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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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미권 작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순문학에서는 주저 없이 필립 로스를 꼽을 것이다. 

국내에 출간된 책들 중에 두작품 정도 빼고는 거의 다 읽었을 정도로 좋아한다. 

글 전반에 흐르는 짙은 남성성과 깊이 천착한 인생의 불가해함이 때로는 읽어나가기를 주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이 필립 로스의 강력한 매력으로 지독한 중독성의 원천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작품 전반에서 주인공이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거나, 행복하기 짝이 없는 시간들을 보내면 미칠 듯한 조바심을 느끼게 된다.

읽기를 그만 두고 싶어지기도 하고(그러면 주인공이 평화롭거나 행복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반면, 빨리 스킵 버튼을 눌러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필립 로스의 작품에서 평화와 행복은 독자들의 뒤통수를 가격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주인공이 누린 평화와 행복은 그 배가 되어 분란과 악운으로 돌아온다. 

예상할 수 없는 시점에, 예상할 수 없는 인물로 인해, 예상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져, 예상할 수 있는 파국으로 치달아간다. 

왜, 항상, 삶은 이렇게 백태클을 좋아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전능하신 신이 있고, 그 신이 우리 하나하나를 돌보아 주신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매우 자주 일어난다. 

이렇듯, 필립 로스는 언제나 오롯하게 한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섬세하고 대담하게 그려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이제 그 위대한 발걸음을 멈출 것을 선언했다.

개인적으로는 올 초에 필립 로스의 첫 작품집인 [굿바이, 콜럼버스] 를 읽었는데, 반년 후에 마지막 작품을 접하니 기분이 묘하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다다랐던 1944년 7월, 뉴어크의 챈슬러 애비뉴 학교 부근의 놀이터 감독관은 버키 캔터라는 스물 세살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놀이터 감독관은 단어의 뜻 그대로 여름 방학 기간 동안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활발한 체육활동을 위해 매일 모여드는데, 그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관리하는 직업이었다. 신체 건강하고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 1941년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무렵에 군대에 지원했으나 지극히 나쁜 시력 탓에 입대에 실패했고, 그 해 말에 있었던 추가 징집때도 입대에 실패하자 체육교사의 꿈을 안고 챈슬러 애비뉴 학교 부근 위퀘이크 고교의 체육교사에 도전하기 전, 여름 한 철 동안 일종의 경험을 쌓기 위해 놀이터 감독관에 지원한터였다. 지극히 나쁜 시력만 아니었으면 어쩌면 전도유망한 선수로 성장했을지 모를 출중한 투창실력과 잘 발달한 근육답게 거의 모든 스포츠에 만능인 버키는 이미 훌륭한 체육 교사였고, 놀이터에 나오는 아이들 사이에서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 해에 뉴어크 지역에 '폴리오' 라는 병이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하고, 버키의 삶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폴리오는 우리말로 척수성 소아마비. 요새는 만나기 힘들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한 동네에 한 두 분 쯤은 소아마비의 흔적 - 영구장애 - 를 갖고 있는 어른들이나 나보다 10살쯤 많은 형들이 있었다. 지금은 백신이 널리 퍼져, 갓난 아이에게 반드시 접종시키지만 내가 태어나기 10년 쯤 전까지도 소아마비는 부모님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병 중 하나였다. 뒤틀린 사지를 힘겹게 움직이는 소아마비 장애인들의 모습은 안쓰러웠고, 내가 이미 소아마비에서 안전하다는 지식을 얻기까지, 국민학교 고학년에 될 쯔음까지 두려워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폴리오는 우리나라에서 제 2종 감염병인데, 감염자의 90% 이상이 무증상이라고 한다. 

감염자의 콧물이나 침, 대변을 통해 배출된 폴리오 바이러스는 다른 사람의 코, 입 점막을 통해 감염된다. 오수나 하수를 통해서도 폴리오 전염균을 퍼져나가는 모양이다. 

경증의 경우엔 4~8%에서 증상이 나타나는데 발열,두통, 구토, 설사, 위염 등으로 2~4일 내에 치료되지만, 감염자의 1%에서 이완성 마비증상이 나타나고, 약 1%의 환자 중에서는 무균성 수막염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야말로 폭탄 돌리기인 셈인데, 무증상 감염자들과 경증 감염자들이 여기저기 무수한 감염균을 퍼뜨리면 100명 중 2명은 영구장애를 안게 되거나 죽는다는 것이니, 정보가 더 제한적이었을 당시의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공포의 병이었을 터다. 



