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 중국사 5 : 춘추에서 전국까지 이중톈 중국사 5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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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춘추전국시대' 라고 뭉뚱그려 배웠던 기억이 있다. 

춘추와 전국은 우리도 열심히 외웠던 '하. 은. 주. 진. 한...' 중, '주' 에 속해있는 시기다.

진시황이 출현하기 전까지의 그 시간들은 '춘추전국시대' 라고 배웠다.

하지만, 춘추와 전국은 완전히 분리된 시대였다.

애초에 시대정신 자체가 달랐고, 국가의 개념 자체가 달랐다. 

주는 수도가 변한 시기에 따라 서주시대와 동주시대로 나뉘는데, 춘추와 전국은 동주에 속한다. 


우선, 춘추시대에는 한명의 왕과, 수많은 제후들이 있었다.

봉건사회였다. 이를 '방국邦國제도' 라 한다.

천자가 제후를 임명하고 영지를 하사한다. 제후는 대부를 임명해 영지를 다스렸다. 

즉, 천하를 여러개로 갈라 제후들에게 분봉했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국國'  방국이다. 제후들은 그 방국을 여러개로 갈라 대부들에게 분봉했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가家'. 채읍采邑 이다. 이것이 바로 봉건이었다.

봉건의 결과로 천하, 국, 가가 생겨났다.

가와 국이 합쳐진 것이 방국이며, 방국들이 합쳐진 것이 천하였다.

천자 자신도 하나의 방국을 갖고 있었는데, 가장 높은 등급의 방국, '왕국' 이었다.

나머지 방국들은 다스리는 제후의 작위에 따라 공公국, 후侯국, 백伯국, 자子국, 남男국 이었다. 

가신이 대부를 떠받들고, 대부가 제후를 떠받들며, 제후가 천자를 떠받든다.

춘추 시대엔 왕이 오직 한명이었다. 전국시대와 가장 큰 차이가 이것이다. 


봉건제는 모든 제후들이 힘이 대등해야하고 그 제후들을 다스리는 군주, 왕의 힘이 가장 강한 상태로 균형을 이루어야 유지되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방국들의 세력 균형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바로 이 시기에 철기 농기구가 발명, 보급됐다. 농지의 계획적인 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농경정책에 따라 지역별 채산성이 크게 달라졌다.   
독립채산 시스템이었던 방국들은 제후와 대부의 역량에 따라 경제력이 크게 차이나기 시작했고, 군사력과 결부되었다. 

공자가 쓴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 의 원년은 기원전 770년.  노魯 은공隱公 원년이다.

이 책에서는 정鄭 장공莊 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생모와, 동생과 왕권 다툼을 했던 이야기다. 이를 통해 춘추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대표적으로 알 수 있다. 

정 장공은 어머니와 동생의 쿠데타를 진압해냈지만, 전국 각지에서 군주 시해사건이 일어난다. 
위, 노, 송에서 차례로 내란이 일어났고, 이 나라의 군주들은 정 장공과 달리 유명을 달리했다. 


진은 이미 여러 갈래로 쪼개져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었고, 위, 노, 송은 내란으로 인해 내정이 피폐해 있었다.

반면, 정 장공은 어머니와 동생을 제압하고 강력한 권위를 손에 넣었, 주나라의 왕. 천하의 유일한 왕인 천자, 주 환왕은 상황을 오판했다.

정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주나라였지만, 주 환왕은 계속해서 정나라를 자극했다. 


결국 정 장공도 참지 못하고 제후로서의 예의를 지키지 않자, 주 환왕은 춘추시대 최초이자 최후의 친정을 감행했다.

진, 채, 위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기세좋게 정나라로 침공했지만, 오히려 정나라에게 대패하고 만다.   

그래도 이 시기엔 천자를 위하는 '척' 했다. '존왕양이' 의 기치를 내걸었고, 주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주 환왕에게 상처를 입혔던 정 장공은 그를 생포하기는 커녕,  후퇴하는 적을 쫓지 않고, 오히려 제신들을 보내 적군을 위문했다.

