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평소에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인데, 서너시간만에 한 권을 독파하기는 정말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요사이 손은 바삐 놀리고, 머릿속도 복잡한 일이 많아 책을 펴기가 수월찮았는데,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만 있던 녀석을 무심코 집어들었다가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책 읽느라 헬스장 싸이클에서 40여분 가까이 발을 구른 것도 오랜만이었다.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읽기도 했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이야기의 잔상이 남아 있었고, 주인공에게 내 자신이 이입된 것도 오랜만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즐거움의 요소가 잔뜩이었다.


때는 송나라 인종. 조행덕이 진사시험을 보기 위해 수도 개봉으로 상경한다. 무인들의 발호를 막기 위해 무관의 요직까지 문인들로 채우던 시절, 진사시험에 합격만 한다면 빛나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조행덕이 상경한 해 진사시험을 보기 위해 개봉에 몰린 시험자의 수는 무려 3만 3800명. 그 중에 최종 통과자는 500명에 불과했다. 

 조행덕은 앞선 일종의 1차 시험들을 우수한 성적으로 가뿐히 통과하고 진사시험의 막바지에 도달해 있었다. 32세가 되는동안 그는 손에서 서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자신감에 차있었고, 지금까지 치른 시험들도 모두 쉽게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조행덕은 마지막 시험을 앞둔 그 전 시험을 치르지도 못하고 떨어지게 되는데, 시험장에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던 도중 잠이들어 자신을 호명하는 시험관을 목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시험까지는 무려 3년. 허탈해진 조행덕은 거리를 헤매다가 서하족 여자와 위구르족 남자가 벌이는 한바탕 소동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이 소동이 조행덕의 인생을 바꾸고, 운명을 결정짓는다. 


실제 사료에 기반한 역사소설로 서두에 언급한대로 엄청난 흡입력을 자랑한다.

이야기는 군더더기 없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등장인물들에 대한 시선이 따뜻해서 절로 이입하게 된다. 


언제나 시간은 속절 없이 흘러간다.

흘러가는 속도 만큼 삶 또한 정신 없이 흘러간다.

정신차리고 보면, 어두운 사막 위에 홀로 버려진 조행덕처럼 여기저기서 터지는 불꽃을 피하며 그저 발 닿는대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도 없고,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그냥 간다. 

이 광활한 삶 속에서 정신 없이 걷다 보면, 다른 삶을 걷는 이와 부딪히곤 한다.

부딪힌 그와 이빨을 드러내고 싸워야 할 수도 있고, 좋은 동반자가 될 수도 있고, 무관심 하게 각자의 길을 갈 수도 있다. 잠깐 그렇게 스쳐 지나가고 마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 만남을 통해 나의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어차피 정해진 목적지도,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도 없기에, 타인이란 사실 삶의 방향이 바뀌는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과의 만남에 '인연' 이란 이름을 붙여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정립되는 삶의 방향에 '운명' 이라는 이름을 붙여 종교처럼 신봉한다.   


인연이든, 운명이든 인간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자신이 개척하는 것 같지만, 삶 위에 선 인간은 부평초처럼 떠돌 수 밖에 없다.

망망한 사막 위에 버려진 듯,  내가 걸어온 발자취는 바람에 쓸려 마치 처음부터 나는 걸었던 적이 없었던 것과 같아지고, 내가 목표했던 오아시스는 신기루처럼 금새 사라지고 만다. 

이 사막은 영원할 것이고, 내가 보는 모든 것은 신기루와 같을터다.

하지만, 또 그 신기루 하나를 목표로 삼아 걷기 시작한다.

문득 발에 밟히는 모래들이 나처럼 사막을 헤메이다 스러져간 이들임을 깨닫고, 나 역시 머잖아 흩날리고 마는 모래처럼 흘러내릴 것임을 알아챈다.

어차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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