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변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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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날만한 내용이 아닌데, 눈물이 날 것 같다.

히가시노게이고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 뵈는, 인체의 변화로 범죄에 말려들게 되는 식의 스토리를 많이 발표한다.

(난 여러가지 이유로 해마와 전두엽기능이 많이 떨어지는 인간이라 간간히 진지하게 헛소리를 할 확률이 높다는 걸 미리 밝히며.)

대표적으로 ’인어가 잠든 집‘을 읽고서 느낀 전율은 몇 년이 지나도록 가시지 않았고, ‘아름다운 흉기’에서의 역한 발상은 나같이 머릿속에 지우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각인을 주었다.

그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정도로 그의 작품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특이한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문맥의 한계점을 슬쩍 뛰어넘고는 한다.

그러고보면 소설의 후기라던가 산문집같은 것들을 읽었을 때 느낀점인데, 게이고는 최신 과학의 동향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찬찬히 읽다보면 똑똑한 사람이 방대한 지식을 가질 때 흔히(? 보여주는 지혜로운 예견들을 접할 수가 있다.

-
이 책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뇌를 이식받는다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서론 부분을 읽어나가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히가시노의 소설은 대부분 그렇게 시작된다. 누가 범인인 줄은 알겠는데, 대체 어떻게?! 뭐 이런 식인 것이다.

솔직히 누구나 다 생각해 본- 특히 90년대 과학에 흥미가 있던 십대 학생이었다면 장난스럽게라도 떠올려봤을 법한 상활이다. 뇌이식.

스토리로 돌아가면, 주인공은 사고로 왼쪽 뇌를 잃고 다른 사람의 뇌를 이식받게 된다. 그 후로 기묘하게 자아를 잃어가게 되고 결국 필사적으로 그 이유를 파헤쳐간다는 스릴러물이다.

근래에 접한 뇌과학에 대한 지식으로 미뤄보면, 기억은 대뇌 피질에서 일어나는 전자극 현상에 의해 유지되고 상기되고 희미해지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면 주인공의 머리에 이식된 반쪽의 뇌는 다른 사람의 메모리가 유지된 채 자리를 잡은 것이고 플러그가 꽂히는 순간 기억들이 되살아나서 본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진짜 공감이 되는 얘기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이 되었다.
(근데, 그런거라면 반쪽의 뇌를 이식하기 전에 전류를 흘려보내 메모리를 리셋하고 이식하면 되는 게 아닐까?
뭐 말처럼 쉬운 건 아니겠지만.)

히가시노게이고에게 경의를 표하는 지점은 이런 오래된 상상을 끄집어내어 아주 구체적인 서사로 이끌고 나아간다는 점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떨까? 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래서 이게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그래서 그렇게 흘러가기 시작해서... 하는 막힘없이 집요하고 생생한 상상은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읽으면서 그런 뇌수술을 받는다면 어떨까도 상상해 보았다.
매일하는 요가로 혹은 종교적인 믿음으로, 심리치료로 떠오르는 것들을 최대한 다스릴 수 있을까?

사실 주인공의 어릴 적 서사를 보면, 모든 사건의 원인이 뇌이식에만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를 넌지시 비춘다.
그냥 인성이 흔들리는 것만으로 인간 저변의 모든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고, 인격이 크게 변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신후 우울증세를 겪으며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것 역시 상상으로 공감을 해 보았다.

주인공의 이성이 조금만 살아있었더라도 여러 선택의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의사들(물론 생체실험도구로 보는 면이 읶었지만, 결국 의지할 곳은 자명했다), 헌신적으로 돌봐주려는 돈 많은 변호사, 지고지순한 여자친구.
하지만 그는 가장 감정적이고 동물적인 감각을 따라 최악으로 치닫는다.
가끔 소설의 플롯일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이입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듯.

이래저래 연민이 올라왔던 이유였던 듯.

뇌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였지만 피곤해서 진지한 퇴고는 힘들 것 같다.

언제나처럼 히가시노게이고의 책의 별점은 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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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4-09-0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이상해서 다시 찾아보니 1991년 작품이다. 말도 안돼.
변신의 개정판. 원제 변신.

그나저나 히가시노게이고꺼 이름만 바꿔서 개정판 좀 그만내라! 최소한 이름이라도 좀 유지해주면 안되겠니? 안그래도 다작하는 작가인데 헷갈려 죽겠네.
만약 그걸 노린 거라면 출판사들 진짜 못돼처먹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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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만든,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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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의 독서법 - 분열과 고립의 시대의 책읽기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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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소개한 책들을 잘 몰라도,
미치코 가쿠타니의 필력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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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현암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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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일리치가 12세기의 수도사로 추정되는 후고의 ‘디다스칼리콘’ 이란 책을 연구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하여 12세기를 기점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는 내용이다.

책 내용을 살펴보면,
고대에서 중세의 중반기까지 지금 현 인류가 생각하는 ‘읽는다’ 개념은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게 타당한 듯 하다.
구전의 시대.

사람들은 암기를 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야했고, 지식층은 암기력을 발달시키기 위해 특별한 기술을 개발해야 했을 정도로 비상한 기억력이 요구되는 시절이었다.

라틴어라는 문자 체계는 지식층 정도만이 공유하는 언어였고, 그 특별함이 공고한 지배층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기에 유지되어 올 수 밖에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으로 환경적인 개선이 이루어진 다음엔(종이, 잉크, 인쇄술...) 편하게 쓸 abcd... 를 능가할 글자는 없었고, 종국엔 개나소나 다 글이란 걸 쓰게 되면서 사람들은 신의 생각만 읽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생각도존중받아(개나 소의 생각도) 책으로 엮어 읽는 체계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얘기.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꼽자면,
34쪽에 중세시대 양피지에 기록한 책(성경) 대한 묘사가 있다.
얇은 가죽에 손으로 꼭꼭 눌러 쓴 그림같은 글과 섬세한 삽화들이 빛을 통해 아름다운 입체로 반투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이 마치 눈에 잡힐듯이 선하게 느껴져서 감명을 받았다.