이것이 '화하', 즉, 문명국의 도리였다.

비록 전쟁을 치르긴 했으나 주나라와 정나라는 엄연한 군신관계. 군주에게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하게 해준 것이다. 

이 전쟁으로 시대가 크게 바뀌었다. 군주국가. 천자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춘추시대의 핵심은 제후들이 천자를 끼고 방국들을 호령하고자 하는 '패업' 이었다.

패업으로 나가는 길은 '패도', 패업을 이뤄낸 제후는 '패주' 였다. 
춘추는 패도와 패업, 패주의 시대였다. 


춘추에 기록된 약 370여년간 패업을 이룬 패주들은 한손에 꼽을 정도이다. 이를 '춘추오패' 라고 한다.

제 환공과 진 문공, 초 장왕은 어느 설에서도 빠진 적 없는 패주였고, [순자],[왕패] 등에서는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을 을 더하고, [풍속통], [오백] 에서는 송 양공, 진 목공 을 더한다. 역대로 다양한 견해가 있어왔다고 한다.

이중톈은 이러한 경향을 '삼황, 오제, 삼왕, 오패, 이런식으로 3과 5의 짝을 맞추려는' 다소 억지스런 견해라고 주장한다. 

송 양공은 명예에 금이 가고, 결국 전쟁터에서 부상당해 죽은 인물이고, 오왕 합려와 월왕 구천은 춘추시대 말기에 활약한데다 지방에 치우쳐 있었기에 제 환공과 진 문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엔 적잖은 간극이 있다. 
수십년에 달한다. 적은 간극이 아니다. 로마 공화정의 전환기랄 수 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서부터 카이사르의 죽음까지는 고작 70년에 불과했으니.  다만, 사료가 부족하여 그 사이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중톈은 춘추 시대를 "팔씨름으로 영역 다툼을 하고 동생이 많은 자가 큰형님이 되는 식" 이라고 표현했다.

패업과 패주에 대한 가장 재미있고도 간명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춘추 시대의 전쟁은 스포츠 경기와 흡사해서 외교적인 예의와 게임의 규칙을 중시했다." 
사신을 죽이지 않고, 부상자를 제외시키고, 상대가 진용을 갖추기 전에 공격하지 않고, 도망치는 상대를 쫓지 않고, 나이많은 병사는 포로로 붙잡지 않고 풀어줬다고 한다. 제후들의 전쟁은 힘을 과시하여 다른 방국들을 '동생으로' 삼는 것이었다. 많은 동생을 거느린 큰 형님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연히 대규모의 양민 학살은 커녕, 궤멸수준의 군인 학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전쟁의 목적이 부를 약탈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춘추 시대 초기엔 가장 비열한 짓으로 여겨지던 행위였다. 이런 식의 과시는 패업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패주로 인정받지 못했다. 비열한 군주는 비열한 부하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으나, 춘추 시대 말기에 이르러 100여개에 달하던 나라들이 20여개로 줄어들었다. 전국 시대로 가는 과정이었다. 대국들이 소국들에 독립권을 주고 단순히 '관리' 하던 시기는 지났다. 그야말로 약육강식. 약한 국가는 강한 국가에 먹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저자는 국가의 형태는 오직 두가지라고 봤다. 

하나의 도시를 거점으로 삼은 '도시국가'와 여러개의 도시를 거느린 '영토국가'다.

이 관점에서 "춘추시대는 도시국가와 영토국가가 병존하던 시기였다."

패권국들은 영토국가였고, 나중에 그들에 병합된 소국들은 도시국가였다. 

하지만, 전국시대엔 그런 소국들이 없었다.

대국들이 작은 도시국가들 뿐 아니라 중간 크기의 영토국가를 합병하거나 위성국가로 거느렸다. 정나라는 한나라에게 멸망당하고, 위나라는 꼭두각시 국가가 되었다. 

