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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개인적으로 같은 책을 두 번 세 번 읽는 스타일은 아니다.
매 년 새로운 책은 어김없이 쏟아지고, 옛날에 나온 고전들 중에도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몇 수레나 된다. 한정적인 시간 안에서 이미 읽은 책을 다시 펼쳐드는 건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책을 느끼며 떠올렸던 감상이나 다짐, 찰나의 느낌들을 한번에 잃는건 너무도 아까웠다. 독후감을 꼼꼼하게 쓰기 시작한 건 그때문이다. 책을 다시 읽지 않더라도, 그 책을 읽으며 느낀 점들은 최대한 기록하려 했다. 독후감을 쓰지 않은 책은, 읽지 않은 것으로 친다는 나의 마음은 20살때 이후로 쭉 이어지고 있다. 중고등학교때 독후감들은 대부분 방학숙제로 제출되어 폐지로 직업을 바꾸었고, 초등학교때 독후감들은 차곡 차곡 모은 그 시절 일기 안에 일부 남아있었다. 군대에서 적었던 독후감록들은 전역과 함께 잊힌 군생활처럼 감쪽같이 잃어버렸고, 처음 웹디자인을 배워 만든 독후감을 올렸던 개인 홈페이지는 웹 호스팅 업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며 그와 함께 마치 처음부터 적었던 적이 없었던 것 마냥 사라져 버렸으나, 습관만은 다행히 잘 남아있다.
서두에 책을 재독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문장을 떡하니 주워 섬겼지만, 사실 필립 로스의 작품들은 한 번 읽기 아쉬운 작품들이 꽤 많다. 아니, 모든 작품들이 한 번 읽기 아쉽다. 처음 접했던 [에브리맨]의 경우엔 마지막 장을 덮으며 느낀 여운을 꼭 껴안고 곧바로 맨 앞 페이지로 다시 넘어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휴먼 스테인] 역시 지금 두번째 읽다가 멈춘 상태이고, [울분] 은 강렬한 마지막 문장 한방에 마음이 그로기 상태가 되어버려 감상을 도무지 반추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더랬지만, 아직 안 읽은 책들을 꽂아놓는 책장칸에 여전히 꽂혀있었다.
'다시 읽어 보자'
그 마음을 먹은건,
그래. 세월호 사태가 조금 잊혀질 무렵이었다.
뉴스를 통해 들려오는 뉴스들에서 [울분] 의 마지막 문장이 들려왔다.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p 239
세월호의 선장과 주요 선원들, 진도 해경들, 청해진 해운의 유회장 등 참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한 선택들은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이었으며 실소가 터질 정도로 희극적이었다. 그들의 그런 선택들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브라운관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영상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 쩡쩡 울려댔다.
이와 함께, 작품의 초반에 나오는 문장도 들려왔다.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
"인생이 그래서 그래.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
내가 내 아들한테 아들 앞에 놓은 미래. 작은 것으로도, 아주 작은 것으로도 부서질 수 있는 미래에 관해 말하는데, 그게 그렇게 들려?"
p.23
참사로 희생당한 아이들의 부모님들 역시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 십수년간 전전긍긍 하며 소중하게 키워왔을터다.
이 작품은 유망했던 한 소년이 성인이 되면서 겪게 되는 격정과 파국의 기록이며, 그 청년을 파국으로 몰고간 사회와 시스템의 심각한 부조리에 대한 비판이고, 자식을 잃고싶지 않아하는 평범한 부모의 울분의 기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코 단순하지 않은 삶. 시시 때때로 나에게 어깃장을 놓아버리는 바로 그 삶. 그 누구도 의미를 찾을 수 없고,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바로 그 삶 자체를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땐 철저히 주인공 마커스의 시점에 집중한 기억이 난다. 읽는 내내 속이 터질 정도로 갑갑한 아버지의 걱정, 신경을 긁어대는 학우들, 꽉막힌 학생과장과의 갈등, 찌질하기 짝이없는 연애사에 어처구니 없는 헛발질, 여지없는 삶의 백태클까지.
제목처럼 목구멍까지 꽉 찬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이번에 읽었을 땐, 많이 달랐다.
이 작품에서 가장 억울하고 가여운, 울분에 찬 삶을 살다 간 인물은 마커스의 아버지였다.
삶의 모든것이었던 독자. 그는 자신의 소중한 외아들 앞에 드리워진 새까만 먹구름을 목도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사람의 다리로 태풍을 담은 거대한 먹구름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고, 아버지의 의지로 아들을 조종할 수도 없는 법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미래는 아주 작은 것으로도, 그리고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으로 산산이 부서질 수 있다는 사실을 무던히 전해주려 했지만,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부모가 되어봐야 그 사실을 배울 수 있는 법이다.
부모를 땅에 묻으면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희미해지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으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선명해 진다고 한다.
세상에 모든 다른 자식들을 보며 '내 자식이 살았으면 저랬겠지' 라며 끊임없이 반추하고, 자식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은 해가 갈수록 깊이 파고들어 곪고 곪고 또 곪는다고 한다. 오죽하면, 신이 세상에 부모를 잃은 자식에게 '고아' 라는 말을 내렸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는 그 참담함에 아무 말도 내릴 수 없었다지 않은가.
세상 모든 부모들에게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이 작품은 이 참담한 부자의 삶을 통해 생의 불합리와 부조화를 설파한다.
그 누구의 삶도 평탄할 수 없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행운보다 불행이 많으며, 더함보다 덜함이 많다.
미소보다는 눈물이 많고, 끊임없는 고통과 통증으로 점철되어있다.
하기사, 사람의 삶이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생명을 야금야금 잃어가는 지난한 과정에 불과하니.
지금 살아 숨쉬는 사람들도 방심하지 말지어다.
그 한 숨 한 숨이 죽음을 향한 한 숨이니, 신중히, 최선을 다해, 기쁘고 감사하게 만끽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