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왼손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서정록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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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구상에 딱 한 사람만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의 고독의 깊이는 어느정도일까?

외계인을 향한 인류의 갈망은 어찌보면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과 같은 심정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빛의 속도로 10억년을 가도 끝에 닿을 수 없는 광활한 우주. 이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시공간 안에 지적인 생명체가 인간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쿵 내려앉을 정도의 고독감을 느끼곤 한다.

 

어슐러 르 귄은 영미권에서  'SF의 3대 거장' 이라 불리우는 아이작 아시모프와 로버트 하인라인, 아서 클라크 바로 뒤에 위치하는 작가이다. 당대의 SF소설들은 철저한 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미래의 세계관을 풀어내는데 집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슐러 르 귄은 단지 지구와 지구의 미래 뿐 아닌 완벽한 '외계' 그 자체에 집중했다. 지구와 다른 환경, 다른 모습, 다른 역사를 가진 사회는 어떻게 발전해 왔을지, 그 안에 사는 지성체들은 어떠한 사고방식과 외모를 갖고 있을지에 집중했다. 그녀는 그야말로 놀라운 상상력과 깊이있는 통찰력으로 무척 뛰어난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이렇듯 어슐러 르 귄은 당시 SF장르를 지배하던 남성들이 만들어낸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역행하며 수많은 작품들을 끊임없이 발표했고, 그녀의 작품들이 내포하고 있는 인문학, 사회학적 통찰력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결국 그녀의 노력과 재능은 SF는 물론 판타지 장르를 통해서도 가감없이 발휘되며, SF 쪽에서는 '헤인 시리즈' 라 불리는 장편 연작으로, 판타지 쪽에서는 '어스시 시리즈' 라 불리는 장편 연작으로 결실을 맺으며 장르를 초월해 문학사 자체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당시 남성중심 사회에서도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났던 별로써, 작품 전반에 페미니즘적인 성격도 짙게 묻어있다. 그녀의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는 공격적인 성향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다름'을 직시하고, 사회적인 불평등, 부조리함을 인지시킴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남녀 평등을 추구했다.

 

[ "같은 종족이긴 합니다만 그 차이는 매우 크지요. 저는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남자로 태어났는지 여자로 태어났는지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평등은 보편적인 규칙이 아닌가요? 아니면 여자들은 정신적으로 열등한가요?"

 "(...)여자들의 지성이 모자란 것은 아닙니다. 몸도 근육질은 아니지만 남자보다 인내력은 강하지요.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그는 난로의 불꽃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하스, 여자에 대해서 도무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왠지 여자란 존재가 당신보다 더 외계인처럼 느껴지는군요. 당신은 어쨌든 나와 같은 성이고..."]

p. 299~300. 지구인 겐리와 게센의 원주민인 세렘의 대화.

 

 

 [어둠의 왼손] 은 1969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Sf-판타지 문학상의 양대산맥인 네뷸러와 휴고 상을 동시에 휩쓴 작품이다.

어슐러 르 귄의 대표적인 연작 시리즈물 '헤인 연대기' 에 속하는 작품으로 83개의 행성과 3000개의 국가가 맺고있는 일종의 상호협력기구인 '에큐멘' 에서 지적인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 '게센' 을 새로 발견하여 일종의 사자로 파견한 '겐리 아이' 라는 인물이 겪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게센은 에큐멘에서 '행성 겨울' 로 불리우는 극한의 자연환경을 갖고 있지만, 지구인과 거의 비슷한 외모를 가진 원주민들이 독창적인 사회체제를 갖고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 행성에는 특이하게도 게센인들 외에는 다른 종의 동물이 거의 없었고, 자연 환경상 날짐승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게센인들은 양성兩性이었다. 이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케머' 라고 불리우는 기간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일종의 임신가능기로써 게센인들은 바로 이 기간동안에만 상대에게 성욕을 느끼게 된다. 

 에큐멘에 속해있는 인간 종족 가운데서도 양성을 가진 종족은 게센인이 유일했기에, 겐리 아이는 게센의 사회에서 뜻밖의 상황들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 작품은 타자他者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관한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이야기인 동시에,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설명해주는 이야기이다. 나아가, 인류의 사회구조와, 문명 그 자체에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에 따른 역할 구분이 얼마나 근원적인 문제를 유발하는지에 관해 깊이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작품은 놀라운 스토리 텔링을 통해 게센인들의 삶과 사상을 보여준다. 

성욕이 담보되지 않은 사람과 사람간의 우정과 사랑의 미묘한 경계, 지극히 지구인적인 관점에서 동성과 이성을 넘나드는 자유롭고도 미묘한 연인관계, 가족관계, 그리고 역시 그로 인해 파생되는 독특한 정치구조와 국가 구조, 그와 함께 게센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통찰력으로 인해 탄생한 종교 등 경이로운 상상력들이 깊이있는 통찰과 안목을 통해 생물-인문학적인 개연성을 끊임없이 획득해간다. 

 

 게센인과 그들의 사회에 관한 이야기도 참으로 흥미로웠지만, '에큐멘' 이라는 범 우주적인 협력기구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행성을 묶어주는 네트워크이지만, 구속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순수하게 행성간의 우호적인 교류를 위해 만들어진 협력기구인 동시에 체제로써 고도로 성숙된 이상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특히 사자를 파견할 때 단 한명이 행성으로 내려간다는 사실도 파격적이고도 놀라웠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연락용 위성을 행성 궤도에 띄워놓고, 11명의 선원이 수면대기중인 우주선이 위성궤도에 체류중이지만, 행성에 내려가 동맹임무를 수행하는 사자는 단 한 명. 그것은 상대 문명에 대한 지극한 존중이자 배려로써 에큐멘이 '진정한' 협력기구라는 점을 증명한다. 88개의 행성에 3000개의 국가가 가입해 있는 초 거대 단체이지만, 상대 행성을 굴복시켜 억지로 가입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협력' 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겐리 아이는 자신의 진심. 에큐멘의 진심을 게센인들에게 보여주며 동맹 가입을 설득하려 한다. 그가 타고 내려온 우주선은 아낌없이 게센인들에게 내어주어 분해하게 하고, 가지고 있는 첨단 기술들을 대가없이 나눠주려한다. 