화하에 속하지 않았던 '만이' 의 국가였던 초나라는 동주 시대에 이미 왕이라고 칭했지만, 전국 시대에 접어들자 북방의 나라들이 줄줄이 왕이라 칭했다. 결국 전국 시대가 3분의 1쯤 경과하자 공국 전체가 왕국이 되었다. 

  이제 천자의 제후국, 방국이 아니라 독립 왕국이 되었다. 

주나라는 쇠퇴를 거듭해 두개의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더이상 왕이라 칭하지도 못했다. 만이였던 초나라는 존왕양이조차 관심이 없었다.  

봉건제도 혹은 방국제도가 해체됐고, 천자가 제후를 봉하는일은 통용되지 않았다. 제후들이 스스로 정벌했고, 그 자체로 예악의 붕괴였다. 국제 질서는 무너졌고, 게임의 규칙 역시 무너졌다.  

주나라와 '왕실'이 무너졌고, 진나라의 '공실'(군주의 일가)이 와해되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존왕양이' 를 말했다. 

모두가 왕인 것은 왕이 없는 것과 같았다. 한 명의 왕. 천자가 남을 때까지 왕들은 전쟁을 계속 할 수 밖에 없다.

'존왕' 을 위한 유일한 왕이 되어야만 했다.


진나라의 상앙은 평소 교분이 있었던 위나라군의 총사령관 공자 앙을 친구의 이름으로 연회에 초대하여 사로잡고, 위나라군을 기습해 크게 승리했다. 이 전쟁으로 위나라는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도시국가 수준으로 작아졌다. 

이렇듯, 전국 시대는 음모와 배신, 하극상의 시대였다. 
예악은 물론, 도덕도 무너졌다.

'전쟁은 속임수' 라는 말이 당연하게 쓰였다. 

이웃나라보다 강해야 했다. 강해져서, 먹어 치워야 했다.
 오직 군사력만이 국력의 바로미터였다.

군사력- 즉, 군량미와 병력을 안정적으로 생산해낼 제도가 필요했다. 
이것은 춘추시대 초기부터 활발하게 논의되었는데, 우리도 너무나 잘 아는 '관중과 포숙아' 의 그 관중이 춘추시대의 초기에 '행정 관리' 의 개념을 정립했다면, 전국 시대에는 '상앙' 이 있었다.
 

저자는 상앙의 개혁에서부터 중앙집권체제와 군국주의의 뿌리를 읽어낸다. 

위나라 출신의 상앙이 진나라에서 행한 개혁은 경제와 군사를 포괄하는 전면적인 계획이었다.

진 효공은 상앙과 면담을 한 뒤, 그를 파격적으로 중용했다.

전국시대는 또한 말과 정치의 시대이기도 했다. 
맹상군 같은 이가 수많은 식객들을 거느렸고, 뜻 있는 식객들이 왕들을 찾아 떠돌았다.

이름난 천재들이 왕들로부터 구애를 받았다. 패도의 시대. 출신도, 신분도 상관없었다. 능력만 있으면 어디서든 중용될 수 있었다.


상앙은 엄격한 법치주의를 표방했다. 

"상앙이 재상이 되어 처음으로 반포한 법령은 '보갑제保甲制' 와 연좌법의 시행이었다.  

상앙은 가구를 기준으로 서민들을 편성하여 5가구를 보保로 삼고 10가구를 상호 연결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죄를 지어도 전체에게 연대 책임을 물었으므로 이웃들은 즉시 정부에 보고해야 했다.

고발하지 않은 자는 허리가 잘렸고 범죄자를 은닉해준 자는 적에게 투항한 자와 똑같이 취급했으며 고발자는 사형당한 자들의 수급 숫자에 따라 상을 받았다. 진나라에서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는 사람이 없고 산에서 도적이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이웃이 이웃을 고발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이 시기의 진나라를 나치 독일과 비교한다. 

