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이야기꾼들은 한 줄의 기록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연기자들이 평생 타인의 삶을 연기하며 살아간다면, 이야기꾼들은 평생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김탁환이라는 작가는 이야기꾼을 넘어 희대의 사기꾼이라 할 수도 있을터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둘을 찾아보기 힘든 탁월한 역사소설가이기 때문이다.

 

'불멸의 이순신 ' '방각본 살인사건 ' '리심' 에 이르기까지, 10년이 되지 않는 시간동안 약 50여권을 책을 냈다고 하니, 다작을 즐기는 일본의 작가들 못지 않다. 더 놀라운 점은 그 50권의 대부분이 역사소설이라는 것이다.

다른 장르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소설은 집필이 무척이나 까다로운 장르로 알려져 있다.

특히, 충무공 이순신등과 같은 너무나 익히 알려져 있는 인물을 다룰 땐 더더욱 그렇다.

실제 알려져 있는 역사기록과 인물의 인과관계가 톱니처럼 맞물리지 않는다면 역사소설로서의 가치를 잃고, 단순히 판타지 소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절찬리에 방영중인 선덕여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역사적 기록을 무시하고 인물간의 갈등을 위해 미실과 덕만을 동시대에 올려놓은 선덕여왕은 이미 역사 드라마로서의 가치를 잃었다.

 

어마어마한 자료속에서 상상력을 동원해 한 인물의 인생을 그려나간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어려우며, 그래서 더욱 많은 시간이 걸린다.

 

커피를 좋아하는 '따냐' 의 이야기는 고종의 독살미수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전작인 '리심' 에서, 리심이라는 여인은 자신의 인생을 단 한번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거대한 역사와 시간에 휘말려 그냥 떠내려갈 뿐이었다. 그녀는 딱 한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노서아 가비의 따냐 역시, 자신이 원치 않은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지만, 오히려 그 덕에 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다.

 

김탁환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리심의 망령을 떨쳐내듯, 진취적이고 활발한 여성상을 전면에 내세웠다.

정적이고 치밀한 문장을 버리고, 가볍고 듬성듬성한 문장을 선택함으로서 최대한 자신을 버렸다.

그럼으로서, 따냐는 좀 더 생명력을 얻고, 독자들은 상상의 여유를 얻어낼 수 있었다.

김탁환 작가가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달까? 파격적인 변신이지만, 자신의 장점과 특징을 최대한 죽인 그 자제력도 참 놀랍다.

(내년쯤  김탁환 작가가 위와 같은 동일한 제목이라던지, 약간 장난을 쳐서 '러시안 커피' 라는 제목으로 2~3권의 책이 나온다 해도 놀라지 않겠다.ㅋㅋ개인적으로는 보고 싶기도 하다.)

 

따냐의 삶은 커피처럼 고소한 향속에 온몸을 짜릿하게 하는 씁쓸한 맛이 베어있다.

때론 우유를 넣은 듯 부드러운 순간도, 생크림을 넣은 듯 달달한 순간도 있었지만, 커피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향과 맛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그래서 더 짙은 여운을 남긴다.

 

따냐와 그녀의 남자 이반. 그리고 조선 최후의 왕이었던 고종. 이 셋 모두 짙은 커피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펼쳐낸 김탁환 작가 역시 커피같다. 그는 결국 무책임하게 모든 걸 독자들에게 던져버렸다. ^^

 

이반은 정말 따냐를 사랑했을까? 그리고, 따냐는 정말 이반의 사랑을 믿었을까?

이반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불친절하기 그지 없지만, 한편으로는 고맙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작가가 독자들을 위해 컵에 담아 내민 커피와도 같다.

 

 

문득,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나를 독살하려는 것이냐!' 고 외쳤던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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