필립 로스의 책은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꽤나 짧은 편이다. 

짧은 볼륨 안에 언제나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누군가의 삶이 담겨 있는데, [네메시스]의 버키 캔터의 삶 역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 책은 약간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버키 캔터와 비슷한 일을 겪었으나, 완벽하게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린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필립 로스는 화자가 제 3자의 입장에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기술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을 택한 경우가 많았다.하지만, 화자가 주인공의 삶에 주변 인물로 등장할 뿐, 주인공의 삶을 비교하거나 평가할 만 한 자격을 지닌 적이 없는 단순 화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네메시스] 에서의 화자는 주인공 버키 캔터와의 대화 중 툭툭 던지는 자신의 삶의 조각을 통해 작품의 결말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마지막 작품 답게 대단히 친절하달까, 옮긴이는 책 말미에 자리잡은 '옮긴이의 말'을 통해 '작가는 이 내레이터의 시각을 지지하는 것일까? 독자도 지지해야 할까?' 라고 질문한다. 

나도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는데, 작중 화자는 분명 버키 캔터의 삶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을 택한 필립 로스의 작품들 중 이런 경우가 있었나, 싶었다. 

 


언제나 삶은 인간에게 시련을 준다. 어쩌면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시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련이 반드시 불행과 동의어는 아니다. 만약 시련이 불행과 동의어라면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불행일테니까. 

필립 로스는 많은 작품을 통해 삶의 시련과 불행에 관해 이야기해 왔다.

[에브리맨] 을 통해서는 '받아들이라. 버티고 서서 오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고 했다.

'미리부터 종말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고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버키 캔터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화자와 많이 달랐다.

버키의 선택 역시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숭고하기까지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했다.

문득, 나 역시 그렇게 매사에 내 스스로를 대입해 상황을 단정짓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종교에 나름 깊이 빠져있을 때였는데, 나에게 일어나는 불행들이 오롯하게 나때문이고, 나의 죄가 크기 때문에 내 주변의 모든 일들이 어그러질 것이라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인간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평가하고 삶을 관장한다면, 분명 내 삶에는 별반 칭찬할 만 한 것이 없다고, 굳이 나에게 남들보다 특별한 '선물' 을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끊임없이 인간에게 견디기 힘들 정도의 시련을 내리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성서를 그렇게 읽었으면서, 왜 지금의 나 자신에게는 신이 좋게만 대해 줄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인간의 삶은 괴로움 그 자체였고, 신은 괴로움의 원천과도 같게 느껴졌다. 사후의 삶 같은건, 애초에 개념조차 잡히지 않았다. 사후의 삶. 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명백한 오류였으니까. 삶은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니까.

난 결코 종교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교회를 멀리하자 차라리 삶은 좀 더 단순해졌다.

그 때 즈음, 필립 로스와 E.L닥터로, 폴 오스터, 팻 콘로이 등의 소설들을 접했고, 그 책의 메시지들이 빈 자리를 차고 들어와 앉아있다. 


사지 육신이 멀쩡하다는 건, 아플 구석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애정이 많다는 건, 슬플 일도 그만큼 많다는 뜻이고, 

가진 것이 많다는 건, 잃을 일도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픔과 슬픔, 상실이 모두 괴로움이나 불행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통증 뒤에는 해소가 있고, 슬픔 뒤에는 평온이 있고, 상실 뒤에는 홀가분함이 있다. 

삶의 바탕은 상실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직후부터 서서히 삶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삶 자체가 커다란 상실의 과정이다. 

기쁨과, 즐거움, 행복감은 덤이다.   


삶 자체가 상실이고, 대부분이 슬픔인데 굳이 스스로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낼 이유는 없다.

덤을 하나라도 더 받는 삶이 낫지. 

그러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모두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고, 버티고 서서 받아들이면 된다. 스스로를 종말의 가장자리로 밀어낼 이유도 없다.

지나온 시간들은 이미 상실되어서,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것들에 애착을 가질 필요도 없다.

단순하게 앞만 바라보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삶은 잃어가는 과정이므로. 

결국엔 나 조차도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난 적 없었던 것 처럼 사라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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