에서 부하들을 내팽개치고 단독 행동을 했다. 결국 그는 무사히 대서양 쪽으로 나올 수가 있었지만 그 도중에 만난 것이 이 도시, 즉 '황금향(黃金鄕)'이었다. 엘도라도라는 명칭의 유래는 그가 말한 '황금의 사람' 또는 '황금왕'을 의미한다.

 


 

요즘은 세계 정세가 암울하기만 하다. 패권 경쟁을 벌이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뿐만 아니라 코로나 팬데믹까지 더해져 전 인류가 불안 속에서 눈만 끔뻑이며 코로나의 종식만을 기대리고 있는 형국이다. 서로 돕고 협력하며 사는 세상은 언제 올까라는 인류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 것 같다. 키워드로 찾아봐도 종말, 멸망, 재난, 디스토피아 등 암울한 단어가 훨씬 많이 뜨는 시대다. 힘들고 암울한 세상을 희망과 감동을 주는 한 소설 작품이 주목을 끈다.

어두운 소재를 맑고 아름다운 필치로 산뜻하게 빚어내며 희망을 전하는 ‘어둠의 시인’ 나기라 유의 장편소설이 출간됐다. 나기라 유는 2020년 서점대상을 수상한 『유랑의 달』에 이어 이 작품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로 2년 연속 서점대상 최종 후보작에 올랐다고 한다. 나기라 유는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품는 어두운 면과 함께, 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며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게 장기인 것으로 알려진 작가다. ‘관계’를 다루는 장르 BL 작가로 오랜 기간 활동하다 도전한 문예소설은 문단과 평단 양쪽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은 2021년 일본 최대서점 키노쿠니야 서점원 선정 최고의 작품 1위에 선정되며 평단과 대중을 모두 사로잡았다. 이 소설은 ‘소혹성이 충돌해 지구 멸망’이라는 친숙한 소재를 불행한 실패자들의 삶과 엮어 새로이 탈바꿈시킨 역작이다. 이 작품에는 할리우드 영화처럼 초인적인 영웅이 등장하지도, 주인공들이 영웅으로 다시 태어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종말이 확실하기 때문에 불행 속에서 인생 처음으로 진짜 행복을 찾은 사람들의 기묘한 희망 이야기를 그린다.

 


 

이 소설은 지구 멸망이 한 달 후로 확정된 세상의 이야기다. ‘이상향’이라는 뜻의 단어 ‘샹그릴라’는 멸망이라는 소재와 대조되어 제목에서부터 작품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더욱 명확히 드러낸다. 지구에 소혹성이 다가와 곧 충돌한다는 사실을 갑자기 통보받은 네 사람의 이야기가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마다 주인공이 바뀐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언뜻 보면 서로 교류하기 어려워 보인다. 고등학생, 깡패, 미혼모, 가수가 무엇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해답은 이들이 멸망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다. 이들은 모두 갑작스러운 멸망 선언에 딱히 절망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오래 인정받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며 절망하는 데 익숙한 인생의 실패자들이기 때문이다. 저자 나기라 유는 전작들에서 유령이 된 남편과 그와 함께 사는 아내(『하느님의 비오톱』), 납치 피해자와 가해자(『유랑의 달』) 등, 관계가 아주 가까우면서도 서로 어울려 살기 힘든 인물들을 만들면서도 그런 그들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섬세하게 포착해냈다. 이 솜씨는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 작품은 모두 4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멸망 이전 한 달간의 샹그릴라를 그리고 있다. 1장 ‘샹그릴라’의 주인공 고등학생 에나 유키는 소혹성 충돌 뉴스를 듣고 나서 충격받기보다 서글픈 기쁨을 먼저 느낀다. 학교 폭력 피해자로 이미 충분히 궁지에 몰려 있기에, 자기를 괴롭히는 학생들과 한 달 후 멸망이라는 조건하에서 동등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장 ‘퍼펙트 월드’의 주인공 깡패 메지카라 신지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살인 청부까지 받아들이고 실행한 와중에 들은 지구 멸망 선언은 어이없기만 하다. 또 3장 ‘엘도라도’에서는 지구 멸망 발표를 듣고 후회를 거듭하는 미혼모가, 4장 ‘마지막 순간’에서는 거식증에 걸린 인기 가수가 등장한다. 이들, 망한 인생의 표본 같은 사람 넷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만나고 엮이며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린다.

