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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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은 1945년 1월 루마니아에서 시작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1944년 6월6일 이었다.

사실상 전쟁의 7부능선으로 히틀러 '최후의 도박'으로도 불리우는 '벌지 대전투'가 45년 1월에 있었고, 소련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바르샤바를 해방함으로써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실상이 최초로 목격된다.

이후, 45년 2월 14일에 커트 보니것의 [제 5 도살장]에 등장하는 독일 드레스덴이 폭격이 감행되고, 3월 19일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스스로 본토를 파괴하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 이 실행된다. 수용소에 간신히 살아있던 유태인들은은 대부분 이 시기에 학살당했다.

 4월 13일, 소련군이 오스트리아 빈을 해방하고, 16일 베를린 포위작전이 개시된다. 

4월 28일, 이탈리아를 탈출하려던 무솔리니가 잡혀 총살당하고, 30일, 결국 히틀러가 자살, 같은 날 독일 제국 의사당이 소련군에 점령당한다. 

5월 5일에 영국군이 덴마크를 탈환하고, 7일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9일에 동부전선에서 소련에게 항복함으로써 독일은 패망한다. 

 아직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미국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식하기까지는 아직 몇개월 더 남았지만, 유럽전선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이후 소련이 8월 8일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남북 분단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흐름을 조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서 연대표를 참조했다.



다시 시계는 45년 1월의 루마니아로 돌아간다.

열일곱살의 레오폴트는 뜬금없이 소련의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게 된다. 

레오폴트는 고향 기차역에서 약 300여명의 사람들과 화물칸을 개조한듯한 열차에 실려 함께 12일인가 13일인가를 달려 수용소에 도착한다. 프리모 레비가 묘사했던 유태인 수송 열차정도는 아니었고, 최소한의 인간다움은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고통과 절망, 그리고 배고픔의 시간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터였다. 


 마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수용소에 대한 작품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감생활에 대한 작품들은 하나의 장르라고 무방할 정도로 많고 많다.

나 역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를 반도 못 읽고 포기한 이후, 수용소의 '수' 자만 있어도 피하고 피해왔지만, 역사 장르 자체에 관심이 많다보니 어느덧, 대강 주워섬길 정도로 읽어보긴 했더라. 

추리소설을 읽으며 존속살인극을 피할 수 없듯, 인류의 전쟁사를 읽으며 수용소물을 피할 수 없다.

제 1차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를 향한 길을 찾은 듯 했다. 제네바 조약을 통해 적국의 포로에 대한 정책, 가스사용 금지 등 전쟁동안에도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여러 룰들도 만들어졌다.

이념과 이론, 대화와 토론, 바야흐로 누구나 꿈꾸던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수면 아래에서 들끓는 수중화산과도 같은 것이었다. 잔잔한 표면은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찢어발겨졌다. 

반 유대주의와 반 공산주의. 그리고 제국주의를 등에 입은 파시즘은 나치와 만나 유럽을 뒤흔들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자는 제네바 조약은 적국의 민가를 초토화시키는 이른바 '전략폭격' 이라는 개념 아래 조각났고, 무차별 학살과 허울뿐인 포로 수용소들이 넘쳐났다. 

패배한 적국 병사들이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평화롭게 전장을 떠날 수 있는 시절은 이미 수십년 전에 끝났다지만, 전쟁터의 군인이 아닌 일반 도시의 민간인들을 타깃삼아 무차별로 파괴하고 학살하는 시대는 처음이었다. 

오직 특정 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앉을수도, 누울수도 없는 기차안에 꽉꽉 채워져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실려갔다. 서서 대소변을 보고, 서로의 무게에 짓눌려 선채로 질식해 죽어갔다. 

이는 마치 대항해시대 초기, 흑인들을 대륙으로 실어나르던 노예선과 다를바 없었다. 

이성과 이상, 철학과 사유의 시대에도 똑같이 일어났다. 


 이 작품은 여느 수감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수기 형식으로 쓰여졌다.

