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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언제나 안개로 뒤덮여있는 '뉴 아일랜드' 의 살인3계에 심리 분석관으로 새로 합류한 라일라 스펜서는, 말 그대로 신출내기였다.
뉴 아일랜드 경찰청 살인 3과장. 살인 3계의 과장인 헐리와 신출내기 심리분석관은 공교롭게도 살인 현장에서 첫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헐리는 전형적인 고집불통에 편협한 '재수없는 상사' 로, 심리 분석을 들먹이는 최신식 수사법에 불만을 토했지만, 심리 분석을 통해 범인을 프로 파일링하는 것이 수사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라일라가 뉴 아일랜드 살인 3계에서 최초로 맞닥뜨린 과제는, 케이블카에서 한 여성을 죽인 범인에 대한 프로파일링이었다.
해협을 가로지르는 일종의 대중교통 수단이기도 한 케이블 카 안에서 오른쪽 이마에 총을 맞고 살해당한 아름다운 금발여인. 그리고, 이런 공개된 공간에서 대담하게 여인을 살해한 범인.
한가지 특이한 점은, 죽은 여인은 뜻밖에도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또한명의 주인공, 크리스 맥코이.
7년 전, 희대의 연쇄 살인마를 총격전 끝에 사살하고, 자신도 이마에 총을 맞아 3년간 식물인간으로 지내고, 힘겨운 재활 과정을 거쳐 간신히 복직했으나, 크고작은 사건들로 현재 정직중인 뉴아일랜드 경찰청 최고의 사냥꾼.
맥코이는 뉴아일랜드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려있는 '웃는 시체' 에 대한 기사를 접하는 순간, 범상치 않은 '사건' 에 대한 냄새를 맡게 되고, 경찰청 국장의 지시로 정직중이지만 헐리의 수사팀에 합류하게 된다.
헐리와 사사건건 충돌하는 맥코이, 경험많은 노장 스캇, 신출내기 프랭크와 역시 신출내기인 심리 분석관 라일라 스펜서.
살인 3계는 과거와 현재가 얽여있는 의문의 연쇄 살인마와 숨막히는 게임속으로 빠져든다.
'뿌리 깊은 나무' 로 인상적인 작가경력을 시작한 이정명 작가의 3번째 장편소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사건 속에 자연스럽게 가공의 인물들을 배치하여 인상적인 역사 미스테리물을 그려냈던 이정명 작가는, 뒤이어 '바람의 화원' 이라는 작품까지 큰 인기를 끌면서 일약 베스트 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특히, 풍부한 역사적 지식과 충분한 연구로 실제 인물과 가공의 인물간의 간극을 최소화한 부분과, 한정된 소재로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다빈치 코드' 의 댄 브라운 못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침니 랜드' 와 '뉴 아일랜드' 라는 가상의 도시를 만들어 현대적인 미스테리로 출사표를 내밀었다.
예로부터 많은 작가와 철인들은 인간에게 내재되어있는 선과 악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고, 고민해왔다.
사회적, 환경적인 많은 요인들을 들먹여가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수많은 의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실존주의의 대가였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심연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자는, 스스로 심연이 된다.' 는 한마디는 수많은 철인과 작가들 뿐 아니라, 심리학자들에게 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의 작가인 이정명 작가 또한 이 부분에서 이야기의 영감을 얻었을 터.(실제로 극중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과 인간이 얽히고 설키면서 주고 받은 수많은 상처와 치유의 순간들을 통해 사건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고, 그것들이 한 인간의 인격과 인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하고자 한 듯 하다.
'인간' 은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나] 는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은 죽는다. 나또한 다르지 않다. 인간은 죽으면 흙이되고, 먼지가 되어 바스라진다.
이 세상에 살았던 적이 없는 것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
어차피 사라져버릴 생명이라면, 과연 인간 개개인의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심지어 생존해 있는 동안, 그 사람의 존재는 무엇으로 정의내릴 것인가?
작품 안에서는 이 태고적부터 끊임없이 이어져온 존재의 의문에 대해 실존주의를 토대로 풀고자 한다.
과거가 없이 현재가 있을수는 없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로서, 현재를 보면 과거를 알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원하든 원치 않든, 현재의 자아를 완성시킨 것은 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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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한 사람의 전부니까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와 물, 단백질 같은 무기질로 만들어졌지만 한 사람을 완성하는 건 그의 과거에요. 시간과 기억이 그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구성하죠. 기쁨과 슬픔, 분노와 고통도 지금의 당신을 만든 것들이에요. P. 238여기에 인용문을 입력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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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필멸의 존재로서 인간의 '과거' 에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 죽음이라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귀결되는 결말을 가지고 있다. 많은 인간들이 죽음이라는 결말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후 세계, 또는 내생등과 같은 종교적인 가치에 집착하는 것은 죽음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공포로부터 기인한다.
