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스터머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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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주의 






[코끼리는 안녕] 이라는 특별한 소설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이었다.

이 책은, 지금도 가끔 출석중인 월례 독서 토론 모임에서 다룬 적이 있기도 했는데,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 책이었다.

유독 그 날은 출석자도 많고, 강성(?) 패널들이 참석한 덕에 이 책이 수상한 상을 비난한 내용까지 있었고, 그 저주(?)덕인지 상 자체가 사라졌다.

나 역시 처음 읽기시작했을 땐, 이미지 과잉에 어디서 본듯한 캐릭터들의 향연처럼 느껴졌는데, 읽어가는 내내 묘한 매력을 느꼈더랬다.

뭐랄까, 강풀 작가나 주호민 작가의 웹툰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작화의 미숙함을 의도적 단순화를 통해 장점을 극대화하고, 그와 견고하게 맞아 떨어지는 연출과 이야기를 본 느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아무렇게 연결한 것 같은데, 결국은 듬성듬성해 보이지만, 잘 짜여진 큰 바구니 같은 느낌. 


그로부터 약 5년 후에 발표한 [커스터머]는 보다 세련된 문장과 안정된 연출을 이용해 '여전히' 통통 튀는 아이디어들을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갈음하는 기술을 선보인다.


판타지 문학의 오랜 팬으로써 이 작품의 근본적인 아이디어나 세계관이 막 '엄~~청나게' 신선한 것은 아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관이나 돌연변이, 의도적인 신체 개조 등은 고전적이랄 수 있을 정도로 흔한 소재다.

하지만, 누누히 언급해왔지만, 특정 장르의 문학들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장르적 한계가 존재한다.

클리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엄연히 공공재, 누구에게나 허락된 이야기의 '재료' 로 취급받는다.

판타지에서의 클리셰는 배추로 김치를 담그거나, 전을 부치거나, 쌈채소로 이용하거나의 차이에 불과하다. 심지어, 김치로 전을 부치거나, 찜을 쪄먹거나, 볶아 먹거나, 찌개를 해먹는 정도까지도 이해된다.

아주 약간의 새로운 것만 있어도 응원을 받을 수 있다.

김치 치즈 탕수육처럼.


그래, 이 작품은 딱 그렇다.

김치 치즈 탕수육 같은 책이다.


아주 신선하지는 않지만, 아주 새로운 조합이다.

익숙한 맛들의 조합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다.



'모래폭풍' 이 있었다.

그 이후 인류의 삶은 크게 변했다.

'재건' 이후, '모래' '비취' '태양' 이라는 세개의 구역으로 크게 나뉘었다.

모래구역은 일종의 슬럼가로, 가장 가난한 계층이 거주하는 구역이었다. 사막에 세워진 도시였고, 일년내내 모래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중엔 모래가 가득해서,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했고, 집 안에서는 언제나 창문을 꼭꼭 닫아놓고 살아야 했다.

태양구역은 이름 그대로 파란 하늘과 반짝이는 햇살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람들이 태양구역을 보고 '자연을 독점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비취구역은 모래구역 인근에 위치한 곳으로, 거대한 유리돔과 동굴 구역, 둘로 나뉘어 있었다. 유리돔 안은 인공태양을 통해 빛과 온도를 조절할 수 있었고, 동굴 구역 사람들은 지하 깊숙한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자신들만의 룰로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이 세 구역은 사실상 계급이나 다름없었다.

모래구역 사람들은 모래 폭풍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버텨낸 이들이었지만 '웜스' 라고 불리며 경멸당했고, 비취구역 사람들은 모래 폭풍 동안 방공호에 숨어있던 사람들로 '뻔뻔한 병신' 취급을 당했다. 모래폭풍 당시 가장 피해가 적었던 태양구역 사람들은 그것이 특권인양 누리며 모래인들과 비취인들을 한껏 경멸하고 천시했다. 

모래구역의 중학생 '수니' 는 통합 정부의 지역간 화합 정책의 일환으로 태양구역의 중심이자 수도인 '시드' 의 중앙 고교로 진학하게 된다. 룸메이트는 돌연변이 '중성인' 으로 남녀가 한몸에 있는 '안' 으로 배정되어 수니의 생활은 하루아침에 180도로 바뀌게 된다.

한편, 이 세계는 유전학과 의학이 극도로 발달해 사람의 신체 일부를 자유롭게 변형시킬 수 있었다.

몸에서 꽃이 자라게도 할 수 있었고, 피부를 비늘로 덮거나, 레이스 무늬를 넣거나, 눈동자를 바꾸거나, 다른 목을 달거나, 날개를 달 수도 있었다.