제 1장 「샹그릴라」에서는 하고 싶지 않은 출근을 앞둔 직장인, 등교를 앞둔 학생들이 습관처럼 마음속으로 바라는 호출에 갑자기 신이 응답한다면 어떨까. 심지어 바로 한 달 뒤가 멸망이라면? 주인공 유키는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서 성격이 돌변하거나 큰 충격이나 깨달음을 얻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이기에 짝사랑하는 소녀 후지모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겨우 결심한다. 소심한 태도도 바뀌지 않아 죽기 전 도쿄에 가보고 싶어 하는 후지모리를 여차하면 보호할 수 있도록 집을 나온 그녀를 몰래 따라가는 게 전부다. 그러나 그 짧고 다사다난한 여행 끝에 유키는 부모에게서 독립된 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괴롭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망상하며 회피하던 습관을 버리고, 드디어 자기 자신을 직시할 용기를 내는 것이다.

 


 

이 작품의 네 주인공들은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게 어색한 사람들이다. 자기혐오와 절망이 오래된 만큼 앞으로 길게 이어져갈 미래란 거대한 절망과 짐에 불과하다. 미래란 곧 그만큼 길게 엉망인 꼴로 살고 있을 자기 자신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반짝이는 미래를 당연히 여기던 사람들이 절망하고 무너지는 것과 다르게, 지구 멸망 전 한 달 동안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정한 후엔 빠르게 그 삶에 적응한다. 어차피 한 달 뒤면 끝날 세상이니까. 그 결과 이들은 역설적으로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내고 행복을 즐기는 방법을 깨닫는다. 공포와 분노 속에 동요하며 혼란스러운 최후를 맞는 게 아니라, 본인들이 선택한 장소인 콘서트장으로 향해 음악을 즐기며 겸허히 죽음을 맞이한다. 저자 나기라 유는 출간 후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말한다.

“그 인물이 되어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파고들어야 하는데 도무지 쉽지 않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어요. 타개책을 찾아 퍼뜩 눈앞이 트인 후엔 반나절 만에 썼죠. 거기까지 두 달이 걸렸습니다. 멸망 앞에서는 언뜻 보기에 세상이 평화로워 보일 수 있어도 사실은 그렇지 않고, 사람도 사회도 취약한 모습이 드러날 거예요. 이 소설은 2019년에 플롯을 짰는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엄청난 상황이 되자 세상의 취약성이 드러나 놀랐습니다. 멸망 얘기를 지금 내야 할지 편집진과 논의했었는데요. 그냥 지금은 꺼낼 때 꺼냈다는 마음이 더 강해요.”

 


 

