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솜털이 햇빛에 비쳐 반짝거린다. 귓바퀴, 팔꿈치 위, 광대와 볼 라인을 따라 동그라니 줄지어 있다. 회색인지 하얀색인지도 모를 섬유, 얼핏 먼지처럼 보이는 것들이 균일하게 누운 그 천연덕스러운 모양새를, 본다. 분명 매일 보는 아이 몸의 일부인데 낯설다. 어제도 있었던가. 있는 줄도 모르고 함께 해온 시간을 일순 몽환의 영역으로 소환하면서 이제야 저를 발견했냐고 능청부리는 솜털을 보노라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 순간 뿐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게 자식에 대한 사랑이어도 내겐 그다지 순리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순리’라는 오명 자체가 그걸 설명할 수도 있을 거 같다고,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다. '내리사랑'은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어쩌면 자식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면, 사랑이고자 한다면, 응당 받는 자에게 제대로 가 닿지 않으면 안된다. 양육자인 나는 앞으로도 그 당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삽질 같은 괜한 생각을 사서 하는 것도 스스로를 사랑해 본 적 없다는 사실에서 연원함을 나는 육아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는 한때 작가의 소설을 좋아했다는 이웃님의 선물로 받았는데 그게 벌써 일년도 더 된 일이다. 이 얇은 책을 이제서야 읽은 스스로가 어이없게 느껴질 정도지만 핑계는 있다. 할머니 이야기라면, 내게는 읽기 전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읽다 보면 내 외할머니에 생각이 미칠 테고 할머니를 떠올리면 따라오는 감정의 파동을 버티려면 나도 안정적일 때 펼쳐야지, 생각했었다. 그렇게 둔 지 꽤 되었는데.. 안정은 개뿔, 안팎으로 시끄러운 요즘에야 읽기 시작하게 됐고 역시 ‘책 읽기’에는 내가 맞출 수 없는 맞춤한 때가 따로 있는 것도 같다.
할머니에 대한 회고록일 줄 알았던 소설가 심윤경의 에세이는 열어보니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읽혔다. 작가 본인이 그간 자녀를 양육하면서 할머니가 떠올랐던 순간들과 할머니의 그 모습에 견주어보며 스스로가 양육 뿐 아니라 삶의 태도를 다듬고 배워온 기록에 가까웠다. 작가의 할머님처럼 말 없이 지지를 보내고 가족을 편안하게 해주는 분은 아니었지만 나도 어렸을 때 외할머니에게 받은 절대적 사랑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정도의 사람 구실하기 어려웠을거라 생각하는지라 그 기제가 이해되었다. 할머니는 내가 이럴 때 어떻게 했었지? 어떻게 했었을까. 다만 내 경우엔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이 현실적 도움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상황과 시대가 다르고, 엄마/할머니라는 위치가 다르고, 무엇보다도 피양육자인 나와 아이가 다르니까. 다만 책과 함께 나의 할머니를 떠올리면서 마음이 시리면서도 편안해졌다. 또 울적해진 적도 있다. 나는 내 아이에게 할머니가 가까이에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작가도 비슷한 언급을 하는 부분이 있다.
"물론 꿀짱아에게는 나의 할머니만큼이나 너그럽고 따뜻한 조부모님이 네 분이나 있다. 나의 부모님들은 내가 어릴 때는 꽤나 엄격하고 까다로운 분들이었지만 손자녀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조부모님들이 되셨다. 하지만 그분들은 꿀짱아와 함께 살지 않는다. 한 집에 함께 살면서 순간순간 꿀짱아에게 한없는 관용과 지지를 베풀어주지 않는다. (...) 바로 그날 나의 육아에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꿀짱아에게 함께 사는 할머니가 없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거대한 빈 구멍을 내가 인식한 날이었다."162
그레타 거윅이 모든 딸/엄마의 가슴을 명중시킨 바 있듯이 (I know you love me, But do you LIKE me?, [레이디버드]) 자식이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일은, 좋아해지는(?) 것과 한참 다르다. '사랑받다'와 대칭하는 '좋다'의 수동형이 없다는 것도 새삼 놀랍네. 엄마란 딸을 사랑할 수만/사랑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 엄마를 대체 불가능한 위치로 만들고, 그렇기에 관계에서 가장 근본적인(파괴적인) 균열도 내고 그러는 걸까.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더 괴롭게 할 뿐인 경우를 얼마나 많이 겪고 보았나. 어렴풋이라도 알았으면서도, 다 몰랐다고는 못하는 내가 가족을 만들어버린 이상, 아이에 관해서는 특히 자식 본인이 수신할 수 있는 것만을 사랑이라고 정의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랬지만..