사실, 양성인이 등장하는 외계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 안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 에큐멘이라는 협력단체였다. 어떠한 이익도 바라지 않으며, 구체적으로 행정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에큐멘은 협력단체이며 협력기구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체제이고, 88개의 행성과 3000여개의 국가가 공유하고 있는 평화에 대한 거대한 갈망이다. 이런 단체가 정말 가능할까?? 상식적으로 기능적인 면에서 불가능에 가까울터다. 

 좀 더 생각해보면, 에큐멘에는 이미 충분한 행성들과 충분한 인간들이 있다. 단체 자체가 충분히 성숙될 만큼 성숙되어 있는 상태이다. 무려 88개의 행성이다. 게센과 같은 외딴 행성의 자원이나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 전쟁은 공멸이지만, 교류는 공생이다. 88개의 행성과 3000여개의 국가가 가입되는 동안 분쟁이나 전쟁이 없었을 리 없다. 무수한 전쟁과 숱한 희생 속에서 당연한 진리를 깨우쳤을 것이고, 그로 인해 생겨난 여러가지 체계가 성숙될 만큼 성숙된 협력체계가 바로 '에큐멘' 인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에큐멘' 은 어슐러 르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형태의 협력기구이며, 가장 갈망하는 협력체계이자 평화에 대한 갈망이 구현된 것으로 '헤인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어슐러 르귄의 희망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에큐멘의 입장에서 지적인 생명체들이 살고 있는 외딴 게센 행성은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로써 빨리 이 친구를 우리 무리 안에 편입시켜서, 수많은 다른 친구들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당신네 종족은 이 세계에서 소름 끼칠 만큼 외로운 동물입니다. 다른 포유동물도 없고 양성을 가진 다른 동물도 없으니까요. 심지어 애완동물로 기를 만한 정도의 지능을 가진 동물도 없지요(...)철학적으로, 정서적으로 보면 당신들은 너무도 고독하고 적의에 찬 세계 속에 살고 있어요 "

p. 297. 

 

[어둠의 왼손]은 여러번 읽은 책이다. 

어슐러 르귄의 소설은 너무나 다양한 안목과 놀라운 통찰력들이 깃들어 있어서 한두번 읽어서는 그 맛을 충분히 만끽할 수 없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단순히 양성인 게센인들이 신기할 따름이었지만, 두번 읽을땐 게센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 구조의 논리적 개연성, 게센의 자연환경으로 인한 게센인의 생활 양식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 구조, 정치구조, 그리고 중간중간 들어있는 게센의 전설과 종교들 등 매 번 놀랍고 새로운 발상들이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만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이야기는 지극한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신은 혼자이면서도 실은 혼자가 아니군요. 아마도 당신은 우리가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는 것 못지않게 전체성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역시 이원론자입니다. 이원론은 본질적인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 와 '타자' 가 있는 한 말입니다."

"나와 당신... 그렇군요. 그 편이 성性보다는 더 넓은 범주이겠군요."

p.298~299

 

인간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존재이다.

이 말은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품의 제목인 [어둠의 왼손]은 작품 내에 등장하는 게센인의 노래에서 유래한다.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케머 연인처럼

함께 누워 있다

마주 잡은 두 손처럼

목적과 과정처럼"

p.298

 

즉, 이 책의 제목인 '빛' 인 것이다. 

 

어둠과 빛, 삶과 죽음, 목적과 과정.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나와 당신. 

어쩌면 인류와 지구, 외로움마저도.  

함께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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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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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으로 전국적인 명망을 얻은 젊은 천재 작가 마커스 골드만.
데뷔작으로 한순간에 돈방석에 오르고 미국에서 내로라는 셀러브리티가 된 마커스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사치를 누리며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꿈같은 시간은, 정말 꿈처럼 사라져 버린다. 후속권 집필 작업을이 좀처럼 시작할 수가 없었다. 첫번째 책의 성공에 힘입어 얻어낸 두번째 책의 계약 만료 시간은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었고, 하얀 백지위에 새롭게 펼쳐낼 이야기는 그림자조차 찾아낼 수 없었던 마커스는 뉴햄프셔주의 작은 도시 오로라에 기거하고 있는 은사를 찾아가게 된다. 대학 시절, 자기 자신을 '자신' 이라는 틀 안에서 꺼내 주었던 선생님이자, 십수년간 미국에서 꼭 읽어야 할 소설, 금세기 최고의 소설이라는 평을 듣는 [악의 기원] 의 작가인 해리 쿼버트. '작가들의 병' 이라 불리우는 큰 고비에 처한 마커스는 오로라라는 작은 도시에서 구즈코브라는 저택에 혼자 외롭게 기거하고 있는 그를 찾아간다.
 마커스가 그렇게 오로라를 다녀간 며칠 뒤, 해리 쿼버트의 저택인 구즈코브의 앞마당에서 30여년 전 실종된 소녀 놀라 캘러건의 시체가 발견된다. 거의 다 부패된 시체 옆에는 해리 쿼버트의 소설인 [악의 기원]의 원고가 놓여 있었다. 
 당시 서른 네살이었던 해리 쿼버트는 등단은 했지만 큰 주목은 받지 못했던 문학 교사였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동안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소설에 집중하기 위해 작은 도시 오로라의 아름다운 저택 구즈코브를 빌렸더랬다. 해리 쿼버트의 비상과 추락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던 것이다. 서른 네살의 해리 쿼버트는 소설을 위해 칩거하기로 한 오로라에서 열다섯 살 소녀 놀라 캘러건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 [악의 기원] 은 해리 쿼버트와 놀라 캘러건이 나눈 사랑의 편지를 모아 완성된 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며 해리 쿼버트는 유력한 살인 용의자가 되고, 심지어 미성년자와 사랑을 나눈 소아성애자로 낙인찍히며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사랑하는 은사이자 절친한 친구인 해리 쿼버트가 절대 살인을 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마커스 골드만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오로라로 떠난다.
 