다만, 여느 수기들처럼 하루하루를 꼽아가며 기록된 형식은 아니고, 서사의 흐름은 일정하지만, 수용소에서 보고, 듣고, 겪고, 느끼는 실제적, 감정적 이미지들을 취사 선택해 정서를 확장해 나가는 형식이라, 수기보다는 수필의 느낌이 강하다. 

레오폴트가 처음 수용소에 도착해서, 기한 없는 수감과 강제노역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통들이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기록되어있다. 

아침에 빵 몇백그램과 두번 나오는 양배추 수프, 사람을 석회조각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인 시멘트 공장 노역과 석탄의 찌꺼기인 슬래그를 처리하는 노역, 한벌씩밖에 주어지지 않는 옷, 속옷과 폐고무 타이어에 노끈을 묶어 만든 신발 등등... 

'인간다움' 이란 없고, 오직 노동하는 동물. 이전에 죽어간 수많은 강제 수용인들의 전례를 통한 노하우로, 최소한의 노력과 비용으로 '죽지는 않는 상태' 를 유지하며 기한 없는 노동을 하는 동물들. 

성욕은 물론, 수면욕조차 이겨내는 극심한 굶주림 안에서 사람은 사람일 수 없다.

노동의 내용이나 강도, 수용소의 생활들은 실제 체험했던 이의 수기를 바탕으로 해서인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디테일히다. 베개 천을 이용하는 방법, 시멘트 노동이나 슬래그 노동의 방식과 형식, 수용소 내부에서 제공되는 음식의 양과 질, 그것들을 아끼고 아껴 하루를 버티는 방법,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거나, 상처를 이겨내는 방법, 이를 잡는 방법, 하물며 함께 끌려온 부부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실망하고, 죽어가고, 극복하는 내용 등등, 실제 경험하지 못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반면, 이런 끔찍하고 디테일한 상황들을 묘사하는 단어나 표현, 문장들은 지극히 아름답고 시적이다. 

끝없는 굶주림은 '배고픈 천사' 로, 피골이 상접해 앙상하게 마른 현실은 '뼈와가죽의시간' 으로, 그 어떤 감정도 없이 오직 굶주림만을 느끼는 현재의 상태는 '절대영도' 로 묘사한다. 비쩍 마른 얼굴에서 '흰 토끼' 를 보고, 까만 입 안에서 혼자 번득이는 아랫 이빨을 '석영' 으로 본다. 

살기위해 쉬는 숨, 입 안을 들락날락 하는 호흡은 '숨그네' 로, 그 와중에도 삽질하는 순간만큼은 고된 육체노동이라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수 있기에, 쉼 없이 들썩이는 삽을 '심장삽' 이라 표현한다. 한순간 리듬을 잃으면, 바로 엄청난 허기가 밀려오고, 그 고통을 죽고싶을 정도다. 그렇게 뼈와 가죽만 남아 심장삽으로 움직이는 스스로를 '구조바꿈' 이 일어났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숨그네' 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가쁜 호흡을 반복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하루하루가 고되지만, 삶을, 어떻게든, 붙들고 있다. 오직, 살고있을 뿐이다. 살아남을 뿐이다.

과연,

이들을 살아남게 하는 힘은 뭘까. 

언젠가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일까, 언제든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절망일까? 


 이런 수감기들을 읽다보면, 낙관적인 사람보다 비관적인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 더 높다는 내용도 함께 읽을 수 있다. 

그러고보니, 이 작품 속 화자인 레오폴트도 기본적으로 무덤덤하고, 회의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언제 돌아갈 수 있나요' 보다는, '돌아가지 못하고 죽을거야' 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이다.

밤중에 끌려나가면, 총살당하리라 생각한다.

그러고보면, 나도, 군대갈 때, 영원히 전역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나도 낙관론자이기보다는 회의론자에 가까워서. 뭐든, 되리라기보다는 안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더 준비하고, 더 노력하고, 결과에 덜 상처받고, 덜 절망하기도 한다. 물론, 성취시의 만족감도 두배이기도 하고. 

(뭐 그렇다고 나도 그런 곳에서 버틸 수 있으리라는 뜻은 아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노역이란, 얼마나 큰 고통일까.

