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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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라는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한 소녀의 이야기.

한 남자의 손에 잡혀 자루속에 던져지던 기억이 아마도 그녀의 첫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랄라 아스마라는 사람에게 판매되어서, '밤' 이라는 뜻의 '라일라' 라는 이름을 얻게된 아프리카 태생의 소녀. 선량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랄라 아스마 덕에, 유괴되어 팔려간 소녀 치고는 올바른 교육을 받게 된다. 물론, 사랑이나 애정과는 거리가 있었을테고, 랄라 아스마의 아들과 며느리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앞으로 그녀가 겪을 여정들에 비하면 그 시절은 '평탄했다' 고 할 수 있을터.

 라일라는 랄라 아스마로부터 받았던 그 시절의 교육들을 바탕으로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지역을 거쳐 프랑스로, 미국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삶을 시작하게 되고, 역경과 고난들을 지혜롭게 헤쳐나가게 된다.

 

 인간은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인간이 사유를 시작한 이래 가장 의미있는 질문인 동시에, 무의미한 질문.

인간으로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인 동시에, 인간이기에 영원히 고민해야 할 화두.

라일라는 왜, 무엇을 위해 그토록 떠돌았을까? 왜 그토록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은 자신의 근원지  - 고향을 찾아 헤매야만 했을까?

그녀의 삶은 텅 비어버린 삶일까, 가득 찬 삶일까?

마치 고속철도의 창밖으로 사라지는 풍경들처럼, 그녀의 삶은 정신없이 지나간다.

 

 랄라 아스마, 조라, 아벨, 자밀라 아줌마, 후리야, 게오르크 쇤, 들라예 부인, 마리 엘렌, 프리메제아 부인, 노노, 하킴, 엘 하즈 할아버지, 시몬과 베아트리스, 엘 세뇨르...

 그녀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 그녀의 인생에 크고작은 영향을 미치고, 그녀에게 길을 내어주고, 길을 가로막고, 길을 안내하고, 길을 만들어준 수많은 사람들. 그녀를 갖고싶어했던 사람들과, 그녀에게서 위안을 찾고싶었던 사람들과,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

 인생과 인생, 수많은 인생들이 얽히고 또 얽히고 설키고 엉킨다.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 그리 했던가?

라일라를 유괴했던 그. 그는 왜 그리 했던가? 무엇을 위해. 그렇게라도 살아야 했던가.

 

수많은 질문들을 만나고, 수많은 목적들을 만나고, 수많은 무의미와, 유의미를 거치고 거쳐, 그녀는 음악을 만난다.

음악이 그녀의 삶 속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있다. 그녀의 음악을 통해 치유받고 회복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었고, 그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혼신을 다해 연주했을 터다.

 그것은,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을까, 무언가를 가득 채우는 느낌이었을까? 

 

라일라의 삶 전체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가 어울릴까...

'표류' '항해' '파란만장' '역경' '미로' 등이 떠오른다. 

그녀의 삶은 부유물처럼 둥둥 떠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비참할정도로 가난할때에도 지역에 설치되있는 무료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며 공부했고, 쓰레기 하치장을 뒤지며 살았을때도 쓰레기로 버려진 책들을 쌓아놓고 읽었다.

그녀의 삶은 표류처럼 시작되지만, 결국은 목적지를 찾아내, 항해로 바뀐다.

수많은 역경들이 있고, 수많은 막다른 골목을 만나지만, 역경 속에는 언제나 헤쳐나갈 구멍이 있고, 막다른 골목 역시 벗어날 방법이 있다. 삶이란 언제나 그러하다. 위기는 기회와 함께 오고, 좋은일엔 나쁜일이 따른다.

하늘위로 높이 치솟은 파도는 반드시 땅 속 깊숙히 꺼지기 마련이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 중 잘 읽히는 편에 속한다' 는 평처럼, 정말 순식간에 읽어내린 작품이다.

라일라의 삶의 여정은 쉼없이 파도가 몰아치고, 바람이 몰아치고, 수영 뒤에 싸이클, 그리고 마라톤까지 완주해야하는 철인 삼종경기처럼 숨가쁘게 진행된다. 그 안에서도 르 클레지오 특유의 서정적이고 현학적인 문장들이 대단히 감미롭고 아름답다.

 이 작품은 라일라라는 한 흑인소녀의 인생 그 자체가, 거대 서구문명에 잠식되어가는 소수민족의 전통문명에 대한 메타포로 보는 해석도 있지만, 그런 거대담론에 파묻지 않아도 충분히 깊이있고 무거우며 어렵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엄청나게 무겁거나, 음울하거나, 어둡지 않다.

색채로 따지면, 온화한 노란색, 그리고 깊이있는 와인색. 이 두가지가 번갈아 펼쳐지는 느낌이랄까.

'밤' 이라는 뜻을 담고있는 '라일라' 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지만, 라일라는 햇살처럼 반짝이는 소녀이다. 그녀를 갖고싶어했던 남자들,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들이 충분히 이해될 정도이다.

 

 라일라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 당당했고, 올곧았다.

그녀는 일단 - 지금 당장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지만, 그렇다고 울먹이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거나 갈팡질팡 헤매이지 않았다.

현실을 직시하고, 눈 앞, 발 앞. 일단 앞에 놓인 그것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밝음' 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엄청난 낙관주의자이거나, 낙천적인 성향은 아니었다. 첫 기억이 - 시커먼 손에 붙들려 자루 안에 던져지는 것인 소녀가 낙관주의적이거나 낙천적인 성격으로 성장했을리는 만무하니까.

그런 것과는 차별되는 '밝음' 을 지니고 있었다.

 어떠한 절망과 고통과 위기속에서도, 깊은 어둠속으로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무저갱의 구멍 속에 떨어져도, 꿋꿋하게 사다리를 찾아 한칸 한칸 올라올 것만 같은 밝음.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만큼 아주 밝고, 아주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 그녀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 그녀는 그냥 평범하게 내 옆을 지나쳐가는 흑인 소녀였을터.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반짝거리며 또박또박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시커먼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물고기처럼 말이다.

 

 

 

"더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마침내 내 여행의 끝에 다다랐음을 안다.

어느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땅을 만진다. 내 어머니의 손을 만진다."

 

"이제 나는 자유로우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름을 떨친 나의 조상 빌랄처럼, 노예였다가 예언자 마호메트가 속박에서 풀어주고 세상으로 내보낸 그 사람처럼,

드디어 나는 또 하나의 빌랄 족이 되어 부족의 시대에서 사랑의 시대로 들어선다."

 

p. 27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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