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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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카툰과 코믹스, 망가를 폭넓게 아우르는) 라는 매체는 탄생 초기부터 회화와 문학 사이에 어중간하게 놓여있었다. 만화의 시작을 이야기 할 땐 회화와 함께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언급된다. 만화는 미국이나 영국등의 타임지나 BBC등에서 '올해의 픽션' 같은 것을 뽑을 땐 각종 문학 작품들과 함께 순위에 오르기도 하고,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대형 서점의 '회화' 코너에 진열되어 있기도 하다. 반면, 일본 '망가' 의 영향을 받아 '만화' 로 발전한 우리나라에서는 '예술'의 범주에 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여전히 논란거리이지만, 사실 어떤 사람들과 어디서 누가 논쟁을 벌여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확실한 건, 한국에서 만화가는 예술가에 포함되지 않고, 한국예술가협회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만화' 와 미국과 유럽 등 서구사회의 '만화' 는 개념이 완벽하게 다르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겐 예술도 아니지만, 그들에게 만화는 예술분야 - 회화이며 문학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도 그러했겠지만, 아주아주 생소한 캐나다의 작가 '세스' 는 자기 고백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만화가인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잭 캘로웨이' 라는 만화가의 삶을 뒤쫓는 내용이다.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 '온타리오 런던'(캐나다의 한 도시)에 도착한 세스는 중고서점에 들러 옛 잡지들과 단행본을 구입한다. 한 세대쯤 전의 옛 잡지들을 보던 세스는 '캘로' 라는 작가가 그린 카툰에 푹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작가의 작품은 한두작품 외에 눈에 잘 띄지 않았고, 검색되는 작품도 별로 없었으며, 만화가들의 이름과 작품이 소개되어있는 일종의 만화가 인명사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세스가 캘로의 작품을 발견했던 지면은 당대 최고의 카투니스트만이 작품을 기고할 수 있었던 잡지였다. '캘로' 는 만화가로서 재능을 인정받고, 나름대로 성공한 작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기록도 없고, 작품집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의아했던 세스는 '캘로' 를 직접 찾아보기로 한다.    


 작품은 대체적으로 정적이고, 내레이션과 독백, 대사가 많은 미국식 그래픽 노블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유럽풍은 반대로 그림이 많고 대사가 적다.) 그림체는 단순하고, 2도 인쇄로 꽤나 독특한 느낌을 준다. 작풍과 이야기, 메시지와 아주 잘 어우러진다. 

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동안, '폴 오스터' 의 [환상의 책] 이 떠올랐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삶의 모든것을 잃어버린 중년의 남자가, 한 세대 전의 코미디언 '헥터 만' 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와 스스로를 구제불능에 외골수라고 여기고, 만사가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세스가 한 세대 전의 만화가 '캘로' 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는 묘하게 닮아있다.   

하지만,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가 좀 더 쉽고, 편하게 다가온다.

주인공 '세스' 를 보는 내내 내 자신이 아주 많이 이입되었다. 자신의 여러가지 단점들을 잘 알고있고, 외골수에, 가끔은 우울해하고, 크게 만족하지 못하지만, 크게 부족하지도 않은. 평범하고, 보통의 젊은 남자.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며, 그걸 무척 좋아한다는 점도 비슷하고, 중얼중얼 불평 불만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가끔은 친구가 영화를 보러 가자그러면 주머니에 돈이 없어 거절할 때도 있다는 점까지.ㅋㅋ

만화가로서의 삶은 생각보다 그리 기쁘고 즐겁지 않다. 수시간동안 애써서 그린 그림은, 그냥 종이 한장에 불과하다. 디지털 작업이 많은 요즘엔, 수시간동안 애쓴 그림은 그냥 Delete 키 하나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사라지고, 며칠동안 그려서 올린 만화는 스크롤 몇번이면 끝나버리고, 허허한 댓글 한두줄로 대가를 지불받는다. 지금까지 내가 그려온 그림들 역시 나이먹고 이사다니는 사이에 폐휴지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부분의 만화가와 미술가, 소설가들은 그렇게 사라져간다. 


"한 생 다 살고 나면 결국 이깟 종이 몇 장 남고 끝이란 말이야?"

p.108


세스가 찾아나서는 '캘로' 는 어쩌면 세스 본인의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다. 

태어나고, 꿈을 꾸고, 그 꿈을 좇다가, 어느정도 지점에 오르지만,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고, 가족을 이루고, 죽고. 

세상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연속이 아니야.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이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냥 끌려 다니는 거지. 지난 날들을 돌이켜보면 '좀 다르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게 마련이지만, 그것 정말 보통 의지로는 안 되었을 걸세. 그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그러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했을거야."

p.155


팀 보울러는 [리버보이] 라는 작품을 통해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긴 소년을 통해, 그냥 그렇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임을 에둘러 표현했다. 세스 역시 캘로를 찾아다니던 도중에 만난 캘로의 늙은 이웃에게 비슷한 뉘앙스의 한마디 말을 듣는다. '그냥 끌려 다니는 것. 그것이 인생'. 그냥 흘러가는 것. 그것이 인생. 


그렇다.

삶이란 사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란 그리 거대한 존재도 아니다. 심지어 자기 삶 안에서도 말이다. 

작고, 소소하고, 하찮아보이는 일들의 반복이 삶의 대부분이고, 어쩔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 제목에 더 공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작고 소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인생이고, 인간이지만 지나치게 우울해할 필요도 없다. 

딱히 강해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딱히 지나치게 아둥바둥 발버둥 칠 필요 없다. 아프면 아파하고, 슬프면 울고, 미우면 미워하고, 기쁘면 기뻐하고, 행복하면 행복해하고, 사랑스러우면 사랑하고, 즐거우면 즐거워 하면 된다.  강해지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좌절하고 더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그리고 사실 그다지 강해지지도 않는다.

그저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제법 괜찮을 수 있는게 인생일터.


작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너무 아둥바둥 할 필요 없다고.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니까, 

딱 서서, 

버텨보자고.


 

 

 

 

 

덧: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겐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무척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

진정 '읽는' 만화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작품.

만화 자체로서도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캐릭터와 편안하면서도 단조롭지 않은 연출과 구도는 깊이 공부해볼 만 하다.

최근 국내에도 웹툰을 통해 자신의 자전적인 -신변잡기적인- 작품을 그리는 작가나 지망생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하다.

자전적인 만화라고 주구장창 얼굴만 나오는, 독백과 내래이션만 나오는 만화는 '만화' 로서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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