 이야기의 도입부는 굉장히 전형적이다. 
미국식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고전이나 다름없는 존 그리샴의 [고백] 과 같은 작품이 바로 떠올랐다. 
그렇다. 이 작품은 매우 전형적인 플롯을 따르고 있다. 사실 미국식 장르소설은 매우 뻔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재미를 보장한다. 이야기의 유기적인 구성을 뜻하는 '플롯' 은 사실  공공재와 같이 인식되기 때문에 장르소설은 틀을 깨는 획기적인 구성보다는 틀 안에 촘촘하게 채워넣는 컨텐츠들의 퀄리티로 작품성을 평가받곤 한다. 
 [HQ]는 철저하게 장르적인 눈으로 본다면 아주 매력적인 작품은 아니다.
위에도 언급했다시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 자체부터 고전적인 치정살인의 모습을 띄고 있다. 고립된 작은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모습으로 촘촘하게 얽혀있고, 주인공 마커스 골드만과 게할로우드 경사가 그런 사람들을 한명 한명 만나 진술을 받은 내용을 토대로 가설을 만들어 사건을 재구성하는 형식 또한 전혀 새롭지 않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진범이 밝혀지는 과정들도 치밀한 개연성으로 인한 것이 아닌, 우연의 반복으로 이뤄짐으로써 큰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하며, 비슷한 장르의 소설들이 주는 서스펜스와 스릴의 강도는 매우 약하다. 
 
 하지만, [HQ]에서 장르 소설의 틀을 빼고 본다면 매우 참신하고 재미있는 소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이라는 작품의 타이틀이다. [HQ]는 젊은 작가인 마커스 골드만이 책을 집필하는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마커스 골드만이 '해리 쿼버트 사건' 이라고 명명된 놀라의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이유는 절친이자 은사인 해리 쿼버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이라는 책을 집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즉, 작가가 동명의 책을 쓰는 내용이 이 작품의 내용이기도 하다. 일종의 메타픽션의 형태로써 작품의 창작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는 플롯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큼직한 사건들과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상당한 리얼리티를 획득해낸다. 
 [HQ]는 전형적인 미국식 스릴러의 틀을 고스란히 답습함과 동시에, 그 틀을 부정하는 시도를 동시에 해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작가인 조엘 디케르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 싶었을까? 분명 독자들과 두뇌싸움을 하고 싶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기엔 사건도 너무 평이하고, 범인과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나 서스펜스가 너무 약하다. 물론 논리적인 인과관계나 개연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사건 자체의 흥미를 위한 수많은 장치들 - 맥거핀이나 복선같은 부분들도 적절한 위치에서 충분한 역할을 발위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적인 장치들은 지나치게 정석을 따르고 있어서 장르소설 매니아들에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게 다가올 수 있다. 한 때 아가사 크리스티나 토머스 해리스, 존 그리샴 등 미국식 장르소설에 푹 빠진 경험이 있는 나에게도 사건의 진실이나 진범은 그리 어렵지않게 추리해 낼 수 있었다. 나에게 이 책은 장르소설 적인 완성도 보다는 다른것에 훨씬 더 흥미가 갔다. 이 작품을 지나치게 '충격적인 반전' 운운하며 장르 소설로 홍보했던 것이 상당히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커스 골드만이 해리 쿼버트 사건을 파헤치며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관계'이다. 
[HQ]의 가장 큰 재미는 등장인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과거' 와 '비밀' 들인 것이다. 그래, 그걸 '진실' 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터. 작가는 바로 남들이 모르는 자기들만의 '관계' 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작품 안의 등장인물들은 살인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이벤트를 통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내밀한 사정들을 밝혀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데, 그 대부분은 바로 '관계' 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진범이 누구인지,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보다 오로라라는 작은 도시에서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와 그 내밀한 사정들이 훨씬 더 흥미를 끌었다. 아니, 사실 사건의 진실이 바로 이 사람간의 관계성 안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해리 쿼버트가 죽은 놀라와의 비밀스러운 '관계' 였다.
 
 [HQ]는 크게 놀라 중심의 인간관계와 마커스 골드만 중심의 인간관계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굴러간다. 

 마커스 골드만과 해리 쿼버트의 관계는 현대의- 아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가장 갈구하는 진정한 멘토와 멘티의 관계이다. 해리 쿼버트가 마커스 골드만을 훈육하는 과정이나, 서로가 우정을 쌓아나가는 과정들은 큰 즐거움을 준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마커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해리 쿼버트와의 관계를 특별히 부각시키는데, 이 둘의 관계 뿐 아니라, 해리 쿼버트와 놀라의 관계, 엘리야 스턴과 루터 케일럽과의 관계, 그리고 테머라와 로버트 퀸 부부의 관계, 주요 인물들의 부모 자식간의 관계 등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뽐내고 있다. 특히 마커스 골드만이 어머니와 전화통화하는 내용들은 정말 빵빵 터지는데, 대사와 상황들을 기가 막힐 정도로 디테일하게 표현해 낸다. 
 마커스 골드만과 해리 쿼버트의 관계는 일견, 해리 쿼버트가 과거 놀라와 가졌던 관계와도 흡사하다. 작가로서도 큰 슬럼프에 빠져있던 해리 쿼버트는 놀라의 맹목적인 응원으로 인해 작가적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놀라가 해리 쿼버트에게 하는 말들은 수십년 뒤, 해리 쿼버트가 마커스 골드만에게 하는 말들과 매우 닮아있기도 하다. 
 
