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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게임 1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920년대, 스페인 바르셀로나.
다비드 마르틴의 아버지는 필리핀 전쟁에 참여한 상이군인이었다.
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아버지에게 남겨진 건 아내로부터의 버림, 국가로부터의 버림, 사회로부터의 버림. 그리고, 어미로부터 버려진 아들, 다비드 마르틴이었다.
마르틴의 아버지는 전쟁이 남기고 간 잔상으로 고통스러워 했고, 자신과 유리된 세상을 원망했으며, 메마른 감정을 적시기 위해 끊임 없이 술을 들이부어야 했다.
마르틴은 불우한 환경속에서 유일한 마음의 위안을 펜과 잉크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보다 빠른 속도로 글자를 습득했고, 글이 종이위에 쓰여지며 만들어내는 반짝거리는 이야기들을 사랑했다.
이웃 서점 주인인 셈페레는 그런 마르틴에게 언제나 마음껏 책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마르틴의 아버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살인자들에게 총을 맞아 품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마르틴은 아버지가 일하던 [기업의 소리] 신문사에 사환으로 취직된다. 마르틴이 신문사에 취직되는데는, 신문사의 스타이자 편집인의 절친한 친구인 바르셀로나 최고의 갑부들 중 하나인 페드로 비달의 덕이었다.
그때부터 페드로 비달과 마르틴의 인연은 시작된다.
스승이자 친구였던 페드로 비달의 후원 덕에, 마르틴은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고, 운 좋게 신문 지상에 글을 올리게 된다.
그의 재능은 지면에 실려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일약 인기 소설가가 된다.
그가 스페인 유수의 출판사와 10년의 장기계약을 맺고 글쓰는 기계처럼 인기 작품을 양산해 내고 있을 즈음, 페드로 비달의 운전수 딸인 크리스티나와의 인연이 시작되고, 안드레아스 코렐리라는 의문의 인물과 첫번째 접촉을 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남몰래 크리스티나를 연모하고 있던 마르틴.
그리고, 어마어마한 댓가를 약속하며 의문의 책을 집필해 줄 것을 요청하는 안드레아스 코렐리.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스페인의 현대문학을 접한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고전 중에서도 스페인 작품을 접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투우, 프리메라리가, FC바르셀로나, 월드컵에서 한국과 질긴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나라. 가우디의 고향, 열정의 나라.
스페인에 대해 떠오르는 몇가지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법.
책에서는 이런 이미지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조금은 몽환적이고, 전반적으로 차분한 이 작품은 자신만의 흐름을 가지고 있고, 자연스럽게 독자를 이야기의 흐름속으로 빠뜨리는 묘한 매력이 있다.
전형적인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 작품은, 현실과 환상의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으며 독자들을 이입시킨다.
특히, 작가로 나오는 주인공은 마치 실제 인물처럼 감정의 흐름과 묘사가 대단히 리얼하고 디테일하다.
또한, 자연스럽게 흐르는 문장들도 대단히 아름답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문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야기의 진행은 약간 복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의문의 인물, 의문의 사건들이 등장하고, 마지막까지 속 시원하게 뭔가를 제시해 주지는 않는다.
이 부분에서 독자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 것 같다.
최근 한국의 독자들은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풍의 속도감 있고, 전반적으로 잘 정련된 작품들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야기도 복잡할 뿐더러, 주인공의 감정의 흐름도 상당히 디테일하다. 그때문에 전반적인 호흡도 보다 여유있게 느껴진다.
작가는 어떤 상황에 처한 주인공이 느끼는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데 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상황을 인지하고, 감정의 흔들림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과정이 디테일한 반면, 이야기의 진행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런 점들이 장점으로 작용한다면, 독자들은 주인공에 보다 쉽게 이입할 수 있다.
독자들은 주인공이 느끼는 일련의 흐름들을 똑같이 느낄 수 있고, 마치 자신이 느끼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반면, 그런 식의 독서가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지루하고, 쓸데없는 묘사에 치중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다비드 마르틴' 은 삶의 굴곡을 겪으면서 부드럽고 배려심있지만, 어딘가 빈 인물로 자라난다.
어머니가 없었고,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어린시절을 겪은 마르틴은 외로움이 너무나 익숙하다.
그에게 고독과 외로움은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을 터다.
그런 마르틴이 부드러운 심성과 배려심을 배운 것은 너무나 자상했던 서점주인 셈페레와 멘토이자 스승이었던 비달 덕분이었으리라.
셈페레는 책에 영혼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마르틴은 좋은 영혼, 고귀한 영혼이 담긴 책들을 읽으며 자라왔고, 결국 마르틴 역시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위에 언급했듯, 이 작품의 복잡한 이야기들은 한마디로 정리되지 않는다.
책을 덮어도 수많은 의문들이 그대로 살아있고, 해피엔딩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책을 덮는 순간 무언가가 가슴 깊이 다가왔다.
나는 가끔, 나의 인생은, 사실 누군가가 읽고 있는 책이 아닐까. 혹은, 누군가가 써내려가고 있는 이야기의 인물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어느정도 맞을지도 모른다.
신이 써내려가는 나의 인생.
혹은 내 자신이 써내려 가는 나의 인생.
수많은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책을 만들어 낸다.
나는, 하루하루 어떤 이야기들을 모아서 적어넣고 있는가?
"네가 보고 있는 각각의 책은 모두 영혼을 지니고 있어.
그 책을 쓴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었고 그 책과 함께 살았고 꿈꾸었던 사람들의 영혼도 가지고 있어.
책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가 그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릴 때마다, 그 책의 영혼은 커지고 강해지지.
이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잊혀 버린 책들은 이곳에서 영원히 살면서,
새로운 독자나 새로운 영혼의 손에 이르기를 기다려.... " 2권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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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에게 달려 있어, 마르틴. 나는 자네에게 백지 한 장을 건네주겠네. 이 이야기는 이미 내것이 아니야." 2권 p.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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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고, 내가 그녀에게 끼쳤던 해를 보상하며, 내가 그녀에게 결코 주지 못했던 것을 되돌려 주는 데 우리에게 남은 모든 시간을 사용하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이 글은 그녀의 마지막 호흡이 내 품에서 꺼지고,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 안 쪽으로 그녀와 함께 갈 때까지 우리의 기억이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녀와 함께 영원히 물속에 가라앉고 마침내 천국이나 지옥도 우리를 결코 발견할수 없는 장소로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2권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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