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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팬스 : 깨어난 괴물 1 ㅣ 익스팬스 시리즈
제임스 S. A. 코리 지음, 최용준 옮김 / 아작 / 2016년 7월
평점 :
※ 스포일러 있음
제목만 보면 유치함에 피식,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되지만, 어쩔수가 없다.
레비아단, 혹은 리바이어던을 괴물이라는 단어 말고는 어울릴만한 단어가 한국어에는 없는 것 같으니까. 그렇다고, '익스팬스' 는 명백한 타이틀로서 정관사가 붙어 고유명사로 쓰였으니, 그렇다 쳐도 부제목인 '레비아단 웨이크스' 까지 한글로 독음을 적어놓기도 그렇다.
게다가 '왕좌의 게임' 이란 드라마의 원작인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저자 J.R 마틴 옹의 추천서까지 뒷면에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으니 표지는 그야말로 유치찬란의 향연이다. 거기에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활자체의 큼직한 타이틀까지. 커버아트는 세련되긴 했지만, 보통보다 약간 작은 판형까지, "장르소설!!!!!!" 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장르소설의 오랜 팬으로서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뽑아들기 좋은 첫인상이 아니었음은 꼭 짚고싶었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에 비교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같은 장르소설이고, 비슷하게 드라마화도 됐지만 말이다.
그 약간의 장벽을 넘어 본격적으로 책을 펴들면 이야기는 순식간에 수백년 후의 미래로 날아간다.
지구가 화성에 무사히 안착한지 몇백년이 흐른 세상.
인류의 생활권은 화성과 지구 너머 소행성대까지 뻗어 있었다. 곳곳헤 우주 스테이션이 건설되어 소행성대의 막대한 자원을 화성과 지구로 실어 나르고 있었고, 우주에서 살게 된 인류는 낮은 중력에서의 변화를 일으켜 2m에 가까운 키에 툭툭 튀어나온 관절을 가진 새로운 종족으로 변화했다. 화성과 우주 스테이션에서 나고 자란 세대들은 같은 조상을 가졌지만 겉모습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어떤 의미로서는 "외계인" 이 된 것이다.
이야기는 홀던이 부선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물 수송선 '캔터베리호' 로부터 시작된다.
평소와 다름없이 소행성대에서 얼음을 채취해 외행성계와 내행성계 사이의 가장 큰 항구인 세레스 스테이션으로 향하던 캔터베리호는 긴급구조신호를 듣게 된다. 망망한 우주에서 구조신호를 무시하는 뱃사람은 없다. 홀던은 선장의 명령에 따라 벨트인인 나오미와 화성인 알렉스, 자신과 같은 지구 출신인 에이모스와 쉐리로 구성된 구조팀을 꾸려 셔틀을 타고 구조신호의 발생지로 향한다. 구조신호는 '스코풀라이호' 라는 우주선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승무원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하게 빈 상태였고, 핵융합 반응로 엔진은 꺼져있는 상태. 그리고 반응로 엔진 주변에는 정체모를 까만 필라멘트 같은 촉수와 액체 덩어리들이 가득 널려있었다. 그리고 탈출용 포드가 한 척 비어있는 상태였다. 같은 시각, 캔터베리호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스텔스 우주전함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홀던은 무선 통신을 통해 선장과 동료들이 미사일의 착탄을 카운터하는 소리를 들으며 절망한다.
한편, 세레스 스테이션 태생의 벨트인 밀러는 한때는 무척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는 세레스 치안대 형사였다. 지금은 알콜 의존증에 모두가 파트너 되기를 기피하는 한물간 형사지만, 그의 경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세레스 치안대의 대장은 밀러에게 '줄리 마오' 라는 여성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게 되고, 줄리 마오는 지구 최대 갑부의 딸로 현재는 가출하여 소행성대 행성 연합(OPA)의 과격분자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단서를 잡아낸다. 그리고 줄리 마오가 세레스 스테이션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은 "스코풀라이호" 라는 우주선에 취업했다는 것.
캔터베리호의 격침 사건으로 팽팽한 긴장 상태였던 화성과 지구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OPA의 과격분자들까지 끼어들면서 태양계는 전쟁의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그 중심에 홀던이 있었고, 줄리 마오가 있었다.
일단 설정이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외계에서 외계인이 쳐들어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우주로 진출해서 외계인이 되었다. 이러한 개념이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고정되어 있던 세계를 팡, 깨뜨려주었달까. 엄청나게 설득력이 있었다. 이 밖에 평생 돔에서만 사는 화성인들의 정신세계과 평생 스테이션에서만 사는 벨트인들의 정신세계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우주를 항해하는 초고속 우주선 안에서의 중력 가속도를 견디기 위해 사용하는 수많은 약물이라던가 충격을 이기기 위해 사용하는 중력 쿠션, 우주를 뚫고 정확한 통신을 보내기 위해 사용하는 광선 통신, 통신을 주고받는데 생기는 시차들까지 상당히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확실히 니븐의 '링월드' 이후로는, '스페이스 오페라' 라 하더라도 어느정도의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한 섬세한 설정이 대세인 것 같다. 특히 중력등의 물리력은 대충넘어갔다가는 큰코다치는 시대인 것 같다. 스테이션의 회전부터 도킹까지 허투루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
섬세하고 설득력 있는 설정도 설정이지만, 화성과 지구라는 초강대세력의 미묘한 경계를 잡아내고 표현하는 작가들의 역량도 대단하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세력을 세워보려는 소행성대 연합의 고군분투까지. 정치적인 흐름을 잘 알고 있달까, 최상위 권력자들의 힘겨루기를 그려내는 통찰이 돋보인다.