이미 내정되어있는 미래가 있기때문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과거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과거를 완벽하게 떨쳐내지 못한다.
조금은 평범하게 흘러가는 이 책은, 중반을 넘어가면서 완벽하게 다른 작품으로 탈바꿈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한 사람의 전부' 인 과거의 경험이, 그 경험의 주인인 사람을 죽일정도의 고통이라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뇌는 이중 삼중의 방어 시스템이 있다.
아주 간단한 예로, 마라톤을 하면서 느끼는 '런너즈 하이' 를 들 수 있다.
런너즈 하이는, 인간의 근육이 한계 이상의 활동을 하여 육체적인 고통이 찾아올때, 뇌에서 그 고통을 차단하기 위해 아드레날린의 일종인 도파민을 분비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이 도파민은 말기 암 환자들에게 진통제로도 쓰이는 아편과 비슷한 효과를 주는데,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오히려 쾌락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이 현상 때문에, 마라톤을 마친 마라토너들은 고통이 아닌 쾌락으로 그 순간을 기억하게 된다.
이 놀랍고도 신기한 현상은 비단 육체적인 고통에 국한되지 않는다.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뒤에, 자신이 목격한 장면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나,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뒤에, 그 당시 상황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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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그만큼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에요. 그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고통을 견딜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애써 그 기억을 외면해왔어요.......그 기억은 왜곡된 거에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작되었다고 해야겠지요."
"누가 내 기억을 조작했다는 거지?"
"당신 자신이에요.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 뇌가 당신 기억을 조작했죠."
.................
"살고 싶었으니까요. 당신이 제대로 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면 살 수 없었을 거에요. 권총을 물고 자살했거나 우울증을 앓으며 시름시름 죽어갔겠죠. 당신은 살기 위해 끔찍한 기억을 조작해야 했어요." P. 24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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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뇌의 방어기제는 기억과 과거를 조작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한 인간의 성격까지 변화시키곤 한다.
작가는 작중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행동과 심리에 대한 치밀한 설정을 준비했고, 연쇄 살인사건과 퍼즐을 통해 절묘하게 풀어냈다.
'뿌리 깊은 나무' 의 심리 서스펜스 버전이라고 하면 좋을까??
'뿌리 깊은 나무' 와 '바람의 화원' 에 깔렸던 은근한 로맨스 코드도 여전하다.
라일라와 맥코이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동료이자, 심리학자와 상담대상을 살포시 웃돈다.
-심리 분석가와 상당 대상간의 미묘한 애정기류에 대한 내용은 정통 심리 서스펜스를 표방한 '살인의 해석'(제드 러벤펠드 지음/비채)에 보다 디테일하고 흥미롭게 펼쳐져있다.-
또한, 속도감 있는 전개와 독자들의 호흡까지 좌지우지하는 이야기의 흐름은 꽤나 어렵고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어둡고, 책 전반을 지배하는 '안개' 라는 코드처럼 묵직함 일변도라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를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부분이었나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맥코이와 라일라의 심리 묘사를 보다 디테일하게 해서, 분량을 좀 늘렸어도 좋았겠다 싶지만, 그건 역시나 나의 지나친 '개인적' 성향 탓일터다.^-^ (아마 그랬으면 잘 안팔릴지도..ㅋㅋㅋ)
뿐만 아니라, 사건과 인물, 에피소드 간의 개연성이 뚜렷하여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결말을 유도한다.
언제나 장르문학의 문제점은 개연성에 대한 부분이다.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인위적인 설정들을 집어넣음으로서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헐겁게 하는 에피소드들과 작위적인 상황들이, 최소한 이 작품 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개 자체가 속도가 빠르고, 마치 연극이나 영화 시나리오처럼 대화형식이 많아서 독자가 여유를 갖고 퍼즐을 짜맞추는 과정에 동참하기가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지만, 뚜렷한 인과관계와 자연스러운 흐름이 인상적이다.
'뿌리깊은 나무' 와 '바람의 화원' 에서도 보여졌던 이정명 작가의 장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적당한 길이와, 빠른 호흡, 입체적인 등장인물과, 그 등장인물을 돋보이게하는 전형적인 주변인물들. 그리고, 끊임없이 곤란한 상황 속으로 빠져드는 주인공.
거기에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과, 설득력 있는 결말. 삼박자가 잘 어우러진 좋은 이야기임은 확실하다.
최근 한국의 장르 문학들도 영화, 드라마나 외국 출판등의 기획 하에 제작되는 작품들이 많은 듯 하다.
한국 출판시장은 그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내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왔는데, 이렇게 뛰어난 필력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가들을 선두로하여 차츰차츰 외국 출판 시장까지 넓게 넓게 퍼져 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