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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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작가를 만날 땐 초기작보다는 후기작을 만나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게다가 그 작가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탄탄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그의 거대한 세계를 탐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세계의 태초의 모습이 궁금해지는 법이고, 그가 밟아온 발자취를 거꾸로 되짚어보는 즐거움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성장과 발을 맞추는 것보다 더 매혹적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데뷔 50주년을 기념작이라는 이 작품은 그 명성에 비해 대단히 얇았다.
별 막힘 없이 술술 읽어내려갔다. 책을 비교적 천천히 읽는 편임에도 상당히 빠르게 읽어냈고, 다 읽은 뒤의 첫마디는,
"음?? 으으으음?????"
이었다.
자연스럽게, 다시 한 번 빠르게 읽어보았다.
다시 읽어가면서는 
"음?! 으으으음!!!!!! "
이라는 경탄의 감탄사로 바뀔 수 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읽을 수록 묘한 매력을 뽐내었다.
우선, 무척 얄팍한 나의 독서 경력에 비춰봐도,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현대문학 전반의 모든 기법들이 조금씩 다 눈에 띄었다.
회상을 통해 서사가 펼쳐지고, 미하엘 콜하스 영화의 각본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작품 전체를 하나의 메타 픽션처럼 보이게도 한다. 초반부엔 미하엘 콜하스 영화화 계획이 '엎어진 사건' 을 언급함으로써 미스테리어스한 소품을 하나 던져 놓으며 회상 위주의 서사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후반부에 등장하는 사쿠라의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좇아 공개하는 과정은 한 편의 스릴러로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당한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그 뿐인가, 고모리라는 캐릭터는 일본의 멜로물에서 자주 보이는 상냥하면서도 정력적인 남성형으로 사쿠라와 작중 화자와 묘한 삼각관계를 만듦으로써 한 편의 치정 멜로물을 연상케도 한다. '메이스케 이야기' 를 취재하는 과정은 논픽션, 르포타주를 보는 듯 하고, 작중 화자와 아들 히카리와 관련된 소소한 일상들은 자전적 소설이나 산문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따스하고 평안하다. 미하엘 콜하스 영화 계획에 관련된 디테일한 설정들은 너무나 꼼꼼해서 무척 현실적이기도 하다.
 정말 여러 플롯들이 촘촘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초반에 등장하는 복선들도 빠짐없이 수거하고, 대사 하나, 인물 한 명, 심지어 문장 하나까지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 때문에 책의 두께는 얇지만 내러티브가 굉장히 풍성하다.  

작품의 마무리가 연극이라는 형태를 통해 보여진다는 점 역시 흥미롭다.
연극은 고대 제의에서부터 시작된 가장 오래된 인류의 유희 중 하나로써, 희곡의 뿌리가 되고, 시인들을 잉태했으며, '타인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 일종의 소설적 기법들의 원천과 다름없다. 작품의 주요 서사가 대본을 쓰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 중에 만들어진 결과물이 결국엔 연극을 위한 대본 -희곡과 약간은 다르지만- 이 된다는 점은 무척 인상적이다. 
'메이스케 이야기' 를 취재하는 과정들 역시 그러한 관점으로 볼 수 있다. '구전' 또한 문학을 태동하게 한 수많은 뿌리들 중 하나가 아닌가.

이러한 나의 얄팍한 독서 경력에 빗댄 어줍잖은 문학적(?) 접근은 차치하고, 이야기와 인물 자체가 참 흥미롭다.
이야기는 주인공의 시점으로 진행되며 타이밍 좋게 물음표들을 던지며 서사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서두에 언급했듯, 처음엔 꼬부랑 노인인 작중 화자와 중년인 아들 히카리의 애틋한 부자간의 광경에 안타까워 할 겨를도 없이 지우인 고모리와 만나고 과거 회상이 시작되면, 문학적 기교들이 정신없이 춤추기 시작한다. 숨막히는 서사를 따라가다보면 엄청난 내러티브들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지나쳐가고, 그 충격은 책장을 모두 덮고 난 뒤에야 비로소 후두둑 몰려온다. 
여백이 많은 듯 보여서 곱씹기 시작하면, 서사를 쫓아갈 수 없고, 단순한 듯 보이는 내러티브들엔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서, 풍부하다 못해 풍만하다.  

아마도 책을 처음 다 읽은 뒤에 했던
"음? 으으으음??????" 
은 온통 '익숙하면서 새로운' 묘한 감상 때문이었으리라.

