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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의 꿈 ㅣ 십이국기 7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9월
평점 :
오노 후유미가 창조한 십이국기의 세계관은 지독할 정도로 불합리하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불완전하다.
이른바, '살아있는 신' 들이 존재하는 세상임에도 지독하게 불합리하고, 때문에 지독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십이국기'의 세계관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하다.
이것은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불합리성과는 개별적으로 작가가 확실하게 완성시킨 세계관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다!
십이국기는 한 세계관 안에서 꾸준하게 장편과 단편 타이틀이 출간되는데, 서사적으로 연결되는 타이틀이 있고 그렇지 않은 타이틀도 있다. 장편을 통해 국가관이나 리더론의 철학적, 논리적 빈약함과 전투에 있어서의 전략, 전술적 개념의 부재가 드러나고, 단편을 통해 서서히 보충된다.
조금 더 비약하자면, 초기에 설정한 세계관의 빈약함 때문에 뒤로 갈수록 철학과 논리를 그 안에 맞추려고 아등바등하는 느낌도 든다. 물론, 오노 후유미라는 작가가 지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작품이 거듭될수록 세계관은 완성되어 가지만, 필연적으로 작품 안의 세계는 더욱 불합리해지고, 등장인물들의 삶은 괴로워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전쟁에 관한 설정이다.
십이국기 세계관 안에서 '국가간의 전쟁'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타국에 대한 내정간섭조차 하지 않고, 그 국가가 무너져도 소극적으로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할 뿐이다!!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세계관 안에서 전쟁의 개념은 축소되고, 군인이라는 존재는 기껏해야 요수를 사냥하는 일이 주 업무인 '사냥꾼'에 불과하게 된다.
무관의 역할이 극히 미미해지며 세계관 내에서 무관이 이름을 떨칠 계기가 없어지는 것이다.
단순히 요수를 사냥하는 것으로 이름을 떨친다는 설정은 있을 수 없다. 외려 요수만을 사냥하는 직종군이 모여사는 그룹이 있고, 이런 인물들은 보통 사람들에겐 혐오직군으로 기피대상이며 봉산 근처에 자신들만의 부락을 만들어 모여산다.(※도남의 날개) 뛰어난 장수는 요수를 '사냥' 하지 않고, '제압' 해서 길들인다.(※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등)
결국 십이국기 세계관의 군인들은 왕이 정치를 그르치면 나타나는 요수들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위군이란 의미이다. 이러한 방위군들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세력은 금군일터. 경국의 이야기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편제가 공개된 적이 있었는데, 타국이 침략할 리가 만무한 궁전 수비병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오로지 내란에 대비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즉, 타국과의 전쟁이 아니라, 자국민을 죽임으로써 역할을 다하는 금군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지만, 십이국기 세계관 안에서는 세계가 뒤집히지 않는 이상 적국이 쳐들어 오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국가간의 전쟁이 없는 세계관이라면 상비군이 존재할 필요조차 없다.
실제로 상비군의 개념을 갖게 된 것도 로마 공화정 말기인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고안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제국 로마도 상비군이 아니라 전쟁때마다 집정관의 명령에 의해 소집되는 비정규군으로 거대한 국가를 충분히 일으켰고, 저 강대한 게르만족의 위협이 이탈리아 전역을 침탈한 18세기 말엽이 되어서야 상비군의 개념이 자리잡혔다.
국가간의 전쟁이 개념조차 없는 세계관 안에서, 게다가 '구름 위' 라는 천혜의 요새 안에 있는 궁전을 지키는 군사가 수천에 달한다는 설정은 솔직히 그 자체로 큰 오류이기도 하다.
심지어, 십이국기 세계관은 지독할 정도로 정체되어있기 때문에 시민의식이 발전할 계기가 없다. 지배층이 신에 의해 간택된 불멸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반란 따위는 꿈도 꾸기 어렵다. 설사 왕이 위왕이나 가왕이라 하더라도 아래로부터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편은 가장 개연성이 떨어지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무관의 공적인 업무는 변방에서 요마, 요수들의 침입을 막는 역할일 것이고, 부수적으로 내란에 대비해 자국민들을 감시하는 것일 터다. 실제로 십이국기 세계관의 무관은 왕실 소속으로 지방 영주에게 파견되는 형태이다. 지방 영주는 사사로이 장수를 거느리거나 왕권 없이 군대를 소집할 수 없다.(※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하지만, 당연하게도 왕이 무너지면 장수는 어쩔 수 없이 그 지방 제후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가장 강력한 내란의 불씨가 되는 것이다.
그런 무관이 과연 왕과 함께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반 관료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비슷한 직급에 올라갈 수 있을까?
또 하나, 타국과의 전쟁이 없는 세계관에서 대인對人용 전술이 개발될 리는 만무하다. 개발 되었다면, 이 또한 자국민들의 반란을 대비한 것일 터다.
이번 작품집에서 이러한 세계관의 설정을 다소 보완할 수 있는 개념이 하나 등장한다.
십이국기 세계는 국가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평화의 시기가 그리 길지 않았다" 는 점이다.
기린에 간택된 완벽한 왕도 치세가 20~30년에 그치고 만다는 설정이 이번 단편을 통해 등장한다.
아무리 왕기가 있고, 천기까지 받아 불멸의 삶을 누리는 왕이 된다지만, 그렇다고 그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다.
선적에 오르지 못한 가족과 친지, 지인들이 수명을 다하고 내정이 안정되고 반복적인 일상이 시작되면 인간은 권태감에 빠져들고, 의식있는 관료들은 왕이 천기를 잃을 것을 대비하기 시작한다.
왕이 천기를 잃으면 요수와 요마들이 출몰할 것이고, 관료들은 봉토를 가진 봉건제후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영지를 지켜야 한다. 성을 지키는 상비군도 있겠지만, 왕기를 잃는 난세가 되면 그만으로는 부족할 것이기에 군벌을 조직해야 하는 것이다.
예상대로 왕이 천기를 잃고 기린이 병들면 난세가 시작된다.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고 요수와 요마들이 출몰한다. 봉건제후들은 더이상 내정을 신경쓸 필요가 없기에 영지로 돌아가 영민들을 보호하는데 힘쓴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주들은 자기의 안위만을 챙길 것이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이미 왕보다 훨씬 오래 삶을 누린 존재들일 것이고.
다음 왕이 왕위에 오르면 난세동안 백성들을 보살핀 제후들을 치하하고 일부는 고위 관료로 임명할 것이다.
그 제후와 함께 한 군벌들 중 일부는 공직을 받고, 선적에 들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 배제된 관료들이 빈 자리를 메운다.
그 과정 중에 일어나는 혼란을 수습하는 것 역시, 왕의 책임.
노회한 정치꾼들은 이 세계 안에도 분명 존재한다.
이번 작품집에서는 이렇게 십이국기 세계에서의 왕의 내정에 관한 단편들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신과 다름없는 왕. 하늘에 선택받은 왕.아무리 실정을 저지른다고 해도, 하늘이 선택했던 것임을 부정할 수 없는, 살아있는 신과 같은 왕. 이러한 왕에게 반기를 드는 과정과 그로 인한 파급효과,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들이 펼치는 정치와 내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슬몃슬몃 읽을 수 있어서 특히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