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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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p.309 (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 中)

 

 지난 일을 돌이켜보면 순간 모든 것들이 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러한 시간들을 무척이나 즐기는 편이다. 의자 등받이를 뒤로 살짝 젖히고 눈을 감고 과거의 어떤 시절로 돌아가본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엄마가 부업으로 회로판의 단자 부품을 조립하던 작은 방. 그 안에서 나던 묘한 플라스틱과 쇠의 냄새. 철사를 꼬아 만들던 바구니, 태어나서 처음 느꼈던 한약의 그 씁쓸하고 밍밍한 맛, 그 이후로도 몸이 약했던 탓에 항상 달고 살았던 한약 환들. 햇살이 쏟아지던 방, 버스 냄새, 무더위, 헬스장에서 처음 들어본 역기, 손바닥에 맺히던 물집과 굳은살, 벼루에 먹을 갈 때 느껴지던 향긋하면서도 역한 광물냄새, 한지에 스며드는 번짐, 잉크에 찍어 쓰던 펜촉의 날카로움, 그게 종이에 긁히는 소리와 감촉, 신병 훈련소에서 머리를 박박 깎은 천여명의 동기들을 바라보며 군복을 입고 살아야 할 2년 6개월이라는 거대한 시간에 대한 암담함, 믿을 수 없는 전역의 순간 등. 

 인간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죽음을 향한 달음박질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하루 하루는 우리가 전혀 걸어보지 못한 미답의 성역과도 같다. 어찌 보면 우리는 매일 매일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순간들을 맞이하는 셈이다. 때문에, 종종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떻게 나에게 이런일이 일어났지?' 싶은 일들이 수도 없이 많다. 하루하루의 삶은 어쩐지 경험해 본 듯 한 데자뷔로 점철되어 있는 절대 경험해보지 못한 순간들의 총합이다.

 

 작품집과 같은 제목의 단편을 포함에 총 9편의 단편들이 알차게 실려있는 [축복받은 집] 은 수 년 전 발간되었다가 지난해에 개정판으로 재발간 된 책이다. 9편의 작품들은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이 대단한 이야기들이다. 담담하고 절제된 수사법과 명료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을 통해 복합적인 감정들을 섬세하고 명민하게 그려낸다. 작품들은 모두 작가 줌파 라히리와  같은 인도계 미국 이민자와 그 2세대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코 '경계인' 으로서의 그들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는 처음부터 이민자들로 채워진 나라이고, 그 사회 역시 다인종 다문화 체계가 연합되어 이루어져 있지 않던가.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단순히, 아직 고향에 더듬이의 한 촉을 드리운 상태일 뿐이다. 

 9편의 단편들은 각각 인간의 단면들을 대단히 넓은 스펙트럼으로 다뤄낸다. 권태로운 부부부터 분쟁지역에 처자식들을 놓아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 중산층 전문가,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가족, 빈민가 주택에 사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 특이한 직업을 가진 인도인과, 역시 그를 바라보고, 그가 바라보는 사람들. 비슷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어딘가 불안한 듯, 불길한 느낌을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모든 이야기들에 서사가 뚜렷하게 살아있고,그 중심에 놓여있는 테마들도 단순하지 않고, 그를 다루는 방법 또한 변화 무쌍하고 예사롭지 않다. 처음에는 담담하고 한갓지게 등장인물의 시점을 따라가는 듯 하지만, 중반을 넘어서면 '언제 이렇게 꽉 차 있었지?', 싶다. 어느 사이엔가 이야기와 감정의 줄기들이 온몸을 죄여온다. 중심 테마들 역시 때로는 큰 관심이 없다는 듯 소품처럼 흘리기도 하고, 어린 아이처럼 애지중지 다루기도 하지만 모두 뚜렷하게 표현해낸다. 계산적이면서 감각적인, 이성과 감성을 모두 아우르는 엄청난 작가구나 싶다. 

 

 모든 작품의 완성도가 대단하고, 특장점들이 뚜렷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작품집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일시적인 문제] 와 [피르자다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와 끝머리를 장식하는 [비비 할다르의 치료]와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이 특히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희망적인 완결도 있고, 비극적인 완결도 있으며, 열린 완결도 있는데 이 네 작품의 인물들과, 인물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정서가 참 좋았다. 

 

 작품집 안에 작품들 대부분이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내가 겪고 만나본 인물들처럼 느껴질 정도로 인물과 사건들이 생생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내가 이 인물이라면 어땠을까?' 류의 감상을 겪게 되는 작품과, '이 인물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류의 감상을 겪게 되는 작품으로 나뉘는데, 이 작품들은 후자에 가깝다. 줌파 라히리의 많은 작품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인물을 객관화 시켜 독자들 앞에 펼쳐놓는 데에 대단히 훌륭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내가 등장인물들 옆에서 함께 웃고 울고 걱정하고 기뻐하는 듯 한 느낌을 한 껏 들게 해주었다. 특히 [비비 할다르의 치료] 에서는 책을 읽어가는 내내 비비 할다르를 한없이 안타까워 하다가, 마지막 문장에는 긴장이 스르륵 풀려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었더랬다. "휴 다행이다" 고 혼잣말까지 하면서. 

 

자아自我. 

나를 인지하고, 남을 인지하는 이 능력은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동반자를 지니고 있다. 타인이 없으면 자아도 무의미해진다. 나를 불러줄 남이 없으면, 내가 나일 필요가 없다.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남이 불러주어야 내가 된다. 이 뫼비우스의 띠가 바로 인간人間 이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이고, 만남은 헤어짐과 쌍둥이이며, 행복은 불행의 전조이다. 태어남은 죽음을 위한 확고부동안 논거이며, 타인이란 자아의 증인임과 동시에 외로움의 원천이다. 

 책을 덮자, 그 모든 감정들이 꿈처럼 밀려들었다가, 꿈처럼 잊혀졌다. 

그 모든게 삶일지니.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은, 만끽하고, 만끽할지라, 는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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