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들이 쿵쿵거리고 다니면서 총으로 의자들을 넘어뜨린다. 빨리빨리 나는 갑자기 엄마에게 화가 난다. 엄마는 나를 구하기 전에 클라라 언니를 먼저 구할 것이다. 엄마는 어둠 속에서 내 손을 잡아주는대신 식료품 찬장을 뒤질 것이다. 나는 나만의 다정함, 행운을 스스로찾아야만 할 것이다. 4월의 컴컴한 새벽이 주는 한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얇은 푸른색 실크드레스를 입는다. 에릭이 내게 입 맞췄을 때 입었던 옷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드레스의 주름을 매만진다. 그러고선 가느다란 푸른색 스웨이드 벨트를 묶는다. 나는 에릭의 팔이 다시 한번 더 나를 감아 안을 수 있도록 이 드레스를 입는다. 이 드레스는 나를 호감으로 보이게 할 것이고 보호해줄 것이고 사랑을 되찾을 준비가 되어 있게 해줄 것이다. 만약 내가 몸을 떤다면 그것은 희망의 징표일 것이고 더 깊고 더 나은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의 신호일 것이다.
나는 에릭과 에릭의 가족이 어둠 속에서 옷을 입고 재빨리 움직이는모습을 그려본다. 그가 나를 생각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귀에서부터 발끝까지 에너지의 전류가 찌르르 흐른다. 나는 두 눈을 감고서 양손으로 양 팔꿈치를 받치고서 사랑과 희망의 섬광이 남긴 잔광이 나를계속 따뜻하게 해주기를 기대한다. - P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엿새째 오후 네시에 그의 단식은 "그들의 입에서 잘못을 시인하는 한마디의말도 끌어내지 못한 완패"로서의 종말을 맞이한다. 그는 매일 당하는 강제급식이라는 ‘융단폭격‘ 앞에 견디지 못하여 ‘무조건 항복의 백기‘를 내걸고 단식을 중단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자위한다.
"짐승과 싸우는 데 단식투쟁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방법이다."
노신(魯迅)이 봉건적 질곡 아래 짓눌린 인간성의 전형으로서 창조한 인물 아큐(JQ)가 명백한 현실적 패배에 부딪힐 때마다 늘상 비방처럼 애용하던 ‘정신적 승리‘를 통한 탈출의 광경이 여기에서 너무나도 흡사한 모습으로 재현되고있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실로 참담한 감회를 가눌 길이 없다. 우리가 과연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거듭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 곳곳의 수감장소에서 밥을 굶으며 차디찬 벽을 향하고 앉아 있는 우리 젊은이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그보다 더 혹심한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극악한 인간적 상황에 내몰려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면벽고행도 面苦行圖)는 우리 시대의 가장 깊숙한 어둠, 가장 쓰라린 치욕, 가장 비통한 고뇌를 보여주는 축도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상황인 것이며 더이상 한시라도 방치되거나 외면되어서는 안 될 절박한 문제인 것이다. - P70

근대 이전 이러한 시대에는 국가가 죄수를 장기간 비싼 밥을 먹여주어가며 일정장소에 가두어놓을 필요가 있으리라고는 거의 상상되지 않았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조말까지만 해도 생명형 (死刑), 태장형 (笞杖刑) 및 유형(流刑) 제도가 형벌제도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으며, 옥 (獄) 이란 것은 형의 집행을 위해 죄수를 일시적으로 구금하기 위한 소박한 고전적 수용제도로서밖에 활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근대 인권사상의 대두와 함께 과거의 형벌사상에 근본적 반성이 제기되었다. 죄수의 육신에 직접적으로 겨누어진 잔학행위로서의 체형은 "형집행자를 범죄자와 방불하게, 재판관을 살인자와 방불하게 만드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범인을 동정과 존경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비판에 봉착하였다. 교육형주의의 주창자인 베카리아는 1764년에 간행된 그의 명저 「범죄와 형벌」에서 중세적인 사형제도를 일컬어 "끔찍한 범죄로서 비난한바로 그 살인행위를 (국가가) 냉혈하고 비정한 모습으로 되풀이하는 짓"이라고격렬히 비난하였다.
그리하여 형벌에 있어서의 야만성을 지양하기 위한 새로운 원리가 고안되었다. 레옹 포셰라는 사람은 1765년에 죄수의 교정 · 교화에 역점을 둔 ‘파리 청소년수용소의 규칙‘을 초안하였고, 마블리라는 사람은 새로운 형벌원리로서
"형벌은 .. 죄수의 신체가 아니라 영혼을 타격하여야 한다"라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 P71