 마커스 골드만이 맺고 있는 관계들 중  해리 쿼버트와의 관계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관계는 바로 작가와 출판사와의 관계이다. 
작가는 해리 쿼버트와 마커스 골드만의 관계를 통해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작가론' 을 설파하는 한편, 마커스 골드만과 출판사 사장인 로이 버나스키의 관계를 통해 작가와 출판사의 관계에 대해 풀어놓는다. '작가'는 '작품'을 쓴다. 그리고, 출판사는 그 작품을 '상품' 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안에서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다. 바야흐로 현대는 대중문화의 시대이다. 대중들은 수많은 컨텐츠들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고, 작품들은 그 선택을 통해 '읽힐' 기회를 획득한다. 출판사는 작가의 작품을 뛰어난 상품으로 가공해 낼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버나스키는 그 지점을 매우 탁월하게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책의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작가에게 거침없이 고스트 라이터 팀을 붙일 정도로 사업적 수완이 뛰어난 버나스키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SNS를 마케팅에 활용하는데 있어서도 거침없는 행보를 보인다.  

 무엇보다 마커스 골드만이 맺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관계는 창작자와 창작물의 관계이다.
해리 쿼버트는 마커스 골드만에게 끊임없이 '글 쓰는 법' 에 대해 가르친다. 작가는 단순히 타고난 재능이나 상상력만으로 작품을 완성하지 않는다. 작가가 만들내는 문장과 사건들 속에는 작가의 경험과 생각, 사상이 녹아있다. 즉 삶 그 자체가 녹아있는 것이다. 해리 쿼버트는 마커스 골드만에게 작가에게 글이란 무엇인지, 작품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부터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독자들을 빨아들이기 위해 발휘해야 할 기술까지 모두 전수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무리 역시 해리 쿼버트와 그의 창작물 [악의 기원]의 관계로 맺고 있다.
 
 마커스 골드만 주변의 관계들이 비교적 이성적인 관계라고 한다면, 놀라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다. 
해리 쿼버트와의 사랑은 어린 소녀의 판단을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몰고간다. 그렇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본질이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다. 사랑, 우정, 질투, 오해는 물론 죄의식과 자아분열까지.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놀라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뻗어나가 있다. 

 이 작품은 그 두께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해리 쿼버트라는 인물에 큰 연민을 가졌다. 사건의 핵심 인물로써 놀라를 살해한 주요 용의자로 지목되는 인물이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가져다 준 [악의 기원] 이라는 작품을 썼지만, 그 이후 후속작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는 위대한 작가이자, 마커스 골드만에게 큰 영향을 미친 대학 교수이다. 그리고, 사랑했던 놀라의 죽음 이후 다시는 그 누구도 마음에 담지 못한 채, 홀로 늙어가는 외로운 남자이다. 해리 쿼버트와 놀라의 관계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에 등장하는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의 관계와 상당한 유사성을 지닌다. 작품 안에는 마치 롤리타에 대한 오마쥬처럼 보이는 장면들도 등장할 정도로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놀라의 성격이나 행동조차 롤리타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해리 쿼버트는 '진실' 이라는 거대한 짐을 지고 평생을 고통스럽게 보낸 인물이다. 오롯하게 문학의 길을 걸으려고 모든 걸 다 버렸지만,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의심으로 큰 고통을 받았고, 놀라를 만남으로써 그 고통은 대부분 해갈된다. 뮤즈와도 같았던 놀라는 뜨거운 사랑으로 해리 쿼버트에게 끊임없이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사랑의 기쁨도 알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런 반짝이는 순간에도 미성년자와 30대 중반 남성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고통받았고, 끝내는 잃어버리고 만다. 그녀와의 연서를 모아 만든 책 [악의 기원]. 그 책은 해리 쿼버트에게 큰 명예와 거대한 부를 가져다 주지만,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책에 [악의 기원] 이라는 제목을 붙인 바로 그 순간부터 해리 쿼버트는 '진실' 이라는 거대하고 고통스러운 굴레를 쓴 것이었다. 
 해리 쿼버트에게 마커스 골드만은 놀라와도 같은 존재였다. 마커스 골드만은 해리 쿼버트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오르게 했고, 놀라가 자신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줬듯이 마커스에게 용기와 희망을 선사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악의 기원] 이라는 고통스러운 멍에를 벗게 해 줄 당사자라고 여겼을터다. 

