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 서사 읽기 힘들다면서 또 읽고 있네요.
살펴주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의 몸에서 뼈를 떼어내 다른 누군가를 만든다는 비유를 해야 한다면 엄마와 딸 사이여야 맞지 않나 생각했었다. 분신, 탈출, 조형, 감금2, 분화, 분리, 연속, 일체의 뼈.
“소피아, 당신 어머니의 마비를 육체적 취약성으로 착각하지 않아야 해요.” 201
걷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 거액의 대출까지 받아 스페인의 의사에게 치료를 받기로 결정하고 딸과 스페인에 온 로즈는 딸 소피아를 수족처럼 부린다. 손과 발이 어떤 의미로 차용되는지 떠올릴 것도 없이, 뜨거운 볕 아래서 엄마의 휠체어를 끄느라 애쓰는 소피를 여러번 반복해 보다 보면 나도 같이 소진되고 만다. 게다가 이 엄마는 다리가 아픈 건지 안 아픈 건지도 모르겠어. 어떤 땐 걷고, 어떤 땐 못 걷고, 마비라면서 다리에 파리가 내려앉은 것도 느낀다는데. 좋아하는 작가의 글에 별 수 없이 끌려들어가면서도 내가 이걸 정말 원하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내 대답도 비슷한 꼴이었다. 이런 내용인지 모르고 읽네요 마네요 중언부언할 뿐. 책 덮으면 될 거 아닌가.
그녀는 여전히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조피, 문제가 하나 있어요. 파블로의 개는 말로 다 표현 못 할 학대를 받았어요. 개는 자유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를 거예요. 온 마을을 헤집고 뛰어다니며 아기를 잡아먹으려 들걸요. 만일 당신이 사슬을 풀어주는 데 성공한다면 개를 산으로 데려가 미치도록 뛰어다니게 놔두세요. 개는 그 방식으로만 진정 자유로워질 거예요.”70
25살이 되도록 충실히 엄마의 욕구를 수행하는 소피가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많겠지. 언뜻 속내를 비추는 거 보면 박사과정 밟고 싶어하면서 당장은 카페 알바하는 처지니 진로를 숙고하는 게 시급할텐데 말이다. 엄마가 아닐 수는 있는데 딸이 아닐 수가 없고, 여자 둘은 곧 딸 둘이 되고 마는 공식. 배꼽이야 그냥 달고 살면 되지 뭔 이해가 필요하겠냐만 옳은 선택이라서가 아니라 흔히 본 케이스라서 알겠다. 엄마 때문에 포기할 수 있는 첫번째 자원이 자기 욕망인 딸들. 우선순위를 스스로에게 속여가면서 돌봄이라는 의무에 몸을 담가버리는 여자들.
스페인에 온 소피에게도 영 수확이 없는 건 아닌데 해안에서 해파리(메두사)에 쏘여 치료 받으면서 만나게 되는 간이 의무실의 후안, 자수를 놓으며 빈티지 의류를 수선하는 일을 하는 잉그리트라는 독일인과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잉그리트는 특히 각별한 사람인데 소피를 조피라 부른다. 발음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 잉게가 얼마나 소피에게 다른 세계의 사람일지 짐작이 간다. 이 독일 여자가 어떤 눈으로 어떤 목소리로 소피를 부르는지 왜 그때마다 소피 몸이 다는지 나도 알 것 같애.
어머니와 딸 단 둘 뿐이라는 폐쇄성에서 오는 강한 징후들이 책 전반에 낮게 깔려 있고, 그에 따라 서사가 (비유마저도) 진행이 된다. 소피의 섹슈얼리티가 로즈에 대항해서만 그려지는 게 분하고 짜증났다. 한계를 극복하는 사람의 기준점도 한계일 뿐인데. 자발적이지 않은 돌봄은 결국 피돌봄자가 돌봄자에게 저지르는 또다른 학대가 되는 걸까? 감내하든지 떠나든지 하라는 단 둘 이외의 선택지는 없을까.
욕실 바닥, 서늘한 타일에 납작하게 눕는다. 잉그리트는 재봉사이다. 바늘은 그녀의 마음이다. ‘머리 잘린’은 그녀가 나를 생각할 때 떠올린 단어이고,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검열되지 않은 단어, 실로 새긴 그 단어를 내게 주었다.
‘사랑받는’은 환각이었다.265
애초부터 이렇게 안 맞는 사람들인 것을 긴 시간 같은 지붕 아래서 복닥거리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게 가족이고, 어쩌구맘 저쩌구맘에서부터 무슨 둥지, 무슨무슨 독립, 무슨 증후군, 유치한 말도 거창한 분석도 많지만 정작 자식이 본인으로부터 모체를 어떻게 떼어낼 지는 미궁인 채다. 아직도 이해하면 자유로워질 거 같다는 생각으로 책이나 들입다 찾아 읽으니, 에지간히 지랄 맞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