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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 한권으로 전국적인 명망을 얻은 젊은 천재 작가 마커스 골드만.
데뷔작으로 한순간에 돈방석에 오르고 미국에서 내로라는 셀러브리티가 된 마커스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사치를 누리며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꿈같은 시간은, 정말 꿈처럼 사라져 버린다. 후속권 집필 작업을이 좀처럼 시작할 수가 없었다. 첫번째 책의 성공에 힘입어 얻어낸 두번째 책의 계약 만료 시간은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었고, 하얀 백지위에 새롭게 펼쳐낼 이야기는 그림자조차 찾아낼 수 없었던 마커스는 뉴햄프셔주의 작은 도시 오로라에 기거하고 있는 은사를 찾아가게 된다. 대학 시절, 자기 자신을 '자신' 이라는 틀 안에서 꺼내 주었던 선생님이자, 십수년간 미국에서 꼭 읽어야 할 소설, 금세기 최고의 소설이라는 평을 듣는 [악의 기원] 의 작가인 해리 쿼버트. '작가들의 병' 이라 불리우는 큰 고비에 처한 마커스는 오로라라는 작은 도시에서 구즈코브라는 저택에 혼자 외롭게 기거하고 있는 그를 찾아간다.
마커스가 그렇게 오로라를 다녀간 며칠 뒤, 해리 쿼버트의 저택인 구즈코브의 앞마당에서 30여년 전 실종된 소녀 놀라 캘러건의 시체가 발견된다. 거의 다 부패된 시체 옆에는 해리 쿼버트의 소설인 [악의 기원]의 원고가 놓여 있었다.
당시 서른 네살이었던 해리 쿼버트는 등단은 했지만 큰 주목은 받지 못했던 문학 교사였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동안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소설에 집중하기 위해 작은 도시 오로라의 아름다운 저택 구즈코브를 빌렸더랬다. 해리 쿼버트의 비상과 추락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던 것이다. 서른 네살의 해리 쿼버트는 소설을 위해 칩거하기로 한 오로라에서 열다섯 살 소녀 놀라 캘러건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 [악의 기원] 은 해리 쿼버트와 놀라 캘러건이 나눈 사랑의 편지를 모아 완성된 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며 해리 쿼버트는 유력한 살인 용의자가 되고, 심지어 미성년자와 사랑을 나눈 소아성애자로 낙인찍히며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사랑하는 은사이자 절친한 친구인 해리 쿼버트가 절대 살인을 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마커스 골드만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오로라로 떠난다.
이야기의 도입부는 굉장히 전형적이다.
미국식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고전이나 다름없는 존 그리샴의 [고백] 과 같은 작품이 바로 떠올랐다.
그렇다. 이 작품은 매우 전형적인 플롯을 따르고 있다. 사실 미국식 장르소설은 매우 뻔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재미를 보장한다. 이야기의 유기적인 구성을 뜻하는 '플롯' 은 사실 공공재와 같이 인식되기 때문에 장르소설은 틀을 깨는 획기적인 구성보다는 틀 안에 촘촘하게 채워넣는 컨텐츠들의 퀄리티로 작품성을 평가받곤 한다.
[HQ]는 철저하게 장르적인 눈으로 본다면 아주 매력적인 작품은 아니다.
위에도 언급했다시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 자체부터 고전적인 치정살인의 모습을 띄고 있다. 고립된 작은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모습으로 촘촘하게 얽혀있고, 주인공 마커스 골드만과 게할로우드 경사가 그런 사람들을 한명 한명 만나 진술을 받은 내용을 토대로 가설을 만들어 사건을 재구성하는 형식 또한 전혀 새롭지 않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진범이 밝혀지는 과정들도 치밀한 개연성으로 인한 것이 아닌, 우연의 반복으로 이뤄짐으로써 큰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하며, 비슷한 장르의 소설들이 주는 서스펜스와 스릴의 강도는 매우 약하다.
하지만, [HQ]에서 장르 소설의 틀을 빼고 본다면 매우 참신하고 재미있는 소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이라는 작품의 타이틀이다. [HQ]는 젊은 작가인 마커스 골드만이 책을 집필하는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마커스 골드만이 '해리 쿼버트 사건' 이라고 명명된 놀라의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이유는 절친이자 은사인 해리 쿼버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이라는 책을 집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즉, 작가가 동명의 책을 쓰는 내용이 이 작품의 내용이기도 하다. 일종의 메타픽션의 형태로써 작품의 창작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는 플롯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큼직한 사건들과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상당한 리얼리티를 획득해낸다.
