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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1 - 사도세자 이선, 교룡으로 지다
최성현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4월
평점 :
조선의 왕들에겐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했으나, 실제로 불리는 일이 없었다.
왕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 획이 많고 뜻도 미미한 글자를 딱 한 자만 골라 이름으로 삼았다.
하지만, 왕이 이름을 불리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궁중의 법도는 지엄했고, 왕은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왕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마마'였다. 이른 나이에 왕의 후계가 되면 '저하' 가 되고, 성인이 되어 왕위에 오르면 '전하' 가 되었다.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대부분은 죽거나, '대군마마' 가 되었다.
금상, 주상, 상.
살아있는 동안에는 종이 위에서도 왕들에겐 이름이 없었다.
그나마 죽고 난 뒤에는 시호가 붙었고, 족보의 한자락에 획도 많고 뜻도 미미한 복잡하고 어려운 한 글자가 쓰여졌다.
세자는 어느날 문득, 권력을 향한 치열한 아귀다툼의 밖에서 삶을 향해 꿈틀대는 거대한 용을 보았다.
그들도 자기처럼 이름이 없었다. 그들은 어느 시대이건 '백성' 으로 통칭되었다.
세자는 권력을 향한 싸움을 그만두고, 용을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이 작품을 리뷰하기 위해서는 영화 [역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사, 이 소설을 위해 리뷰 이벤트를 기획한 것도 영화와의 시너지를 위한 것일테니, 기획자의 의도에 맞는 방향으로 미력한 리뷰를 이끌어 나가보련다.
영화 [역린] 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 외적으로는 가장 평안했지만, 내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백성들은 그나마 살만했지만, 궁중 안에서는 수많은 양반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할퀴며 죽고 죽이는 당쟁이 가장 처절했던 영조시대를 계승한 정조에 관한 이야기이다.
최근 몇 년 간 정조를 다룬 컨텐츠들은 가히 붐이라고 칭해도 될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
정조는 그 태생부터 드라마틱하다. 결국은 왕이 되지 못하고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아비를 살리기 위해 맨바닥에 엎드려야 했던 열한살때부터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 왕이 되어야 했다. 아버지를 뒤주에 가둬 굶겨죽인 할아버지의 발 밑에 납죽 엎드려야 했고, 자신과 나이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젊은 할머니(정순왕후)와의 권력 전쟁의 중심에 서야 했다.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살아남아 왕이 되었지만, 그 뒤도 평안하지는 못했다. 노회한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이기 이전에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고, 최후의 순간까지 끔찍한 위협이었다. 아버지를 죽게 한 세력들(노론)도 여전히 강대했고, 그 정점에는 아직도 젊고 건재한 할머니가 있었다.
정조는 집권 초기엔 정적들과의 암투로 정신이 없었고, 중기에 접어들어 비로소 뜻을 조금씩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혁의 기틀을 잡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할 즈음 돌연사하고 만다.
그냥 사건들만 줄줄 풀어놓아도 빠져들만큼 재미있다.
영화 [역린] 은 바로 이러한 정조의 집권 직후. 정조 1년에 있었던 왕의 암살사건인 정유역변을 두고 펼쳐지는 하룻동안의 일들 다룬다고 한다.
다시 소설[역린] 으로 돌아오면, 영화 [역린]의 각본을 담당했던 최성현 작가가 집필한 것으로 총 두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 '교룡으로 지다' 는 냉혹한 정치의 희생양인 사도세자의 참혹한 일화 - 임오화변, 2권 '용의 분노' 는 영화 [역린] 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내가 리뷰단으로 선택되어 받은 책은 1권 '교룡으로 지다' 부분으로 영화 [역린] 의 프리퀄 격인데, 딱 한마디 감상은,
'상당히 재미있다!!'
상세히 들여다보면, 각 챕터가 인물별로 나뉘어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이나 최근 인기가 높은 '왕좌의 게임' 의 원작소설인 J.R.R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와 같은 구성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요 화자가 챕터별로 바뀌는 방식이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다각도에서 각 인물별로 사건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소설에 매우 잘 어울리는 구조라 할 수 있다. 특히 임오화변이나 정유역변처럼 대부분의 독자들이 결과를 명백히 알고 있거나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사건의 경우엔 디테일한 세부요소들을 알게 됨으로써 인과관계를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구조적인 장점에 어울리는 문체도 정말 좋았다.
사실 우리나라의 역사물은 김훈 작가의 [칼의 눈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수사법을 최대한 배제하고, 적확한 단어들을 통해 간결하면서도 명징한 묘사로 단호한 문체를 구사하는 김훈 작가 특유의 스타일은 이후의 수많은 역사 소설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 작품 또한 전반적으로 절제적이고 단호한 문체가 무거운 주제와 어우러져 상당한 비장미를 선사한다.
영화 시사를 마친 전문가들도 대부분 호평을 했던 캐릭터들은 소설 안에서도 지극한 매력을 자랑한다.
사도세자의 이야기인 소설의 1권 안에서 정조의 비중은 미미하지만, 당시 조정을 쥐어잡고 있던 노론의 거두 홍봉한과 정순왕후, 아들 정조를 지키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세자빈 혜경궁 홍씨, 왕의 최측근이자 사실상 권력의 핵심인 내관 안국래, 조선 최강의 암살집단을 구축하게 되는 광백, 그리고 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어 죽게 만든 영조까지 다양한 위치의 인간 군상들이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캐릭터들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데에는 위에 언급했던 소설 자체가 갖고 있는 서술 구조도 한 몫을 한다. 읽어나가다 보면 각 캐릭터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다양한 조각들이 어떻게 서로 맞물려 임오화변이라는 하나의 참혹한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지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 [이상문학상 수상집]부터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집],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 까지 치달으며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예민한 단편들만 읽어서인지 선굵은 서사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데,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이 더 호의로운 것일수도 있겠다 싶지만, 1권만 읽었음에도 서사적으로 뛰어난 완성도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