사상·표현의 자유, 보도의 자유라는 요청과 프라이버시의 보호라는 요청이 서로 충돌할 때 어느 선에서 조화를 모색할 것인가? 이 점에 관하여 판례법은두 가지 원칙을 발전시켜왔는데 이 두 가지 원칙은 왕왕 중복된 형태로 논의되고 있다.
그 하나는 ‘공공의 이익‘의 원칙인데 이것은 어떤 보도 또는 그에 준하는 활동이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인 국민의 ‘알 권리‘에 봉사하는 것일 경우에는 프라이버시 침해의 면책사유가 될 수 있다는 원칙이다.
또 한 가지는 ‘저명인‘ (public figure, public character or public personage)의 원칙인데 이에 의하면 어떤 기사 또는 묘사에 의하여 프라이버시의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 기사 이전에 이미 사회 일반인으로부터 마땅히 주시받고 알려져야 할 ‘저명인‘이었던 경우에는 그 기사 또는 묘사가 면책될수 있다고 한다. 예컨대 이름없는 한 회사원의 사생활의 비밀에 관한 보도는프라이버시 침해가 될 수 있지만 에드워드 케네디와 그 여비서와의 사적 관계에관한 폭로기사는 프라이버시 침해로부터 면책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업적, 명성이나 생활방법에 의해 또는 자기의 행위나 성격에 대해 공중의 흥미를 끌기에 마땅한 직업을 선택한 자는 저명인이 되는 것이며 그리하여 자기가 가진 프라이버시의 권리의 일부를 잃는 것이다."
이것은 코헨 대 막스 사건에서 매콤 판사가 내린 유명한 정의이다 - P85

요컨대 구체적인 경우에 과연 어느 정도까지 ‘보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생활의 비밀에 파고드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가를 결정함에는 매우 복잡다기한 요인들을 비교형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보도는 ‘공공의 이익‘에 합치하는가? 그 대상인물의 사회적 지위는 얼마나 ‘공적‘인가? 그것은 "보도인가 아니면 사생활에의 부당한 침입인가? 대상인물의 생활태도는 윤리적인가? 그와 대비하여 보도하는 측의 행위는 비윤리성을 현저히 띠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부천서사건의 피해자인 권양의 이름과 사진을 게재한 일부신문의 보도가 과연 타당한 것이었는지, 손을 내젓는 사람들의 얼굴에 억지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방영을 하는 「추적 60분」등의 TV보도가 과연 온당한 것인지 하는 문제들이 진지하게 재검토되었으면 한다.
(신문과 방송, 1986.9) - P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와같은 충격과 항의와 관심은 요컨대 첫째로, 원판결이 미혼여성 회사원인 원고 이경숙이 25세에 달하면 결혼하여 퇴직한다는 예상을 전제로 하여 배상액을 산정한 것은 사법부에 의한 결혼퇴직제의 정당화에 귀착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 및 둘째로, 법원이 주부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서 하필이면 ‘최하위 생계유지노동‘인 도시여성 일용임금 일당 4천원을 산정 기초로 삼았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의구심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 관하여 성명서, 건의문 또는 좌담회 등을 통하여 발표된 여성단체들이나 개인들의 견해를 종합하여보면 여성들은 원판결의 위와같은 입론에 대하여 이를 여성에 대한 차별적 편견의 반영으로 보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뿐더러 언론에 보도된 사회 일반의 여론 역시 원판결에대하여 이를 일반적 법감정에 부합되지 아니하는 의외의 판결로 보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와같은 여론의 반응에 대하여 이를 단순히 민사소송에 있어서의 당사자주의, 손해배상사건에 관한 법원의 판결관행, 기타 제반 소송기술상의 문제 등에대하여 전문적 지식이 없는 문외한들의 무지와 오해의 소치로만 가볍게 돌려버린다는 것은 결코 정당한 일이 되지 못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원판결의 판단이설사 손해배상소송에 있어서의 종래의 재판관행에 따른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상 최초로 사회 일반에 널리 주지되면서 소박한 일반적 법감정에 현저히 어긋난다는 여론의 비판에 봉착하게 된 이 마당에 있어서는 그같은 종래의재판관행 자체에 대하여 근본적인 비판과 재검토가 가해져야 옳을 것이며 법원으로서는 자세하고도 충분한 심리를 통하여 일반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논거를 제시함으로써 종래의 관행을 재확인하든지 아니면 종래의 관행을 수정. 변경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 P45

