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사인
에이미 벤더 지음, 한아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와아....

정말 이렇게 힘들게 완독한 책은 정말 간만이다.

다행히 마지막 7~80페이지는 엄청난 흡입력으로 솰솰 끌어당겨줘서 간신히 다 읽었다.

마치,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을 읽는듯한 느낌이었다.

 

대단히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문장들이 모나라는 소녀의 삶을 이루어 내고 있는데, 이런 식의 문장이 익숙치가 않아서인지, 몰입이 쉽지 않았다. 이야기의 서사에 따라 문장을 이어내는, 구체적이고 친절한 상황묘사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페이지를 술술 넘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작고도 큰 선물을 충분히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1인칭 소설인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완벽한 1인칭의 시점에서 꾸며진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시간의 흐름대로 사는 듯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들어, 과자를 사러 슈퍼에 간다고 하면, 지갑을 챙기고 슈퍼 앞에 도달할때까지 과자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갑이 어딨는지 두리번 거리다가, 지난달에 잃어버린 지갑을 떠올리고, 그 안에 있던 숱한 아까웠던 것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좋아하는 레스토랑의 쿠폰을 바리바리 모아두었던 것도 떠오를 것이고, 그 레스토랑에서 함께 밥을 먹었던 지금은 헤어진 여자친구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 책의 작가인 에미미 벤더는 완벽하게 주인공인 '모나 그레이' 가 되기로 한다.

 

사랑하는 아빠가 알수없는 병에 걸려 무기력해지기 시작하던 날부터 모나는 좋아하던 것들을 단념하기 시작한다.

피아노 레슨, 무용레슨, 육상과 후식까지 하나하나 삶 속에서 지워나가는 모나. 남자친구의 부드러운 손길이 좋아지자, 결별을 고하고, 트랙에서 그 누구보다 우수한 기록을 세우자 육상을 그만둔다.

소녀는,  나무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단념한 것들에 대한, 일말의 미련과 추억을 나무 안에 불어 넣기라도 할 듯이 나무로 된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두드린다.

 

숫자에 민감하고, 수학을 잘했던 소녀 모나 그레이는 지역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특별 초빙으로 초등학교 1, 2학년 학생들의 수학수업을 맡게 되고 엉뚱한 소녀 모나는 제멋대로에 좌충우돌하는 아이들 사이에 똑 떨어지게 된다.

 

이렇게 줄거리만 보면 되게 재미있고 유쾌한 소설일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온통 어딘가 병든 사람들.

마음이, 몸이 병든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 같은 이 작은 마을에는, 아이들마저 어딘가 조금씩 병들어 있는 것 같다.

 

책을 보는 내내 영화 아이덴티티가 생각났다.

모나 그레이가 겪는 모든 일과, 그 주변의 인물들 모두가 마치 모나 그레이 한 사람의 머릿속 이야기와 같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딘가 병든 모나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그렇게 보였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모나가 보는 모든 사람들은 어딘가 병들어 있는 듯 보였고, 모두가 불행해 보였다.

 

누군가 그랬다.

삶의 7할은 고통, 슬픔, 눈물, 불행이라고.

내 생각에, 남은 2할은 타인의 고통, 슬픔, 눈물, 불행 일 것이고,

마지막 1할은 그 나머지이리라.

인생은 전체가 불행이거나,

전체가 행복. 둘 중 하나이다.

 

모나에게 세상은 고통과 불행이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나보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반대로 절제하는것에 집착한 모나는 새로운 '불행하는 법'을 찾아낸 듯 하다.

인간은 불행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7할이 불행이라도 3할이 행복이라면 그것을 위해 충분히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이다.

모나는 전체를 불행으로 만들면서 생존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행위를 시작한다.

 

한편, 같은 동네에 목에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숫자를 거는 존슨이라는 이웃이 있었다.

자신의 어렸을때 수학선생님이기도 했고, 지금은 철물절 주인이기도 한 존슨 아저씨의 목에 걸려있는 숫자들은 모나의 세계였다.

존슨 아저씨는 거의 대부분 작은 숫자들을 목에 걸고 다니곤 했다. 작은 숫자일수록 우울하고 불행하다는 표기였으니, 그것을 보며 자란 모나에게 인생의 대부분은 우울하고 불행한 것으로 인식되었을 터다.

 

존슨 아저씨의 목에 걸려있는 숫자를 통해 자신의 삶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했던 모나는 암에 걸린 엄마가 있는, 그리고 이마에 꼬맨 자국이 생긴 자기 반의 여학생 리사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존슨아저씨와의 대화를 통해, 주변을 살피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살피고 바라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하다.

모나에게는 자신의 삶이었던 존슨 아저씨의 그날의 기분은, 사실 자신의 삶과는 어떠한 관계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리라.

 

그리고 아마도 모나는 삶을 행복으로 바꾸는 좁은 길의 입구를 발견한 듯 하다.

 

 

세상 만물은 마음에 달렸다는 말을 참 쉽게 한다.

하지만, 마음먹은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내 몸에 느껴지는 현상들이 마음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옛날부터 많은 철인들과 선인들은 마음을 자연으로 향하게 하는 법을 찾아 고심했나보다.

 

무한한 자연속에서, 나의 몸뚱아리는 작고 작은 것일뿐이고, 나의 고통과 불행 역시 작디 작은것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나의 고통과 불행은 작디 작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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