 '세상 모든 것이 미스테리' 라는 말을 한 위대한 추리소설 작가가 있었다. 
우리는 사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멀게는 지구의 기원과 생명의 신비부터, 가깝게는 부모님의 하루 일과까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매우 가까운 듯 하지만, 굉장히 멀고, 일거수 일투족이 공개된 듯 하지만, 아무것도 알고있지 못하다. 마커스 골드만이 해리 쿼버트 사건을 파헤치면서 우리는 놀라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이 관계가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었고, 또 마무리이기도 했다. 하기사, 죽음만큼 간단하게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마커스 골드만을 통해 모든 진실이 명명백백히 밝혀진 순간, 어떤 관계들은 무너지고, 또 어떤 관계들은 생겨난다. 
그리고, 해리 쿼버트는 무거운 진실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작가와 작품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 '작가들의 파라다이스'로 떠난다. 남은 그의 여생이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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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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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신神의 나라이다' 라는 문장을 본 기억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 이란 GOD와는 완전히 다르다. Ghost 나 Spirit에 가까울까. 샤머니즘에서 파생된 각종 신들이 일본에서는 여전히, 섬겨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큰 갈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와 일본의 문화는 사실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일본인들 대다수의 종교인 불교와 신도神道는  우리의 불교와 무속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물, 특히 자연과 조상을 섬기는 신도와 우리의 무속신앙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하지만 우리의 무속신앙이 '무당' 중심의 종교라면 일본은 '신사' 위주의 종교이다. 우리의 무속신앙은 불교와 결합한 형태로 발전하다가 기독교가 급속도로 유입되며 점차 갈 곳을 잃어버린 것에 비해 일본의 신도는 불교과 결합한 형태로 발전하여 지금도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고 있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한 군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야스쿠니 신사를 지금도 참배하고 있고, 도쿄같은 대도시 곳곳에 신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여전히 수많은 일본인들이 복과 행운을 빌기 위해 찾을 뿐 아니라, 너구리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은 물론 제의적인 의미를 지닌 상징들을 여전히 숭배하고 있다.

다시 언급하지만 우리 문화와 일본 문화는 그 뿌리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쇄국' 을 천명했던 우리 나라가 근대에 접어들며 일제와 미제의 통치를 받으며 기이하게도 기독교가 발달하며 무속신앙등의 전통 종교가 이른바 '미신'으로 폄하되며 배척당한 것에 비해 섬나라인 일본은 '개항' 과 함께 전통 종교인 신도가 발달한 현상은 많은 인문.종교.역사. 인류학자들의 구미를 자극하고 있다.      

 일본에 설화(모노가타리) 가 하나의 문학으로 자리잡은 것도 현상적으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미신' 으로 치부하지만, 일본에는 '당연' 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수많은 것들이 '문학' 의 형태로 자리잡는 것 말이다. 기독교가 온전히 자리잡은 우리나라에 수많은 '기독교 서적' 이 있는 것 처럼 일본에는 수많은 '설화 문학 서적' 이 있고, 그러한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기독교 간증집' - 이른바 기독교 서적 시장이 있다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크게 발달한 일본에는 수많은 모노가타리 문학 시장이 있다고 봐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일본 문학을 처음 접했던 것은 90년대 후반. 고등학교 2~3학년 무렵이었다. 

남고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가 '노골적인 성애묘사' 부분만 접힌채로 지금의 야동처럼 손에 손을 타고 전해졌고, 그렇게 일본문학을 접했던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를 그렇게 접했었다.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라는 작품은 그야말로 '신기' 한 소설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읽었던 '해변의 카프카' 역시 그와 비슷한 '신기' 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만화가의 꿈을 꾸던 그 시기에 탐독했던 수많은 일본 만화들과 간간히 접했던 일본 문학은 '환상' 이라는 틀 안에서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달'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일본의 고전 모노가타리 문학과 현대 문학과의 접점을 이룬듯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일본 문학에 대한 일종의 고정관념이 있었다. 장르문학을 중심으로 크게 발달한 일본문학은 캐릭터와 서사에 특히 강하다. 문장은 대부분 캐릭터를 묘사하고 서사를 풀어내기 위해 간결하게 벼려져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왔다. 치밀하게 계산된 단어들, 체계적으로 짜여진 문장들, 의도대로 나뉘어진 문단들.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 그리고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허무주의와 판타지, 그리고 마치 그것들을 까부수겠다는 듯한 노골적인 성애 묘사. 내가 가지고 있는 일본문학에 대한 편견은 그런 것들이었다.

 이 작품은 나의 그런 편견들을 완벽하게 까부수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유려하고 화려한 묘사들이 첫눈에 들어왔다. 

 


"대단히 준수한 용모, 그러나 재빠르게 두세 번씩 연이어 깜빡이는 그 깊은 눈매에는 붉은 기 도는 동판에 예리한 침으로 수없이 선을 덧새긴 듯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개화기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을, 이국적인 흑담즙질 얼굴." 


"노승은 대답없이 입을 다문 채 붉은 저녁 해에 눈길을 던졌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 한 뭉치가 무심히 놓여졌다."

" 바로 조금 전까지 그윽이 바라보던 눈앞의 꽃이 활짝 핀 채로 돌연 바닥에 떨어지듯, 여인의 환상이 본래 자신의 세계로 물러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불현듯 마사키의 마음속에 꿈이니 현실이니하는 말이 넘쳐나와 각각의 세계를 결박하기 시작했다. 여인은 언어에 의해 갇힌 몸이 되었다." 

   

 솔직히 조금은 과하게도 느껴지지만, 은유와 직유, 대유를 넘나드는 이런 화려한 수사법들은 물론, 고풍스럽고 전통적인 묘사와 함께 세련되고 감각적인 단어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고전적이지만 고루하지 않고, 세련되지만 묵직하며, 유려하지만 튀지 않는 문장들이 첫인상을 사로잡는다. 