체득은 언제나 인식 위에 있다. 머릿속 정의대로 깔끔하게? 현실에선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동안도, 어제도, 오늘도. 나르시시스트 양육자가 되지 않는 것만을 목표로 했더니 그게 나를 더 옥죄는 한계가 될 줄이야. 지난 몇년은 육아 자체의 힘듦보다도 내가 왜 힘든지를 알아내는 과정만으로도 지난한 시간이었다. 최근 쉽게 잠들지 못해 유튜브를 방황하며 본 동물원의 판다육아일지. 내가 얻은 위안의 정체는 어쩌면 사랑스러운 판다가 아니라 분열없는 온전한 기쁨으로 판다를 돌보는 중년 남성들에 대한 대리만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도 그런 분열감을 언급한다.
"이전에 살았던 세계는 학교, 직장, 문화, 친구, 성취와 우정의 세계였다. 모두 두 글자 이상이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세계는 쉬, 똥, 침, 코, 토, 잠, 젖, 신기하도록 모두 한 글자였다. 아마 생명과 양육 활동이 그토록 근원적인 것임을 언어로서도 상징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나는 그것이 신기하면서도 거북했다. 좀 더 고차원적인 것, 언어와 문자로 이루어지는 활동, 교육받은 성인과 함께하는 대화를 목마르게 그리워했다. 먹고 자고 싸고 놀고 우는 것은 나의 삶이 아닌 것 같았다."
"나의 삶이 아닌 것 같은" 세계에서 아직도 헤매는 내게 숨돌릴 구석을 만들어주는 책이었으며, 또한 양육서이기도 하다. 읽는 이가 얻고자 하는 것이 "어떠어떠한 아이 만들기"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양육서라고 한다면 이 책은 그 분류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내 경우엔, 양육자인 독자가 아이뿐 아니라 스스로를 들여다 보게 해주는 책이 좋은 양육서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은 것이 꽤 도움이 되었다.
책에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꽤 있다. 도대체가 변덕스러우면서도 그 나름으로는 잘 돌아가는, 사춘기 딸과의 하루를 함께 하는 에피소드에서도 소리내 웃었었다. 남일이 아니라는 두려움이 앞섰는데도 웃음은 새어나왔다. 그 딸이 아기였을 때 일화 중에서는 아가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할지 그렇게 어려워하다가 놀이터에서 초보 견주인 이웃이 잘 다루지 못하는 개를 만나 자기 식구처럼 우레탄 바닥에서 뒹굴고 나서야 어느 정도 육아에서의 깨달음(!)이 왔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 기억 속에서 할머니를 꺼내 먼지를 털고, 당신의 방으로 들어가 추억을 곱씹어보면서 현실을 지나보낼 동력을 얻고, 때로는 성찰에도 이르렀다는 고백이 책에 가득한데, 그래서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까다롭기 그지 없고 동네에서 무섭기로 유명했던 나의 외할머니 또한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가 아닌가 생각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책을 읽는 다른 이들도 "나의 아름다운" 누군가, 무엇, 혹은 어디를 소환하며 바로 여기 있었네, 왜 몰랐지, 나처럼 뒤늦게 웃음짓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