바꾸어 말하자면 각종 법령, 취업규칙, 단체협약, 근로계약 등의 규정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단순한 관행, 관습, 지배적 편견, 기타사실상의 강제력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근로여성들에대하여 부과되고 있는 일체의 결혼퇴직강제 현실의 잔존수명은 법원이 이를 얼마나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얼마나 강경한 어조로 비난하느냐에따라서 크게 좌우되는 것이며 이같은 견지에서 볼 때 미혼여성 근로자의 결혼후 계속근무 가능성 여하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이른바 ‘자기실현적 예언‘ (self-fulfilling prophecy)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위 원고가 근무하던 회사에 기혼여성이 없다는 등의 사유만으로 가볍게 위 원고의 결혼퇴직을 예언한 원판결의 위 입론의 근저에는 아무래도기혼여성의 취업을 백안시하고 가사노동 전념을 미덕으로 보는 전통시대적 · 남성지배적 편견과, 대등한 사회참여를 통하여 경제적 독립, 인격적 통합, 인간[적 존엄을 획득하고자 하는 다수 여성들의 절실한 염원에 대한 몰이해 (沒理解)가 은연중에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으며, 사회여론이 원판결에 대하여 사법부에 의한 결혼퇴직제의 정당화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는것을 단순한 문외한의 오해라고 돌려버릴 수 없는 소이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P48

나. 주부 가사노동에 대한 화폐적 평가의 점
(1)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부부재산제도는 여성의 경제적 무력화와 예속상태를 영구화하는 방향으로만 운용되어왔습니다. 주부가 가사노동에만 전념하는경우 주요한 재산은 모두 남편의 소유명의로 되고 만약 그렇지 아니할 때는 자금출처의 조사, 증여세의 부과 등 감내하기 어려운 불이익이 부과됩니다.
결혼생활을 통하여 형성된 남편명의의 재산은 가정공동체 속에서의 아내의헌신적인 기여와 협력에 힘입은 것이고 따라서 부부 공동의 노력의 산물이라고하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혼시 아내에게 그 재산에 대한 정당한 몫만큼의 분할청구권이 인정되지 아니하고 다만 남편의 유책 (有責) 행위로 인하여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배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위자료만이 인정될 뿐이며그 수액 또한 남편에게 남겨지는 재산과의 균형상 지극히 미미하게만 인정되고있습니다. 이같은 여성의 경제적 무권리상태 및 그로 인하여 여성들이 감내하여야만 하는 온갖 수모와 굴종과 고통은 결국 주부의 가사노동에 대한 천시(賤視), 그 경제적 가치에 대한 부당한 외면의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51