저자 : 나기라 유

어두운 소재를 맑고 아름다운 필치로 산뜻하게 빚어내며 희망을 전하는 ‘어둠의 시인’ 작가.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품는 어두운 면과 함께, 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며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2007년 데뷔 이후 10년 동안은 BL 작가로서 활동했으며, 10년차인 2017년부터 일반 문예소설을 출간하며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관계’를 다루는 장르에서 다져진 섬세한 감정묘사와, ‘당사자들만이 관계의 진실을 쥐고 있다’는 인간사의 본질을 포착하는 솜씨는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다. 결국 2019년 출간한 『유랑의 달』로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한편으로 2020년 서점대상을 수상해 평단과 대중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2020년에 발표한 대표작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는 ‘소혹성 충돌로 지구 멸망’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독창적으로 다루며, 인생의 실패자들이 멸망을 계기로 혐오했던 자기 삶을 마주보는 과정을 현실적이고도 희망적으로 그려 2연속 서점대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역자 : 김선영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방송 등 다양한 매체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했으며 특히 일본 문학을 소개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 시리즈를 비롯하여, 이사카 고타로의 ‘명랑한 갱’ 시리즈, 『종말의 바보』,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소시민’ 시리즈, 나기라 유의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외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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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를 권하다 -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5
이진우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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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에 관한 한 이 책은 필수 교양서이다.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개인주의, 특히 한국인의 개인주의에 대해 쓴 책 중에서는 단연 돋보인다. 독자는 사회 비평서를그리 많이 읽는 편은 아니다. 단지 오늘의 한국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의식과 지식을 얻는다는 측면에서 읽을 뿐이다. 때문에 문제의식으로 가득 찬 사회 비평서를 읽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아서 여간해선 손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 『개인주의를 권하다』는 한 출판의 ‘인생명강’ 시리즈의 하나로 출판된 책이어서 선택했다. 21세기북스에서 펴내는 인생명강 시리즈는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전국 대학 각 분야 최고 교수진의 명강의를 책으로 옮겼고, 날카로운 분석과 미래를 제시한 것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 이진우 교수는 니체 철학 최고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어 독자로서는 관심이 높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개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우리 사회를 진단하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내 삶을 사랑하는 개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심도 있게 모색한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사는 일에 지쳤다면, 일상에서 부딪히는 기준들 때문에 나만의 개성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느낀 적 있다면, 본연의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다면, 이진우 교수가 전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 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나는 개인주의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 무거운 시대를 가볍게 그러나 의미 있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독자도 비록 조금이라도 더 한국의 개인주의와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을 갖는 데 이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 『개인주의를 권하다』는 여전히 집단주의를 답습하는 사회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힘이 되어줄 철학적 통찰을 선사하며, 혼란스러운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고 조금 더 담대히 나답게 살아가라는 지침을 담았다.

혼밥, 혼술 등의 라이프 스타일이 일상화되었으며, 1인 가구의 생활을 보여주는 TV 예능 프로그램은 큰 인기를 끌고, 많은 회사들이 직급 대신 이름을 부르는 수평적 체계를 도입했다. 한국 사회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개인주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나이를 묻거나 상하관계를 확인하고, 튀지 않고 주변에 적당히 맞추어 살기를 서로 강요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개인’으로서의 삶은 이해받기 어렵고, 개인주의자는 별종 취급을 받곤 한다. 남들과 똑같이 살고, 아등바등 경쟁하고, 의무와 위계에 순종해야만 인정받는 삶이 건강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니체는 다른 사람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건 ‘노예의 삶’이라고 말했다. 전통적 집단주의 사회가 붕괴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개인과 개인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넌 너무 개인주의적이야.’라는 말을 비난처럼 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자유롭고 행복한 삶,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원한다. 지금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자. 당신은 삶을 사랑하고 있는가? 삶의 이유를 궁금해한 적이 있는가? 과연 나 자신이 정말 나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할 때이다.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등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대한민국 독자들에게 철학으로 사유하는 즐거움을 선사한 바 있는 저자는 “우리가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하며, 8가지 질문을 통해 우리를 스스로가 삶의 진리가 되는 길로 인도한다.