긴 두루마리에 띄어쓰기도 없고 두서도 구분도 없는 그냥 첨가첨가된 기록의 연속일 뿐인 중세 중기 이전의 글 무더기들은 책이라기 보담, 마치 음유시인들이 신의 목소리를 대신하듯 사제들이 음악처럼 줄줄 암송하여 깨쳐야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졌을 것이다.

한마디로 정보를 글로 정리하던 시대가 아니라 정보를 사사받은 개개인이 머릿속에 직접 정리를 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상상해보면 저자의 말처럼 눈 뿐만이 아니라 입, 귀, 감촉, 리듬감등 몸에 있는 온 감각을 동원하여 계속 상기하지 않으면 그 방대한 것들을 계속 외워서 끝까지 유지하기가 어려웠으리라.

작가는 위의 방식등을 적용시키는 수사적 책읽기를 ‘렉티오 디비나’(열성적 책읽기)로 얘기하며 이후의 학자적 책읽기와 구분을 하고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내가 책에 다가가서 동화되면 수사적읽기, 책을 가져와서 나에게 동화시키면 학자적 책읽기라고 이해를 해버렸는데... 수사적 책읽기에 대한 묘사는 마치 장자의 물아일체같은 것이려나 싶다.

좀 재밌었던 것 중에 하나가, 사제에게 묵언이란 개인적인 말을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입이라는 시발점이 되는 감각의 한 부분을 막아서 동시에 다른 것들까지 제어하여 종국엔 정진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계속 중얼거리는 사람들 중에서 혼자 입을 꼭 다물고 있어야 하다니. 마치 얼음 땡을 하다가 얼음에 걸린 모냥. 그 지고지순함을 상상하니 왠지 짠함이 있다.

이반일리치의 설명대로라면 후고는 두루마리 양피지 시대의 마지막 정리자이다.
백성들을 잘 다스릴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한글은 무시했던 조선 사대부들의 한자처럼, 양피지의 라틴어는 종국에 알파벳과 종이 인쇄술의 영향으로 저물어간다.
더불어 12세기 이후로 서양 현대의 읽기는 더이상 신의 목소리이자 삶에 합일 해야하는 가르침이 아니게 되었다.

이젠 머리속에 궁전을 만들어 암기를 하는 기술은 드라마의 주인공(셜록)정도는 되야 볼 수 있다. (방대한 걸 집어넣을 수 있는 암기 연습은 좀 멋져보이긴 하다. 근데 자폐같이 계속 중얼거려야하는 건 좀.)
현대에 사는 우리는 내가 이 독후감을 쓰듯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도구로 기록을 하고 날짜나 제목별로 색인을 하면 그만인 것이다.

현 인류는 갈수록 개개인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 처해지고 있다.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현대로 또 그 이후로...
문자 체계도 이용하는 방식도 어쩌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계속 변해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해지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부지불식간에 후고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특별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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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4-08-0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텍스트의 포도밭이 뭔가... 했는데, 수도원 얘기가 나오니 아-.
다 읽고나니 포도 덩쿨처럼 자유롭고 아름다운 중세시대의 손글씨가 떠오른다. 이랑에 정연하게 줄지어 있는 모습까지.
참 멋진 제목.
 

읽는 중인데, 이런 책을 읽을 때면 언-제나
항상
매번

이 안에서 소개하는 책들은 없다는 것.

우리나라 출판사는 뭐하는 곳 들이지?

우리나라가 선진국 뭐 그런 거 된다고 했던가...

아-
,
그래서 애들을 유치원때부터 영어를 가르치게 만드는 거야?

아마 계속 영어로 읽으면 영어로 생각하게 되겠지.
우리나라말의 우수성 좋아하시네.
나발-

계속 고급스럽게 써먹는 언어만 결국 고급스럽게 살아 남을거야.

왜 번역 안하냐고.
왜 낼모레 오십되는 나 어릴적이랑 달라진게 업ㄹ냐고.
초등학교 6학년때 시청 지라실에 있는 도서관에서 듬성하게 꽂힌 세로줄 책들을 보면서 소원을 빌었었지.
제발 책이 많은 도서관을 내려주세요-
근데 세상에,
드디어 좋은 시절이 왔어!
뮨제는
왜!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애기들 읽을 책만 넘쳐나고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도 읽을 책이 거지가 되냐고.

고전도 있는 것만 있어.
고퀄 전문 양서도 없어.

분야별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다 없어.

이런 책 번역 하면서 부끄럽지 않나?

이런 책들 말이야. 이런 석학들이 양서라고 소개하는 책들을 소개 할 때마다 번역할 마음이 드냐고.

책 앞머리에
‘영어나 일본어가 능숙한 사람만 참고해 주세요!’
뭐, 이런 거 필요한 거 아니냐고.

절대 돌베개만 까는 거 아니니까.
이런 좋은 책들 소개하는 분야별 전문가들은 널리고 깔렸고, 그거 번역하는 출판사들도 발에 밟히니까.

빈곤한 우물안의 한글에게 연민이 일어.
만들려면 욕 사전도 만들 수 있을 체계인데...
참 안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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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4-07-28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냥 개뿔만큼 읽는데, 아쥬 가끔 개뿔 중에도 연결해서 읽고 싶거나 골라 읽고 싶은 게 있을 수 있잖아-

뭐 나만 그런가 보지:-j

개뿔같은 책들만 나오고 또 좋- 다고 달려드는 거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