감옥 안에서 밥을 굶는다는 것은 보통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의 극한상황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연약한 육신이 짊어질 수 있는 모든 고뇌와 저주가 집약되어 있다. 무엇이 우리의 젊은이들을 이같은 극한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는가?
마하트마 간디도 옥중에서 단식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도처에서 옥중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인간적 상황은 간디의 경우와는 근본적으로다르다. 간디는 그의 비폭력 · 불복종 운동의 대의를 전파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서 옥중단식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우리 젊은이들은 감옥내에서의 폭행등 각종 굴욕적인 처우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어방법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강요받다시피 단식을 하고 있다. 또 간디의 옥중단식에 관한 소식은 그때그때 세상에 널리 공표되어 온 세상이 그 귀추를 지켜보았으나, 우리 젊은이들은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절연된 처절한 고독 속에서 허기를 가누고 있다. 간디는 결코 ‘강제급식‘과 같은 일은 당하지 않았고, 그의 단식투쟁은 언제나 소기의 성과를 거둔 후 자의에 의해 종결되었다. 그런데 우리 젊은이들의 외로운 단식은 거의 언제나 강제급식이라는 이름의 어쩌면 인도적인 듯하면서도 어쩌면 가장 비인도적인 엄청난 물리력에 부딪혀 끝내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중도에서 좌절되고 만다.
세칭 ‘서울대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전 서울대생 유시민씨는 만기출소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구매신청한 포도가 썩어서 들어온 것을 보고 그동안의 인내가 한계점에 도달하여 "들척지근하고 텁텁한 포도를 씨앗까지 씹어 삼키면서 ••• 독심을 품고" 옥중단식을 결행하였다가 단식 나흘째 되는 날 예의 강제급식을 당한다. 최근에 펴낸 「아침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이제 완전히 덫에 걸린 짐승꼴이었다. 발버둥칠수록 덫은 더욱 고통스럽게 조여들 뿐이다. 누군가가 내 머리카락을 잔뜩 움켜쥐고 진찰대 아래로 잡아당겼다. 여러 차례 쐐기질을 시도하던 손길이 조금 늦추어진 순간 나는 결심했다. 말해야한다. 끝까지 입을 벌리지 않으면 저 고무호스를 콧구멍으로 집어넣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한껏 모로 비틀어 젖힌 다음 재빨리 입을 열었다. 당할 때 당하는한이 있더라도 의사표시만은 명확히 해야 한다.
"그만! 내 스스로 먹겠..
노련한 과장이 기회를 놓칠 턱이 없다. 쐐기는 조금씩 밀려들어왔다. 혀끝에 느껴지는 껄끄러운 나무의 감촉. 앞이빨이 몽땅 부러져나가는 듯한 아픔. 숨쉬기가 거북스럽다. 과장의 씨근대는 숨소리말고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팔다리에서힘이 빠져나갔다. 미끄러운 무엇이 목 안을 스치고, 곧이어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꾸루룩 꾸룩 미음이 뱃속으로 흘러들었다. 구역질은 더욱 격렬해지고 숨이 가빴다. 어릴 때 집에서 기르던 개가 쥐약이 든 음식을 먹고 죽어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개는 옆으로 길게 뻗은 채 뱃속에 든 것을 몽땅 토해놓고 죽었다. 토할 때마다 갈빗대가 숭숭 드러난 개의 배는 마치 아코디언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했다. 내가 바로 그런 꼴이었다. - P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이 아닌 국경이 이동할 때는 이주민이 아닌 난민이 발생하게 된다. 미국의 작가 대니얼 멘델슨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폴란드에서 학교를 다니고 독일에서 결혼하고 소련에서 자녀를 낳고 우크라이나에서 죽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는 한번도 자기 마을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이는 1918년 이전에 현재 우크라이나의 리비우나 그근처에서 태어나 1990년대까지 살았고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 P340

국제연맹은 난민 대상자를 확대하여 튀르키예에서 피신한 아르메니아와 아시리아인들도 지원했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발생한 대규모 난민 사태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1950년에 유엔에 의해 난민고등판무관의 역할이 승격되었지만 이들의 업무역시 유럽으로만 한정되어 있었으며 난민으로 보호받을 자격에 대해서도 제한된 규정에 묶여 있었다. 오늘날에도 난민의 정의는 여전히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두려움‘에 근거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가난, 기아, 기후 변화 또는 자연재해 때문에 고국을 떠나는 이주민은 난민으로 간주되지 않으므로 보호를 받기 힘들다. - P341