새삼 끝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죽음보다 죽음 뒤 영원하다는 사후의 영생에 대해 공황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끝이 없이 영원하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지금 이 글을 쓴 순간에도 숨이 막히며, 심장이 조여든다.

때문에, 내가 기약없는 노동의 괴로움을 더 끔찍하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기약없는 수용생활은 그때문에 더 정신적으로도 괴로웠을 것이다.

이들은 삶 속에서 즐거움이나 쾌락을 희구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들을 충족시킬 수 없기도 하지만, 반복적이고 기계적이며 동물적인 노동으로 인해 감정이 거의 메말라 있다. 살아 숨쉬는 모든 순간, 1분 1초가 매번 배고팠을터다. 그리고, 이 고통은 끝나지 않고,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다. 그런 공간이라면, 감정은 없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레오폴트가 끊임없이 되뇌었던 '1삽질 = 빵 1그램'은 배고픈 1분 1초를 버티기 위해 고안한 일종의 주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강제노역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왔지만, 어느날 갑자기 해방됐다.

레오폴트는 정확히 5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수용소 인근에 러시아의 새로운 민가가 조성되고, 수감자들은 임금을 받게 된다. 

레오폴트가 수감되어 있던 수용소에서는 그동안 약 300여명이 죽었다. 레오폴트가 고향 기차역에 모였을 때의 사람 숫자와 비슷하다.

전반적인 수용소의 규모가 적시되어 있지 않고, 기록상으로도 명확한 것은 없지만,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나 '수용소 군도' 등의 기록을 떠올려보면 많게는 수천~만여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시설도 있었던 것 같다.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 수용소는 '굴라크(굴락)' 라는 이름으로 대표될 정도로 유명한 시설이다. 넓은 러시아 대지의 불모의 땅을 개간하고, 강제로 정착시키기 위해 전쟁포로, 정치범  할 것 없이, 표류하던 외국인들조차도 무차별적으로 굴라크에 보냈고, 많은 수용자들은 수감기간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방도가 없어 인근 정착지에 눌러 앉았다고 한다. (이런 시설은 흐루시초프때부터 조금씩 사라졌다고 한다.)

레오폴트와 함께 수감되었던 많은 사람들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끌려온 나이도 꽤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5년이라는 기간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었을터다.

레오폴트가 고향으로 돌아가 편지를 받은 이발사 오스발트 예니에터는 고향에 돌아가니 아무도 없어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했다고 적었다. 특히 구직 적령기나 결혼 적령기에 끌려나갔던 사람들은 돌아간 뒤에도 막막했을것이다.

그래선지, 나는 수용소 안에서의 생활보다 복귀한 뒤의 생활들이 참 가슴 아프게 와닿았다.

아마 당시엔 그런 개념조차 없었을테지만, 레오폴트는 극심한 외상후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역시 그랬을터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10대에 떠났다가, 20대에 돌아왔다.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족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상처가 될까봐 쉽사리 묻지도 못했을터다.

레오폴트 역시, 쉽사리 그 시간들을 털어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음식에 대한 집착과, 노동에 대한 갈구. 

함께 수용소에 끌려갔던 동네 지인인 트루디 펠리칸과 마주쳤을 때엔, 가슴 깊은 곳에서 연민이 치솟았다. 

둘은 서로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을터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렸을까...

최근에 읽은 [제5도살장 ] 의 커트 보니것이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보후밀 흐라말 같은 작가들이 결국 정신병원이나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원인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사실, 나는 마흔을 코앞에 두고, 묘한 정서적 괴로움을 겪고 있다. 

형들이, 서른될 땐 별 감흥 없었는데, 마흔 될땐 미칠 것 같다고 그러더니, 진짜 그렇더라.

나는 언제나 서른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스물 될 때보다 서른 될때가 더 기뻤다.

하지만, 마흔 될 땐 정말, 실제로 내 현실이 서른 될때와 거의 다름이 없기에, 더 그런 것 같다.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찼던 30대는, 돌아보니 텅 비어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들을 보낸 레오폴트를 보며 괴로운 마음을 많이 다잡을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우주 안에서, 한 사람의 인생은 오직 그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법이다.