 독자의 호흡을 쥐락펴락하는 작품의 호흡 역시 기가 찰 만큼 적당하다. 마치, 소개팅 자리에서 지루해질 때 쯤 관심있는 화제를 툭툭 내뱉어 어색한 공기를 누그러 뜨리며 호감을 사는 파트너의 느낌이랄까. 아무렇게나 던진 듯한 말들이 큰 호감을 이끌어 냈는데, 알고 보니 그 말들이 다 계산된 것들임 -내가 이 화제를 꺼내면 분명히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같은?- 을 느꼈을 때의 기분이랄까. 순간순간 번득이는 작가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 혹은 아무 생각 없이 휘갈긴 듯한 일관성 없는 서사구조가 작가의 탁월한 호흡과 더불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한다. "이게 뭐지? 이게 뭐지??" 하면서도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독특한 흡입력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의도대로, 주요 화자인 마사키를 중심으로 읽다보면, 서사의 흐름 자체가 혼란스럽고 어지럽다는 사실을 쉬이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시공간을 비틀고, 나비와 뱀 같은 메타포를 사용해 끊임없이 마사키를 혼란시키고, 마사키를 뒤쫓는 독자들을 혼동시킨다. 그리고 끝내 서사의 마무리는 마사키가 아닌 다카코를 통해 맺어버린다. 

 이 이야기는 난데없이 시작해서, 황급하게 마무리된다.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치밀하지 않은 듯 보이고, 여백이 굉장히 많은 작품이다.


 소설들을 읽다보면,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책을 덮으며, "아, 이건 이런 이야기였구나." 라고 할 때와, "이건 무슨 이야기야?" 라고 할 때.

대부분 전자의 책이 잘 읽히고, 후자의 책은 잘 읽히지 않는 편인데, 이 작품은 후자이면서도 잘 읽히는 편이었다.

거의 책을 펴자마자 단숨에 읽어내려갔을 정도로 술술 잘 읽혔음에도,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엄청난 여백과 수수깨끼들에 정신이 몽롱할 정도였다. 마치 수수깨끼를 펼치면 여백이 채워질 것 같은 느낌이어서, 정신없이 수수깨끼에 매달렸더랬다.

읽고 난 뒤 한참동안, 그리고 며칠동안 문득문득 생각나며,

"그래서 이건 어떤거지? 이 장치는 뭐를 위한 장치였던거지? " 등등.


사실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뭔가를 얻으려는 편은 아니다.

애초에 소설은 독자에게 답을 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저자가 한가지 주제만을 위해 한 권을 책을 쓰지는 않는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는 있을지언정, 한 권의 책엔 한 작가의 수많은 사상들이 집적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야기 그 자체에 집중하는 편인데, 이 작품은 이야기의 얼개 안에 독자의 상상력을 요하는 수많은 빈틈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화두는 '나 자신을 내던지는 사랑', 즉, '정열' 일 것이다.

주요 화자인 마사키는 정열을 잃고 희미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자신을 다 바칠 정열의 대상을 찾기를 갈구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정열의 대상이 사랑의 대상으로 귀결되었고, 결국 그것을 위해 스스로를 활활 태우게 된다.

작품을 '미사키의 여정' 이 아닌, '미사키의 정열' 중심으로 읽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빈틈이 어느정도 메워지고, 작가가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것처럼 보이는 장치들이 제 자리에서 삐그덕 거리며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한 때 '매트릭스' 라는 영화에 열광했던 적이 있다.

매트릭스가 정말 대단한 이야기였던 이유는, 현실現實과 실재實在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과 함께, 감독들의 철학적인 사유의 열매들이 툭툭 던져졌기 때문이었다. 뿐 만 아니라,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수많은 빈틈과 여백들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연스럽게 관객들이 끼어들 여지를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매트릭스 관련 서적들이 나왔었고, 이공계에서 바라본 해설서와, 인문계에서 바라본 해설서들이 교차로 등장하여 수많은 매니아들을 끌어들였더랬다. 심지어 감독들인 워쇼스키 (당시)형제가 철학적인 바탕이라고 언급했던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끄와 시뮬라시옹에 관한 책들이 국내에 출간되기도 했고, 기독교계에서는 매트릭스를 '반 기독교적' 이라고 공격하는 책들과, 주인공 '네오' 에 '예수 그리스도' 를 대입시킨 '친 기독교적' 종교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빈틈' 과 '철학적 사유'.

[매트릭스]와 [달]은 이야기의 구조면에서 상당히 닮아있다.

뭐랄까.

천재들의 작법, 화법이랄까. 

나는 그냥 내가 하고픈 말을 했는데, 하고픈 이야기를 썼는데, 관객과 독자들이 환호하고 열광하고, 파고들고, 분석하고, 수많은 다른 이야기를 양산해낸다. 

당연하게도 이런류의 이야기들은 호불호가 완전히 나뉜다.

치를 떠는 쪽과, 열광하며 파고드는 쪽. 

어떤 독자를 막론하고,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얇다는 것일 터다.


얇지만, 몇배나 많은 상상력과 이야기들을 이끌어내는 작품.

[달]의 진짜 매력은 그런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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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마치 - 진옥섭의 사무치다
진옥섭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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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잊혀진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다.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고, 잊혀지는 것이 당연하다. 한 인간의 죽음은 그 자신에게는 세계의 소멸과도 같지만, 그 죽음을 바라보는 타인에게는 단지, 한 타자者의 소멸에 불과하다. 하루에도 수억명이 죽어나가고, 수억명이 태어나 그 빈 자리를 메운다. 수억명의 세계가 사라지고, 수억명의 세계가 생성된다. 하지만, 나머지 수십억의 사람들은 사라진 수억명의 사람을 서서히 잊어갈 뿐이다.

 때로는 한 인간의 죽음이, 실제로 한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언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언어는 타인에게 전래되지 못했고, 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이 죽었다. 그가 남긴 모든 기록은 전파되지 못했고, 그 언어를 사용했던 민족의 역사와 기록들은 그 사람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다. 한 세계의 죽음이었다. 한 문화의 사멸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노름마치]는 '놀다'의 놀음과 '마치다' 의 마침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잽이(연주자)를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라고 한다. 곧 그가 나와 한 판 놀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맺어야 했고, 이렇게 놀음을 마치게 하는 고수 중의 고수를 노름마치라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노름마치들은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기에 합당한 분들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 중의 최고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된 기억들을 몸 안에 새긴 고서高書이자, 흘러간 세월들이 빚고있는 한 세계의 마지막 사람들이다. 