난 이 작품을 온전히 작가인생의 말미에 다다른 한 노작가가 지금까지 자신의 창작세계를 지탱하게 해 준 뮤즈 '하얀 관의의 소녀(애너벨 리)' 를 보내고,  스크린 속의 가공된 인물이었던 '에너벨 리-사쿠라' 를 떠나보내고 '고모리' 라는 지우이자 새로운 뮤즈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읽었다. 
작중 화자인 '겐산로'; 절친한 이들에겐 '겐자부로' 라고 불리는 이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굴레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 히카리라는 굴레를 짊어지고 있었다. 노벨상을 안겨주었을 지도 모르는 여러 창작 동인 중 어린 시절 뇌리에 강하게 박혔던 영화속 주인공 '하얀 관의의 소녀' 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가며 이미 잊혀진 지 오래. 그는 자신에게 노벨상이라는 영광을 가져다 주었던 그 펜을 거의 다 꺾은 시점이었는데, 그의 삶 속에 다시 그 소녀를 끌어 올린 이는 다름 아닌 고모리였다.
작중 화자이자, 작가 그 자체로 보이는 겐산로에게 뮤즈였던 '하얀 관의의 소녀' 를 지운것은 고모리였고, 다시 끌어올린 이도 고모리였으며, 또 다른 뮤즈가 된 이도 고모리였다.

이 리뷰를 적어가던 도중,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였던 독서모임에서 "명호씨에게는 어떤 뮤즈가 있나요?" 라는 질문을 받았더랬다.
개인적으로 뮤즈는 그렇게 아무 창작자에게 찾아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뮤즈는, 신이다. 대중의 반응이 아닌 뮤즈만을 위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는, 말 그대로 '뮤즈의 사랑' 을 받은 작가가 아닐까 싶다. 아무나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아무에게나 오는 존재는 아니라고 본다. 태어나서 글을 한 번 써 본 적 없는 사람도 '사랑하는 이;뮤즈' 를 위해서는 책 한권을 족히 써낸다. 
받아쓰기 이외에 단어를 써 본 적 없는 초딩들도 사랑하는 짝꿍을 위해 두세문장의 아름다운 글을 써낸다. 하늘에 떠있는 달과 별들, 그리고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 예쁜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뮤즈란 바로 그런것이다. 

인간이 신의 모습을 닮았다면, 그 가장 강력한 증거는 창조의 능력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는 단순히 나와 똑 닮은 자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글을 통해 누군가의 머릿속에 완벽한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고, 완벽히 살아 숨쉬는 캐릭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스칼렛 오하라와 제임스 본드, 해리 포터, 루피와 나루토. 그리고 분명 한 때는 환웅과 웅녀, 단군까지 내 옆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간, 야훼와 싯달타도 그렇게 '인간이 창조해 낸 이야깃속 인물' 로 꼽히게 될 시절이 올지도.

여튼, 
작품을 보는 내내 나는 작중 화자가 '하얀 관의의 소녀' 와 '사쿠라' 그리고 '고모리' 라는 뮤즈를 가질 수 있었음을 질투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신의 모습을 떠나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가장 특징을, 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이라고 생각한다.
인간들은 그 누구에게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그 재능은 이제 막 말을 튼 아이부터 나이 지긋한 어른에 이르기까지 거의 비슷하게 발휘된다.
특히 자신이 궁지에 몰렸을 때.^^ ㅋㅋ 

이야기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엄마가 과자를 나로부터 숨기지 않는 세계, 어떤 달콤한 사탕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세계를 상상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아마도, 태초의 이야기는 그렇게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터다. 
지금도 여전히 이야기들은 누군가의 결핍을 채워줄 때에 수많은 '대중' 들의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니까.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한 노작가가 평생을 걸쳐 스스로의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몸부림쳐 온 결과가 아닐까?
그리고 그 과정 중에, 문득, 결핍을 충족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떠올리게 된 건 아니었을까?  
문학이란, 나아가 예술이란 인간 각자의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었을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결핍을, 가장 보편적인 소재를 가지고, 가장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물이 바로 이것일까?
노벨상을 받은 80대의 노작가가 70대에 발표했던, '삶의 마지막일 수 있겠다' 싶었던 작품을 통해서 그 답을 보여주려 했을까?
아니, 아니다.
문학은 결코 답을 내려줄 수 없다.
결핍을 채워준다는 것이 어떠한 의문에 답을 내려주는 것과 같을 수 없다.
문학은 언제나 질문이었다.
문학과 예술은 질문의 또 다른 방식이었다.
태초의 질문이 "뭐에요?" 였다면,
문학과 예술은 " '이건' 뭐에요?" 이다. 
질문의 주체???
그걸 정말 모르신다고??

바로 삶이다.

인생은 삶에 대한 질문이다.
문학은, 
예술은
아주 약간 더 구체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
한 대가가 남긴 좀 더 구체적이고도 좀 더 복잡한 질문이,
요기 있네. 

그리고 난 이제, 이 작가가 이 질문을 하게 된 과정을 좀 더 살펴볼 예정이다.
그러면, 어쩌면 나도, 이런 질문을 하게 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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