나의 배고픔도 나의 괴로움도, 기쁨도 욕망도 쾌락도 모두 오롯하게 나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다. 

어떻게든 삶을 붙들어나가는 이유는 오직 그뿐이다.

내가 죽는 순간, 이 세상이 나에게 무의미해지듯, 이 세상 역시 내가 무의미하다.

우주적인 관점에서도 동일하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우주가 나에게 중요한 것이지, 내가 죽는다면, 우주는 없는 것과 같다.

우주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삶은, 이 우주에, 이 지구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것이다. 

내가 무엇을 성취했건, 무엇을 성취하지 못했건, 오직 나 자신에게, 오로지 나 자신에게, 오롯히 나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을뿐이다.

무의미가 예정되어 있는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나갈 것인가. 

나의 숨그네는 무엇을 위해 흔들거리고, 나의 심장삽을 무엇을 위해 박자를 맞추고 있는가. 

'인간은 산다, 단 한번만 산다'

각자의 보물을 찾아.  







참조: 이 책을 읽다보니, 전쟁 말기 루마니아에서 소련으로 독일인들이 끌려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대체 어떤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을지,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드라큘라의 고향인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를 품고 있는 루마니아는 고대 로마의 속주였다가, 중세엔 헝가리아 왕국으로 시작해, 트란실바니아 왕국으로 분리되고, 근대엔 오스트리아-헝가리 공국이었다가 오스만 제국의 강성기, 오스만의 영향권이었던 몰도바와 몰도비아 왕국을 형성했던 왈라키야와 합쳐져 루마니아 왕국이 됐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기에 독립했고, 이후 1차 세계대전때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동맹군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었으나, 승전국으로 큰 영토를 얻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도중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면서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이 되었다가, 1989년에 민주화가 되었다. 

이 과정은 좀 복잡한데, 이 책에서는 일단 1~2차 세계대전 사이만 알면 되니까, 이정도에서 생략.... 


루마니아는 슬라브족이 대다수로, 남유럽과 동서유럽 사이에 절묘하게 위치한 국가지만, 아주 특이하게 라틴계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마, 아주 예전부터 로마의 주요한 속주들 중 하나였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한데, 가까운 몰도바와는 거의 같은 민족, 같은 언어로 한때 통일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한다.


루마니아는 2차 세계대전 초기엔 독일의 동맹국으로 소련을 공격했던 국가였다. 

1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국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때는 추축국의 일원으로 돌아선 과정이 궁금하긴 하지만, 역시 일단 넘어가기로...


 작가의 후기에도 등장하는 이온 안토네스쿠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루마니아 왕국의 파시즘 신봉자로 히틀러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던 정치가였다. (무솔리니와 많이 비슷하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 루마니아군은 전력을 거의 잃어, 소련군에 점령되던지, 끝까지 싸우다 패망할지의 기로에 놓이자, 사실상 실권이 없던 국왕 마히로 1세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안토네스쿠와 추축국파들을 숙청, 나치 독일과의 단교를 선언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변경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밀고와 수도인 부쿠레슈티를 함락하당고, 전쟁보상금 3억 달러와 10만명의 루마니아 노동자를 소련으로 파견하는 조건으로 휴전을 맺게 된다. (참고로 이온 안토네스쿠 치하의 루마니아는 반유대주의가 상당히 강력했다고 한다. 당시 약 28만~38만에 가까운 유태인들이 학살당했고, 서부전선에서 루마니아군의 유태인에 대한 횡포는 독일군도 놀랄 정도였다고. 안토네스쿠는 전범으로 분류되어 후에 공산정권으로 이양, 총살된다.)

루마니아는 소련과의 휴전 조건으로 10만명의 노동자를 뽑아서 보내야했는데, 아마도 순수한 자국민들보다 오스트리아인과 독일인 등 국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차출했던 것 같다. 

특히, 17세에서 45세 사이의 독일인들이 최우선으로 차출되었고, 17세의 레오폴트가 그 대상이 된 것이다.(저자인 헤르타 뮐러의 어머니도 그랬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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