 '예술' 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도 있고, 실제적인 의미도 있으며, 해석적인 의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게 "다른사람들이 보기에 즐겁고 아름다운 것"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즐거운 것과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고되기 짝이없는 삶은 특히 '생각하는' 능력이 있고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간들에게 특히 더 괴로운 것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예술을 만들어냈다. 삶의 고됨을 잊고 살아감에 대한 스트레스를 모두 해소할 수 있는, 즐겁고 아름다운 것들. 

 예술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각종 과학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즐겁고 아름다운 것들을 접하기가 무척 쉬워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무척이나 가까워진 듯 보인다. 댓글을 통해 수초에 한번씩 서로서로 수많은 소통을 하고, 구만리 떨어져 있는 곳의 기인들이 펼쳐내는 화려한 기예를 감상할 수도 있다. 심지어 그들의 비법을 전수받을 수도 있고, 수많은 기술들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다. 세계가 그만큼 좁아졌다. 

 하지만 불과 백여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세계는 너무나 넓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놀라운 기예를 갖춘 예술가를 평생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했다. 장터에 뛰어난 예술가가 나타나 노름을 놀면 모든 사람들이 생업을 내던지고 그 판으로 달려갔다. 사당패가 신묘한 묘기에 농삿일의 고됨을 잊었고, 무용가의 화려한 춤사위에 가뭄 걱정을 떨쳐보냈다. 명창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에 죽음의 공포를 잊었다. 그렇게 삶의 일부이고,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인 예술을 즐길 수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어렵다.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아름다움을 경탄받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수준의 기예로는 택도 없다. 아주아주 특출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십수년, 나아가 수십년에 가까운, 아니 평생에 가까운 정진이 필요하다. 재능을 타고 나기도 힘들었지만, 예술을 접하기도 힘들었고, 기예를 지닌 예인을 만나기도 힘들었으며, 특출난 기예를 가진 수준 높은 예인을 만나기는 더더욱 힘들었으니, 당시의 예인들은 가히 로또수준의 인연을 만나야만 가능했을터다.

 그렇게 인연의 고리가 닿고 닿아 맥을 이어오던 우리 전통 예술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다행히 일부 의식있는 예인들이 보존을 위해 발품을 팔고 주머니를 털어 지역 협회를 만들고 예인들을 모아 정기적인 발표회를 열고,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도 쉽지만은 않았다. 예인은 천한 신분이었다. 특히 여성 예인들은 대부분 기생이거나 무당이었다. 급격한 근대화를 겪으며 우리 사회의 신분제는 적절히 소화되지 못했고, 경제발전 중심의 상공업 발전정책으로 인해 복지와 문화는 뒤켠으로 밀려났다. 그 시기를 넘기니 이번에는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돈이 되는' 예술만 살아남기에 이르렀다. 오래된 것은 돈이 되지 못하는 세상이다. 모두가 새로운 것만을 찾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들은 가장 글로벌한 시대인 오늘엔, 확실히 배척받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 전통 예술은 간신히 명맥만 이어지고 있을 뿐. 진짜 노름마치들은 자신의 기예를 오롯하게 전수해줄 후학도 길러내지 못한 채 사라져가고 있다.

     

 저자인 진옥섭은 전통무대의 기획과 연출을 하며 직접 만나온 노름마치들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록해 두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부터 시작하여, 한 사람의 일생을 가감없이 풀어내고, 그가 가지고 있는 기예를 능란하게 서술한다.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노름마치들의 춤사위와 소리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듯 하다. 감칠맛 나는 글맛이 오감을 만족시킨다.

 책을 읽는 내내 많은 부분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한 인간의 삶 쯤은 가볍게 무시하는 고고한 역사의 흐름에 의해 속절없이 휩쓸려간 노름마치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뼈를 깎는 고통스러운 수련을 거쳤지만, 그래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올랐지만, 때를 잘못 만나 제대로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춤사위 한 번 떨치지 못했던 노름마치들의 이야기는 시시 때때로 어깃장을 놓는 우리 인생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삶과 종교가 하나가 되고, 고통과 눈물을 핏속에 녹여내어 인간이 바라볼 수 없는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것은 이미 '즐겁고 아름다운' 경지를 가뿐히 넘어선다. 

바라보는 사람들의 들숨과 날숨을 빼앗고, 눈과 귀를 홀리고, 결국엔 그 혼마저 쥐고 흔드는 경지에 오른 예술가들. 노름마치.


과학 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더욱 약해졌다.

이제 지인을 만나기 위해 애써 산 하나를 넘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어갈 필요가 없다. 입을 열 필요도 없이 환히 빛나는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에 손가락을 바삐 놀리면 어떤 대화도 가능하다. 빨래나 설거지도 간단하다. 네모난 통 안에 쑤셔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된다. 요리는 또 어떠한가. 굳이 재료를 사러 시장에 갈 필요도 없다. 어제 수확한 채소를 오늘 집에서 받아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목에서 쓴 물을 쏟아내도록, 허리와 관절이 부서지도록 노력하여 '돈'도 되지 않는 기예에 인생을 바칠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갈 것이다. 노름마치에 이르는 길은, 그 끝에 부도, 명예도 없는 고난의 길이 되어버렸다.