이런 행위들을 '커스텀' 이라 했고, 이렇게 신체 일부를 변형한 이들을 '커스터머' 라고 불렀다. 

커스텀은 일종의 패션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사회적으로 찬반이 나뉘는 중이었고, 일부 커스터머들을 혐오하는 일파도 생겨났다. 그들을 '커스터비아' 라고 불렀다.

수니는 열렬한 커스텀 애호가로, 커스텀은 자신의 외모를 스스로 선택하는 행위라 여겼다. 언젠가 반드시 커스텀을 하고 말리라는 굳은 결심을 한 터였다.

하지만, 뜻밖에 자신이 머리에 뿔이 있는 돌연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새 학교 생활에 혼돈이 끼얹어진다. 

    


 작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해리 포터' 시리즈와 '바스라그 연대기' 시리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서 학창생활을 한다는 점이나, 마법과 같은 과학기술들이 휘황찬란하게 펼쳐진다는 점, 온갖 괴이한 신체 개조인들이 등장한다는 점 등에서 비슷한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디어들은 단순히 재료에 불과하다. [커스터머]는 완벽하게 그 작품들과 궤를 달리한다.

우선 [커스터머]의 주인공인 '수니' 와 '안' 은 사실상 인격적으로 상당히 성숙되어 있다. 예를들어, 수니는 안에게 '비취구역 사람들' 에 대한 편견을 무심결에 표출해버리지만, 안의 상처받은 표정은 단박에 알아채고, 자신의 실수를 인지, 만회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고등학교 1학년 치고는 지나치게 성숙한 인격이다. 해리포터처럼 좌충우돌하며 인격적, 육체적 성장을 세세히 담을 의도가 아예 없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이 작품은 고등학생 수니의 성장담이 아니라, 성숙된 자아를 찾아내는 일종의 성숙담으로 보인다.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라기보다 대학생, 성인들의 이야기로 읽히고, 수니와 안의 관계에 대한 묘사도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사실은, 그 페이지들을 넘긴 뒤에야, '어, 얘네는 미성년자인데? 고작....고1인데?? 라며 흠칫 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나도 별 수 없는 아재구나, 싶기도. ㅋㅋㅋ )

수니가 자신의 뿔을 알아채고, 뿔이 피부를 찢고 자라나는 과정 역시 성숙의 메타포로 읽힌다. 

아주 거칠게 예로 들면, 성장의 플롯은 애벌레가 고치를 만드는 과정이고, 성숙의 플롯은 나비가 결국 그 고치를 찢고 날아오르는 과정이랄 수 있는데, 수니의 내적 갈등과 외면의 변화는 후자로 읽힌다. 

커스터머가 일종의 성인식처럼 그려지는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주인공들은 어린아이에서 성인이 되는 의미의 성인식이 아니라, 이미 성인이지만, 그것을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의미의 성인식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수니와 안이 좀 더 미성숙한 모습으로 좌충우돌하며 성장해가는 모습을 읽고 싶기도 했다.

고1치곤, 너무 어른스러워~ 아니, 내가 '고1'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이 깊은 것일수도 있겠고.

물론, 그만큼, 이야기 안에 푹 빠져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물들이 너무 성숙하다보니, 내-외적 갈등들이 너무 고상하게 풀려나가서 탁월한 흡입력에 비해 이야기의 흐름에 있어 응축과 폭발이 약하게 느껴져서, 그 부분이 아주 조금 아쉬웠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작가의 의도였으리라.)

전체의 흐름에 군더더기도 거의 없고, 다음장이 궁금해서 몇 페이지는 대각선으로 후다닥 읽고, 마지막 장까지 덮은 뒤, 다시 돌아가서 천천히 숙독을 하기도 했다.


그 밖에 이야기 할 메타포들도 정말 많다.

세대차별, 인종차별, 젠더차별, 계급차별, 외모차별 등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디테일하게 녹여낸 세계관이 정말 멋졌다.

작가가 이렇게 만든 세계관을 이 책 한권으로 끝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연작의 형태든, 연속의 형태든 많이 나올 것 같다.

오노 후유미의 십이국기처럼, 세계관 안에서 단편과 장편이 교차되며 완성도를 높여가는 형태도 좋을 것 같은데.


무엇보다, 작가가 세계관과 서사에 얽매이지 않는 듯, 아니, 이미 자신의 세계관에 완벽히 적응한 듯한 인상이 좋았다.

또렷하게 구성된 이세계 안에서, 역시 뚜렷한 인상의 캐릭터들을 자유자재로 풀어놓을 수 있는 대담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세계관과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이 엿보였다는 의미다.

게다가 나보다 훨씬 어린 작가다.

앞으로 나올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겠지??

정말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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