물론 그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우리의 두 주인공. 홀던과 밀러의 매력과 케미스트리도 빼놓아선 안되겠고.
홀던의 선원들인 기관사 나오미, 조종사 알렉스, 정비공 에이모스의 합도 끝내준다. (특히 에이모스. 너무 좋다.ㅋㅋㅋㅋ)
모든 캐릭터들이 매력적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대사 하나, 자주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까지도 철저하게 계산되어 사용된다. 설정도 좋고, 스토리도 좋지만, 무엇보다 캐릭터가 가장 좋다.
홀던은 얼핏 서양식 히어로, 예를들어 서부극에 등장하는 카우보이처럼 정의로운 히어로의 스테레오타입처럼 보이지만, 대단히 입체적이다. 사실 홀던의 반대편에 서있는 인물인 밀러가 보다 전형적이다. 홀던은 정의롭고 고귀한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타입의 인간이다. 이게 옳은가, 옳지 않은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판단하고 결정한다. 반면, 밀러는 오랜 형사 생활 때문인지 사건에 접근하는 사고방식은 체계적이지만, 주로 몸에 각인된 것들을 기반해서 움직인다. 직감에 따라 반응되는대로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인다. 이러한 두 인물, 홀던과 밀러의 조합이 주는 기묘한 위화감이 이야기와 어우러지며 꽤나 신선한 케미스트리가 발생된다. 서로를 존중하고, 좋아하지만, 결코 융화될 수 없는 두 남자. (이러한 페어의 구성도 버디무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시도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느낌이 들었던 것에 대해서는 좀 더 파고들어야 할 듯 하다.)
음모의 핵심에는 '프로토분자' 라는 미지의 존재가 등장한다.
이것은 아주 옛날부터 태양계를 떠도는 혹성들 중 하나였다. 아니, 운석 파편에 가까웠을터다. 태양계를 방문하는 수많은 돌덩이들 중 하나로 인식됐으나, 이 안에는 원시 생명체로 추정되는 세포가 붙어 있었다. 무려 20억년정도 된 것이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한 이들은 "프로토분자" 라는 이름을 붙였고,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의문의 원시세포를 생물무기로 활용할 계획을 세운다.
화성과 지구의 전쟁 위기 뒤쪽에는 프로토분자의 연구를 감추기 위한 태양계 최고 권력과 최고 갑부의 은밀한 거래가 있었다.
이 프로토분자라는 정체불명의 물질도 그렇고, 이를 둘러싼 이중삼중의 내막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여기서 다시 캐릭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프로토분자를 둘러싸고 엄청나게 많은 충격적인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과 리액션도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자꾸 설득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장르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설득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이라는 매체 자체가 '구라' 이기 때문에 독자들을 설득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특히 장르소설은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구라가 아닐수도 있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야!!' 라고 소리치고 시작하는 이야기라면, 장르소설은 '여러분 이거 다 구라인거 아시죠?' 라고 크게 외치고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작품 안에서 논리적 인관관계가 설득력을 잃는 순간 흥미를 잃을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기꺼이 속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너무 뻔한 거짓말에는 속고 싶지 않을터다! 때문에 장르소설은 독자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세계관의 설정에도 섬세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익스팬스는 그런 나의 기준에서는 완벽하게 잘 만들어진 장르소설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홀던' 과 '밀러' 라는 두 챕터가 번갈아 계속 등장한다.
마치 마틴옹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가 등장인물들의 챕터로 이루어진 것 처럼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홀던과 밀러의 시점으로 각각 그려진다. 해서 가끔 홀던과 밀러의 시간대가 겹치는 경우가 있는데, 같은 이야기를 해도 말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마음이 다른 경우를 볼 수 있어서 은근한 재미가 있었다. 더 재미있는 점은, 두 명의 작가가 각각 한 인물을 담당해서 썼다는 점이다. 홀던의 파트가 끝나면, 밀러의 파트를 맡은 작가가 홀던의 파트를 살짝 수정해서 밀러의 이야기를 쓰고, 끝나면 다시 홀던의 파트를 맡은 작가가 밀러의 파트를 살짝 수정해서 홀던의 이야기를 쓰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홀던이 밀러를 이해한 방식, 밀러가 홀던을 이해한 방식이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한 이유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