[HQ]는 전형적인 미국식 스릴러의 틀을 고스란히 답습함과 동시에, 그 틀을 부정하는 시도를 동시에 해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작가인 조엘 디케르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 싶었을까? 분명 독자들과 두뇌싸움을 하고 싶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기엔 사건도 너무 평이하고, 범인과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나 서스펜스가 너무 약하다. 물론 논리적인 인과관계나 개연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사건 자체의 흥미를 위한 수많은 장치들 - 맥거핀이나 복선같은 부분들도 적절한 위치에서 충분한 역할을 발위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적인 장치들은 지나치게 정석을 따르고 있어서 장르소설 매니아들에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게 다가올 수 있다. 한 때 아가사 크리스티나 토머스 해리스, 존 그리샴 등 미국식 장르소설에 푹 빠진 경험이 있는 나에게도 사건의 진실이나 진범은 그리 어렵지않게 추리해 낼 수 있었다. 나에게 이 책은 장르소설 적인 완성도 보다는 다른것에 훨씬 더 흥미가 갔다. 이 작품을 지나치게 '충격적인 반전' 운운하며 장르 소설로 홍보했던 것이 상당히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커스 골드만이 해리 쿼버트 사건을 파헤치며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관계'이다.
[HQ]의 가장 큰 재미는 등장인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과거' 와 '비밀' 들인 것이다. 그래, 그걸 '진실' 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터. 작가는 바로 남들이 모르는 자기들만의 '관계' 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작품 안의 등장인물들은 살인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이벤트를 통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내밀한 사정들을 밝혀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데, 그 대부분은 바로 '관계' 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진범이 누구인지,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보다 오로라라는 작은 도시에서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와 그 내밀한 사정들이 훨씬 더 흥미를 끌었다. 아니, 사실 사건의 진실이 바로 이 사람간의 관계성 안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해리 쿼버트가 죽은 놀라와의 비밀스러운 '관계' 였다.
[HQ]는 크게 놀라 중심의 인간관계와 마커스 골드만 중심의 인간관계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굴러간다.
마커스 골드만과 해리 쿼버트의 관계는 현대의- 아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가장 갈구하는 진정한 멘토와 멘티의 관계이다. 해리 쿼버트가 마커스 골드만을 훈육하는 과정이나, 서로가 우정을 쌓아나가는 과정들은 큰 즐거움을 준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마커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해리 쿼버트와의 관계를 특별히 부각시키는데, 이 둘의 관계 뿐 아니라, 해리 쿼버트와 놀라의 관계, 엘리야 스턴과 루터 케일럽과의 관계, 그리고 테머라와 로버트 퀸 부부의 관계, 주요 인물들의 부모 자식간의 관계 등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뽐내고 있다. 특히 마커스 골드만이 어머니와 전화통화하는 내용들은 정말 빵빵 터지는데, 대사와 상황들을 기가 막힐 정도로 디테일하게 표현해 낸다.
마커스 골드만과 해리 쿼버트의 관계는 일견, 해리 쿼버트가 과거 놀라와 가졌던 관계와도 흡사하다. 작가로서도 큰 슬럼프에 빠져있던 해리 쿼버트는 놀라의 맹목적인 응원으로 인해 작가적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놀라가 해리 쿼버트에게 하는 말들은 수십년 뒤, 해리 쿼버트가 마커스 골드만에게 하는 말들과 매우 닮아있기도 하다.
마커스 골드만이 맺고 있는 관계들 중 해리 쿼버트와의 관계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관계는 바로 작가와 출판사와의 관계이다.
작가는 해리 쿼버트와 마커스 골드만의 관계를 통해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작가론' 을 설파하는 한편, 마커스 골드만과 출판사 사장인 로이 버나스키의 관계를 통해 작가와 출판사의 관계에 대해 풀어놓는다. '작가'는 '작품'을 쓴다. 그리고, 출판사는 그 작품을 '상품' 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안에서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다. 바야흐로 현대는 대중문화의 시대이다. 대중들은 수많은 컨텐츠들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고, 작품들은 그 선택을 통해 '읽힐' 기회를 획득한다. 출판사는 작가의 작품을 뛰어난 상품으로 가공해 낼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버나스키는 그 지점을 매우 탁월하게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책의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작가에게 거침없이 고스트 라이터 팀을 붙일 정도로 사업적 수완이 뛰어난 버나스키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SNS를 마케팅에 활용하는데 있어서도 거침없는 행보를 보인다.
