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년간 브라운관과 모니터에는 좀비,'리빙데드'가 가득했다. 엄청난 규모의 좀비 군단이 건물을 떼로 기어오르는 장면이 거대한 화면을 메웠고, 꽃미남 좀비와는 달달한 로맨스가 피어나기도 했다. TV 에서는 긴 호흡으로 좀비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인간들이 각자의 지독한 삶을 풀어내기도 했음은 물론, 그 원작이 된 미국 그래픽 노블과 일본 망가에서도 좀비는 여지없이 등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최고의 스토리 텔러인 강풀도 좀비를 꺼내들며, 웹툰계에도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다. 강풀의 [당신의 모든 순간]이 좀비를 감성적으로 활용한 '한국형 좀비물' 이라고 한다면 주동근의 [지금 우리 학교는]은 좀비물의 장르적 장치들을 명민하게 활용한 '정통 좀비물' 이라고 할 수 있을터다.

△이런 장면이야말로 좀비물만이 줄 수 있는 극도의 공포.
좀비는 그 태생부터가 저 멀리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이다.
남미대륙인지 중미대륙인지 애매한 곳에 자리잡은 아이티와 주변 부족들의 전통종교인 '부두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 좀비는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인 근로자마냥 띄엄띄엄한 존재였지만, 최근 몇년 사이에 마치 다문화 가정처럼 친숙해졌다. 많은 엔터테인먼트 장르 중에서도 매니악한 호러, 그 중에서도 좀비 장르는 좀비가 지니고 있는 지나치게 뚜렷한 특징때문에 클리셰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패턴이 지나치게 명확한 것이 장점이자 단점인 것이다. 사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으로 '좀비'의 현대적 원형을 확립한 조지 로메로 이후 수십편의 좀비물이 꾸준히 등장했지만, 좀비를 소재로 한 플롯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재앙. 튀고, 튀고, 또 튄다. 주인공을 포함해 좀비 외의 등장인물들은 오로지 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행동이 별로 없다. 맞서 싸워봤자 쪽수로 겁나게 밀린다. 결국 '어떤 인물들이 나와서', '얼마나 참신하게 죽고 죽이며', '얼마나 참신하게 튈 수 있는가?' 가 좀비물이 지향하는 지점이자,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이러한 장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좀비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소재이다.
뱀파이어나 웨어울프, 듀라한이나 천사, 악마, 원혼, 처녀귀신, 도깨비, 저승사자, 구미호등도 꽤나 영감을 자극하는 소재들이지만, 좀비는 개별적인 존재로써는 미미하지만 '집단' 이라는 특징으로 여느 괴물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지닌다는 점 때문에 특히 더 구미를 자극한다. 좀비 영화나 좀비 소설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묘사하는 부분이 바로 이 특징이다. 마치 병정개미떼처럼 거대한 군집을 이루어 몰려드는 좀비들이야말로 좀비물이라는 장르가 줄 수 있는 가장 특별한 공포다. 일군의 좀비들은 인류가 이룩한 한 사회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 사회의 구성원 전체를 자신의 집단에 소속시킨다. 좀비와 다른 존재들과의 통로는 무조건 일방통행이다. 뱀파이어도, 웨어울프도, 심지어 처녀귀신이나 저승사자도 말이 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좀비와 인간의 사이는 절대적인 불통이다. 이 극복할 수 없는 불통이 좀비물이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이다. 일고의 여지가 없는 먹고 먹히는 관계. 그 관계에서 오는 절대적인 긴장감. 그것이 좀비물이 창작자들에게 주는 거대한 선물이며, 그만큼 압도적인 과제이다. (이 부분이 통째로 거세되었기에 [웜 바디스]가 정통 장르 팬들에게 큰 비난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또한 태생부터가 종교적,사회적인 좀비는 그 자체로 많은 은유를 담고 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인 '리빙 데드' 의 창시자 조지 로메로 역시 자신의 영화 안에서 뛰어다니는 '살아있는 시체' 가 담고 있는 사회적 은유를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좀비처럼 자제력을 잃고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거대한 군중집단의 모습은 실제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때문에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로 등장한 많은 영화들은 영화적인 완성도 뿐 아니라 영상 안에 담겨있는 수많은 함의들을 재해석하는 현상이 무척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호러라는 장르가 추구하는 바는 단순하다.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이성을 잃은 식인자들의 거대한 집단은 물론 생존이라는 지상과제 앞에서 무너져가는 인간들의 모습도 모두가 인간의 본성 그 자체인 것이다. 좀비물은 한 발 더 나아가 그러한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사회' 의 헐거움을 직설적으로 그려낸다. 이성적 집단과 비이성적 집단의 충돌. 그를 통해 보여지는 날 것 그대로의 비릿함이 좀비물의 본질이다.