 이 책이 감동적이면서도 아쉬운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노름마치' 라는 한 세계의 종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많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전통 혼과 문화가 만들어낸 한 세상을 잃어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잊혀진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다.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고, 잊혀지는 것이 구슬프다.

이 책이 기쁘고 행복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책은 오래된 것들을 붙들고, 사라지 않도록, 잊혀지지 않도록 기록한 것이기에. 

어쩌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전통 혼과 문화가 만들어낸 한 세상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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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브라이언 아자렐로, 리 베르메호 지음, 임태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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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자궁안에서 만난 작은 세포 하나에서 시작되는 '생명'은 수개월동안 세포 분열을 반복하며 인간의 모습을 갖춰 나간다. 태아의 뇌가 만들어지고 각종 신경 줄기들이 몸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데, 눈目이 만들어지는 모습은 흡사 뇌가 더듬이처럼 길게 뻗어나오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한다. 눈은 어찌보면 몸 밖으로 돌출된 뇌의 일부분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눈은 뇌 - 정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기관이다. 중요하다고 인지하는 점은 잘 보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마치 보이지 않는 것 처럼 스쳐 지나기도 한다. 그런 반면 어떤 사람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진처럼 그대로 찍혀 뇌 안에 저장되는 능력을 타고나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를 본 순간, 그 사람과 관련된 기억들이 떠올라 여러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렉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넌 인간이 아니야." 

루터의 눈 앞에 나타난 이 강철의 남자; 맨 오브 스틸 이자 빅 블루 스카우트, 블러, 그리고 포 투머로우(미래의 사나이)인 슈퍼맨은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거대한 벽에 불과하다. 루터에게 슈퍼맨이란 존재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아이콘에 불과하다. 인간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 그의 앞에서 모든 인간의 모든 과학과 능력은 인간의 개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인간인 루터에게 슈퍼맨은 거대한 악몽, 그 자체이다. 

 

 이 작품이 정말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그러한 '시각의 다름' 을 표현한 곳에 있다.

루터의 눈에 슈퍼맨은 정의의 수호자나 인간의 친구가 아니라 거대한 악당이고 악마에 불과하다. 우리에겐 슈퍼맨의 가장 큰 숙적이자 빌런('히어로'의 상대개념으로 흔히 '악당'으로 번역된다.) 으로 알려져 있는 루터이지만, 루터가 왜 슈퍼맨을 적대시할 수 밖에 없는지 이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미국 코믹스의 양대 산맥, 마블과 DC에는 각각 '간판 캐릭터'라 불리우는 캐릭터들이 있다. 수십년간 수백명의 작가들을 통해 에피소드가 쌓이고, 재해석이 거듭되며 인격이 형성되어 생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작은 만화 출판사를 차근차근 대기업으로 성장시켜준 '1등 직원' 들. 특히 DC의 '슈퍼맨' 은 그 자체가 미국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적인 철학들이 쌓인 미국의 아이콘이랄 수 있다. 

 슈퍼맨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신神이고, 완벽한 존재이다. 렉스 루터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태풍에 의지가 있다고 해봐. 그 다음 그 힘에 천 배를 곱해 봐. " 

 그가 우리편이라 다행이라는 브루스 웨인에게 루터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변하면? 만에 하나... 오늘이라도 갑자기 우리를 내려다보며 더 이상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면? 내일 불현듯 그가 이런 생각을 하면 어쩌지? '뭐하러 지구를 지키고 있나? 그냥 손가락 딱 튕기고 지배하면 되는데?' 그 땐 우린 어쩌지? 우리가 가진 건, 우리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건 결국 그의... 말뿐이잖나."

현대의 국제 사회에서 미국이 맡고 있는 역할 역시 이와 비슷하지않은가? 

소비에트가 무너진 이후 홀로 승승장구해 온 미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이자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이다. 그 어느 국가이든 미국의 눈 밖에 나면 손가락 딱 튕기듯 제거된다. 세계의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손에 잘려나갔다. 렉스 루터의 눈에 비친 슈퍼맨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어떤 사람들 눈에 비친 미국과 같을 터다. 


 렉스는 [인간의 미래]를 위해 슈퍼맨은 불필요한 요소라고, 초인이란 인류의 앞길을 막을 뿐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슈퍼맨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강력한 힘과 그 앞에서 아무리 용을 쓰고 노력을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인간임에 자괴하고 자조한다. 슈퍼맨의 힘에 대한 강력한 질투와, 욕망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루터에게 '절대 가질 수 없는 것' 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지극한 분노가 더해진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세상 그 누구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아집과 내가 뛰어넘을 수 없다면, 없애서라도 능가하겠다는 욕망의 화신인 것이다. 

 루터는 인류를 위해, 인류의 적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모든 인간이 숭배하는 슈퍼맨을 처단하기 위해, 슈퍼맨을 숭배하는 모든 인간들을 적으로 돌리는 길을 택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인류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기로 결정한다. 인류가 [미래의 사나이]라 부르는 신-슈퍼맨을 처단하기 위해 모든 인생을 걸기로 결정한다. 


그는 냉혹하고 과감하게 슈퍼맨과 맞선 유일한 인간이었다. 태풍에 맞서고, 신에 맞선 유일한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본다. 

눈이란 외골격으로 돌출된 뇌와 같아서, 눈에 보이는 것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맞닿아있다. 

누군가에게 루터는 사악한 빌런일 것이고, 누군가에게 루터는 인류를 외계인으로부터 해방시켜줄 히어로일 것이다. 


브라이언 아자렐로는 이렇듯 다른 시각에서 히어로와 빌런을 바라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유난히 음영이 짙은 마스크 묘사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리 베르메호는 찰떡 궁합을 선보인다. 

그야말로 최고의 이야기와, 최고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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