무엇보다 마커스 골드만이 맺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관계는 창작자와 창작물의 관계이다.
해리 쿼버트는 마커스 골드만에게 끊임없이 '글 쓰는 법' 에 대해 가르친다. 작가는 단순히 타고난 재능이나 상상력만으로 작품을 완성하지 않는다. 작가가 만들내는 문장과 사건들 속에는 작가의 경험과 생각, 사상이 녹아있다. 즉 삶 그 자체가 녹아있는 것이다. 해리 쿼버트는 마커스 골드만에게 작가에게 글이란 무엇인지, 작품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부터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독자들을 빨아들이기 위해 발휘해야 할 기술까지 모두 전수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무리 역시 해리 쿼버트와 그의 창작물 [악의 기원]의 관계로 맺고 있다.
마커스 골드만 주변의 관계들이 비교적 이성적인 관계라고 한다면, 놀라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다.
해리 쿼버트와의 사랑은 어린 소녀의 판단을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몰고간다. 그렇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본질이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다. 사랑, 우정, 질투, 오해는 물론 죄의식과 자아분열까지.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놀라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뻗어나가 있다.
이 작품은 그 두께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해리 쿼버트라는 인물에 큰 연민을 가졌다. 사건의 핵심 인물로써 놀라를 살해한 주요 용의자로 지목되는 인물이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가져다 준 [악의 기원] 이라는 작품을 썼지만, 그 이후 후속작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는 위대한 작가이자, 마커스 골드만에게 큰 영향을 미친 대학 교수이다. 그리고, 사랑했던 놀라의 죽음 이후 다시는 그 누구도 마음에 담지 못한 채, 홀로 늙어가는 외로운 남자이다. 해리 쿼버트와 놀라의 관계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에 등장하는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의 관계와 상당한 유사성을 지닌다. 작품 안에는 마치 롤리타에 대한 오마쥬처럼 보이는 장면들도 등장할 정도로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놀라의 성격이나 행동조차 롤리타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해리 쿼버트는 '진실' 이라는 거대한 짐을 지고 평생을 고통스럽게 보낸 인물이다. 오롯하게 문학의 길을 걸으려고 모든 걸 다 버렸지만,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의심으로 큰 고통을 받았고, 놀라를 만남으로써 그 고통은 대부분 해갈된다. 뮤즈와도 같았던 놀라는 뜨거운 사랑으로 해리 쿼버트에게 끊임없이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사랑의 기쁨도 알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런 반짝이는 순간에도 미성년자와 30대 중반 남성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고통받았고, 끝내는 잃어버리고 만다. 그녀와의 연서를 모아 만든 책 [악의 기원]. 그 책은 해리 쿼버트에게 큰 명예와 거대한 부를 가져다 주지만,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책에 [악의 기원] 이라는 제목을 붙인 바로 그 순간부터 해리 쿼버트는 '진실' 이라는 거대하고 고통스러운 굴레를 쓴 것이었다.
해리 쿼버트에게 마커스 골드만은 놀라와도 같은 존재였다. 마커스 골드만은 해리 쿼버트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오르게 했고, 놀라가 자신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줬듯이 마커스에게 용기와 희망을 선사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악의 기원] 이라는 고통스러운 멍에를 벗게 해 줄 당사자라고 여겼을터다.
'세상 모든 것이 미스테리' 라는 말을 한 위대한 추리소설 작가가 있었다.
우리는 사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멀게는 지구의 기원과 생명의 신비부터, 가깝게는 부모님의 하루 일과까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매우 가까운 듯 하지만, 굉장히 멀고, 일거수 일투족이 공개된 듯 하지만, 아무것도 알고있지 못하다. 마커스 골드만이 해리 쿼버트 사건을 파헤치면서 우리는 놀라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이 관계가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었고, 또 마무리이기도 했다. 하기사, 죽음만큼 간단하게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마커스 골드만을 통해 모든 진실이 명명백백히 밝혀진 순간, 어떤 관계들은 무너지고, 또 어떤 관계들은 생겨난다.
그리고, 해리 쿼버트는 무거운 진실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작가와 작품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 '작가들의 파라다이스'로 떠난다. 남은 그의 여생이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