△1968년 작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조지 로메로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좀비의 원형을 창조해냈다. 일정 시기까지 부두교의 좀비와 로메로의 좀비를 구분하기 위해 영화 제목을 따 '리빙 데드'라는 단어를 썼다고 한다.
한편, 만화계에서 좀비는 캐릭터로써 등장한 경우는 꽤 있지만, 좀비물이 갖고 있는 장르적인 장치들을 차용하는 일은 드물었다. 노동 집약적인 매체인 만화의 특성상 '집단'이 가장 큰 무기인 좀비물은 비경제적인 소재일 뿐 아니라, 매니악한 장르인 호러, 그 안에서도 더더욱 매니악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장르로써의 좀비물은 완벽히 대중성에 기반하는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소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 안에서 [지금 우리 학교는]는 대단히 용감한 작품이다. 웹이라는 인프라와 디지털 작업이라는 신기술이 아니었으면 쉽게 도전할 수 없었을 이 작품이 모니터에서 뛰쳐나와 지면에 섰다.
이 심장 쫄깃해지는 이야기의 배경은 가상공간인 '효산시'의 '효산고등학교'이다. 과학 담당교사인 이병찬에게 이틀동안 감금되어있던 여학생이 가까스로 탈출하여 영어 담당인 박선생이 수업하고 있던 교실로 뛰어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품은 크게 전,후반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가 쫓고 쫓기는 전형적인 좀비 서바이벌 형식이라면 후반부는 피아식별이 모호해지는 심리 스릴러에 가까워진다. 전반부의 내용은 이야기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박선생님과 온조,수혁,남라등의 일행이 천신만고 끝에 가장 안전한 공간인 방송실로 모이는 과정이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닭장같은 교실들과 좁은 복도가 일순간에 지옥도로 변모하며 폐쇄적인 공포를 선사하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친구였던 이들을 피해 달아나야 하는 비극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익숙한 복도와 교실들은 지옥의 미로가 되어 기대 이상의 스릴을 선사한다.
△서서히 지옥도로 변해가는 학교. 아직 상황을 모르는 일부 교실에서는 여전히 수업중. 웹 연재당시 이러한 깨알같은 설정들이 큰 호응을 얻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의 백미는 전반부의 서바이벌 게임을 거쳐 박선생 일행이 방송실에 고립된 이후부터 시작된다. 다른 방향에서 서바이벌 게임을 펼친 미진이 장민재,하리 남매 일행과 합류하고 '변종' 인 귀남이가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중심에 근접하며 이야기의 전체적인 정서가 급격히 변화, 클라이맥스를 향한 카운트 다운을 시작한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 가장 영리하게 설정한 장치가 바로 '변종' 이다. 이야기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장치인 변종을 통해 생존자들 사이에 위태로운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드디어 방송실에 도착한 친구들.
안심하긴 일러 얘들아.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거든.

△작품 후반부를 이끌고가는 싸이코 패스 '변종' 귀남.
싸이코 패스의 대표주자, '배트맨'의 조커에 대한 오마쥬 느낌이 난다.
아쉬운 부분은 평이한 화면연출이었다. 스크롤로 만화를 보는 웹에서는 큰 단점이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단조로운 구도가 반복되며 긴장감이 떨어졌다. 특히 책의 판형에 맞게 컷들이 웹에서 보던 느낌에 비해 많이 줄어든 느낌이라 단점이 더욱 부각된 감이 있다. 작가의 의도였을 수도 있겠지만, 정서적인 연출이 전무했던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이 점 역시 앞서 언급한 연출의 단점과 맞물리는데, 이야기의 구조과 인물들의 개성에 비해 감정이입이 잘 안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야기와 캐릭터의 만듦새의 완성도에 비해 만화적 표현력이 조금 부족했던 것이 아쉽지만, 서사의 전개에 비중을 두어 만화적 과장이 미약한 점은 현재 한국 웹툰이 보여주는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중요한 대사를 나누는 일련의 연결된 씬들. 미들숏과 바스트숏만으로 그려져서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효과선이나 클로즈업, 여러 각도의 뷰 등 만화만이 줄 수 있는 다양한 표현들이 아쉽다.
하지만 분명 [지금 우리 학교는]는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은 작품이다. 특히 장르물로써의 완성도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 입시에 찌든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나와서 교실과 복도를 누비며 정신없이 도망다니고, 학교 기물들을 이용해 좀비가 된 친구들을 해치운다. 골판지나 문구용 가위가 유용하게 쓰이고, 사물함도 개인 벙커로 훌륭하게 활용된다. 조금은 생소하지만 양궁부가 등장하여 좀비장르의 특징인 사살(Shoot Dead); 헤드샷이 등장하는 장면도 재미있고, 변종이라는 포인트도 적절하게 활용된다. 서두에 언급했던 좀비물의 지향점을 적절하게 충족시킨다.
이렇듯 작가는 장르로써의 좀비물이 가지고 있는 장치들을 명확하게 이해하여 면밀하게 배치했고, 인물들의 역할도 나쁘지 않았다. 마치 배트맨의 조커를 오마주한 듯한 외모의 귀남은 신의 한수였고, 싸이코 패스적 기질과 좀비의 신체적 특징이 어우러지며 대단히 흥미로운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좀비물의 미덕인 사회 비판적인 접근도 빼놓을 수 없다. 효산시를 두고 전전긍긍하는 정치권의 모습이나 그런 무능한 정부 안에서도 제 역할을 잘 해내는 말단 형사들을 그려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주요 배경이 학교라는 점이 맘에 들었다.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이미 거대한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성적에 의해 우와 열이 나뉘며 취향에 의해 그룹이 나뉜다. 성향으로 인해 따돌림을 당하고, 군중심리로 인해 집단 괴롭힘이 자행된다. 박선생에 의해 생존의 길을 찾는 친구들의 모습은 좀비가 없다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학' 이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절절 끓는 욕망과 기호가 거세된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이미 그 자체로도 '공부하는 시체(Studying Dead)' 아니던가. 살아남기 위해 교실과 복도를 질주하고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고등학교라는 거대한 형무소 안에서 각자의 미래를 찾아 모험을 택하는 색다른 학생들로 보였기에 작품의 제목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왔다.
비록 시체들이 되살아나 날뛰고 있지는 않겠지만, 어떤가?
지금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그리고 지금 거기 당신들은?
당신은 진정, 좀비가 아닌가?

△책의 만듦새도 참 좋다. 역시 용자 애니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