진나라 전체를 병영으로 나아가 감옥으로 만들었다. 사회에 남아도는 무력을 집중시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상앙이 길러낸 자들은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살인기계였을 것이다. 

상앙 자신도 기록에 의하면 700여 명을 사형시킨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저자는 '위 기록이 신빙성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전혀 근거가 없거나 과장됐다고 증명해줄 이도 없다' 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앙이 철혈재상' 이었던 것만은 확실할 것이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과거의 기록들을 접근한다. 


 이 책은 저자 후기에도 '정말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어디부터 어떻게, 무엇을 기준으로 덜어내야 하는가.

이중톈 중국사 시리즈의 강점은 철저한 사료 중심의 서술이다.

수많은 대중들에게 강연한 이력답게 그의 글은 담백하고 간결하다. 너무너무 쉽다.

대중들의 언어로, 대중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설명한다.

그리고, 언제나 기록을 설명할 땐 둘 이상의 사료를 비교하고, 그로 인해 도출해낸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구분한다. 


역사에 진실이 있는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있다' 또는 '없다' 고 명확히 말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명확히 존재한다.

예를들어, 어떠한 구체적 사건의 경우엔 여러 기록들을 교차 검증하여 '일어났다' 고 명확히 이야기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 이라는 영화처럼 말이다. 

황옥이란 인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록' 에 비춰도 명확히 단정지을 수 없잖은가.

사람의 행동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록들을 통해 공백을 합리적으로 '추론'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은?  기록에 드러난 인물들의 행동을 바탕으로 '추론' 할 뿐이다. 추론을 바탕으로 기록을 검증하고, 기록을 바탕으로 추론을 검증한다. 역사 기록은 컨텍스트 없이 텍스트를 받아들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각 권의 후미에 실린 저자 후기와 역자 후기를 읽는 즐거움이 쏠쏠한 이유이다.

저자와 역자들의 고뇌가 짧지만 풍성하게 실려있다.

사실 저자가 속내를 드러내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훌륭한 역사책은 역사관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영혼이다.

역사적 식견도 없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뼈대다.

또한 사료와 역사적 감수성도 없어서는 안 되는데 그것들은 각기 피와 살, 그리고 분위기에 해당한다.

분위기가 없으면 매력이 없으므로 역사가 수술대 위의 미라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역사적 감수성은 당연히 공감을 통해 얻어지지만 한 가지 기법도 필요하다. 그것은 현장의 환원이다.

현장을 환원해야만 당시 상황을 추체험할 수 있고 당시 상황을 추체험해야만 공감이 강화된다. 

바로 이것이 본서를 무미건조한 줄거리 요약이 아닌, 생생하고 감동적인 텍스트로 만들어준다."

p. 252  저자후기 

 

 

그래, 사실 나는 상앙이 만든. 

결국 거열형에 쳐해지고 마는 상앙이 토대를 닦은 진나라의 통일 과정을 보고싶었다.

(7권 진시황의 천하)


다음 권은 6권. '백가쟁명' 이다.

나는 춘추, 전국 시대를 읽으면서 양차 대전을 겪은 유럽의 철학자들을 떠올렸다.

이성이 인류의 기본이자 본성이며, 끊임없이 인간의 삶을 진보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대. 

하지만, 그 이성이 수만의 젊은이들을 떨어지는 폭탄 아래로 밀어넣는 것을 1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은 시대. 

춘추시대는 그보다 훨씬 전에 인간의 기본 도리라 여겼던 예악과 도덕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한 시대였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탄생했다. 

공자, 맹자, 순자, 묵자, 노자, 한비.


자, 이제 [춘추에서 전국까지]를 통해 예악과 도덕이 무너지고 천하가 무너지는 과정을 봤다.

다음은 그 안에서 예악과 도덕을 살리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학자들. 무너진 천하를 돌이키고자 하는 이들.
그리고 새로운 규칙을 창조해내는 천재들을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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