진정한 개인과 개인주의의 의미, 나를 둘러싼 환경을 최소한의 상태로 디자인하고 정서적 균형을 유지하는 법,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잡는 방법 등을 담아낸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나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고 삶의 척도를 자신에게서 발견할 것을 이야기한다. 또 진리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슬퍼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판단의 중심에 타인이나 집단이 아닌 나를 놓는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할 때라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들어가며-희망이 없는 사회의 유일한 희망인 개인주의자를 꿈꾸며」를 통해 "강한 집단주의 토양에서 개인은 왜곡되어 기형적인 형태로 자라난다. MZ세대나 90년대생은 겉보기에는 집단적 가치를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의 가치와 만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새로운 세대는 정말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고 있는가?"라는의문을 제시하며 "우리 사회에 '주권적 개인'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추구하면서 남을 힐끗거리고, 여론과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타인들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기형적 대중'만 들끓는다. '욜로(YOLO)'나 '소확행'이라는 이름으로 순간의 만족을 추구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유행을 좇는 대중은 결코 개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건강한 개인주의를 위해 "미래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않더라도, 삶의 척도를 자신에게서 발견해야 한다. 나 아닌 어느 누구도, 우리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유혹하는 복지국가도 안전하게 강을 건널 인생의 다리를 세워주지 않는다. 오로지 나 혼자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견해를 분명히 한다.

 


 

책에 따르면 개인주의는 16세기를 기점으로 서양에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자본주의·민주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개인화를 21세기의 메가 트렌드라고 꼽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주의의 본질적인 의미가 퇴색된 채 자기중심적인 태도 혹은 ‘이기주의’의 다른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이 책 『개인주의를 권하다』에서 니체의 말을 토대로 이기주의에 대한 편견을 뒤엎는다.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물건으로 대하는 태도는 부정적 이기주의지만, 개인적인 욕구를 추구하면서도 타인을 나와 같은 욕망이 있는 인격체로 대하는 태도는 건강한 개인주의이다”라며 건강한 개인주의의 필요성을 설파한다. 저자는 여전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주의 문화와 권위주의적인 위계질서 가 건강한 개인주의를 가로막고 있음을 지적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불거진 ‘갑질 문화’를 날카롭게 진단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한 자기 인정, 자기 인정을 바탕으로 한 타인의 인정, 이 두 가지가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비로소 건강한 개인주의가 탄생한다고 설명한다.

저자의 주장은 결국 “너는 너 자신의 인격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격에서도 인간성을 항상 목적으로 사용하고 결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하라.”는 말로 귀결될 수도 있다. 개인주의는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이 나와 같은 욕망을 지닌 인격체로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사람을 물건으로 대하지 않고, 사회 구성원 모두의 성장을 도모하는 분위기가 갖춰졌을 때 건강한 개인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어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을 권유한다. 나는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니체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자아 찾기가 사회적 화두가 된 지 오래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를 모른다.

저자는 또 이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자아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말한다.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이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는 실존적 불안을 겪기 마련이다. 혼란스럽고 무겁기만 한 현실 속에서 내 중심을 찾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 즉 기초적 신뢰가 필요하다. 누에가 고치를 깨고 아름다운 나비로 재탄생하듯 우리에게도 한 발 더 도약하기 위한 ‘보호고치’가 필요하며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구체적인 물음과 성찰이 요구된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심장을 뛰게 합니까?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러분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 BTS의 리더 RM의 유엔 총회 연설 중

 


 

공동체를 너무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존엄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먼저 의심해야 한다. 개인의 이익과 가치를 내세우는 태도를 도덕적인 잣대로만 평가한다면 진정한 개인주의는 발전하기 어렵다. 성숙한 시민사회가 도래할 때, 한국 사회에도 아름다운 개인주의가 정착할 수 있다.

-「6강 _ 질문하지 않는 사람들」중에서

 

저자 : 이진우(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우크스부르크 대학교 철학과 전임강사,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ㆍ총장,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니체 철학 최고의 권위자로 니체가 그랬듯 인간 실존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답을 찾고 있다.

『균형이라는 삶의 기술』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 『한나 렌트의 정치 강의』 『니체: 알프스에서 만난 차라투스트라』『의심의 철학』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고, 『공산당 선언』 『인간의 조건』 『글로벌 위험사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철학으로 사유하는 힘을 전하고 있다. 『개인주의를 권하다』에서는 나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회 속에서 개인주의의 필요성을 설파한다. 모든 판단의 중심에 나를 놓는 개인주의자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며, 진리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스스로 자기 삶의 진리가 되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전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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