허가를 받거나 잗지 않거나 유럽인들의 이주가 계속되기는 했지만 북아메리카 내부의 인구 이동에 비하면 매우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 대규모 이주는 새로운 이민 제한 조처로 인한 노동력 부족에따른 연쇄 반응이었다. 매디슨 그랜트와 앨버트 존슨 같은 백인 (그리고 북유럽인) 우월주의자들이 고안한 반이민법은 뜻하지 않게 새로운 비유럽인의 이주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1920년대에 약 45만 명의 멕시코인들이 노동 시장의 요구에 따라 국경을 넘었고 주로 텍사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의 과일 농장과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나가장 중요한 이주는 수백만 명의 미국 흑인들이 과거에 노예제도가있었던 남부 지역을 벗어나 북부의 대도시로 이주하고 그중 소수는 더 멀리까지 여행하게 된 것으로, 이는 흑인 대이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흑인 대이동이 미국을 재편하는 데 미친 영향의 규모와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에 대해 유명한 역사가인이사벨 윌커슨Isabel Wilkerson의 말을 빌자면 ‘그것이 닿은 모든 도시의사회적·정치적 질서를 개조한 거대하고 주도자 없는 운동‘이었다. 흑인 대이동이 한창이던 1925년 미국 흑인 철학자 알랭 로크 Alain Locke는 흑인 대이동이 ‘시골에서 도시로 그리고 중세 미국에서 현대 미국으로의 계획적 도피‘라고 했다. 또한 그것은 차별과 린치, 빈곤, 아직해결되지 않은 노예제도와 남북전쟁의 유산으로부터의 도피였다. - P365

할렘은 유럽 이민자들의 근거지였지만 그들은 점차 더 시내쪽으로 아니면 아예 뉴욕 시 밖으로 이동했고, 1920년대 즈음 할렘의 중심부에는 흑인들이 살게 되었으며, 흑인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바하마 혈통으로 플로리다에서 이주한역사가 제임스 웰던 존슨 James Weldon Johnson은 할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니그로 관광객, 행락객, 호기심 많은 사람, 모험가, 야망가, 재능 있는사람을 위한 위대한 메카다. 그 매력은 카리브 해의 섬부터 아프리카까지 뚫고 들어갔다.

할렘 르네상스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남부에서 이주해온 이들이었다. 그러나 존슨이 할렘 문화에 대해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 말도 옳았다. 시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와 소설가 넬라 라Nelta Larsen은 미 중서부 출신이었고, 흑인 민족주의자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와 작가 클로드 멕케이 Claude McKay는 자메이카 출신이었다.
그리고 할렘 르네상스의 부산물 중 하나는 더 먼 과거, 즉 오래된 고향과 과거의 이주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었다. - P368

제2차 세계대전은 이주 기억상실증이 시작되는 일종의분수령이 되었다. 이는 전쟁 전과 후의 이주가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여졌으며, 전쟁 전과 전쟁 후라는 양 시대 사이의 이주 관련 연속성들이 무시되거나 부인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간단한 실험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주민을 상상해보자.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그들은 백인인가? 그들은유럽인인가? 아마 아닐 것이다. 현대의 이주민은 보통 개발도상국에서 일을 찾거나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온 가난하고 피부색이짙은 사람들로 연상되는 경향이 생겼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비슷한 실험을 했더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특히 서구인들은 미국 또는 오스트랄라시아로 이주해간 백인 유럽인들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점은 대체로 백인들이 전쟁 이후에는더 이상 자신들을 이주민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은 이민 나가는 사람 emigrant 또는 국외 거주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또한 영어에서 이민 들어오는사람mmigrant이라는 단어는 유색인종 이주민들을 분류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것은 현대의 이주 논쟁이 얼마나 인종차별적이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지를 깨우쳐준다.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1950년대 이전에는 백인 일색이었고 단일 문화였다는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치는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인 조상이 고대 아테네인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그곳에서 살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착주의와 인종적 순수성, 민족국가라는 세 가지를 동시에 미화시키는 것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는 두 차례의세계대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카리브 해 사람들이 전장에서 혹은후방에서 전쟁을 치뤄냈던 역사 또한 생략해버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1950년대 이전의 유럽 역사가 개작되면서 유색인종을 위한 역사는 거의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들은 그냥 삭제되었고 수십 년이 지난 이제서야 점차 복원되고 있다. - P394

대영제국의 쇠퇴는 동시에 특권적인 이주의 쇠퇴를 의미했다. 또한 제국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영국인(대부분 남성이었다)의 수요도 감소했다. 즉, 모험심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영국 청년들은 고향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식민지로 이동하면 경력의 시작 단계부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는데, 그 선택권이 급격히 줄어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대신 모험심 있고 자신감 넘치는 다른 청년 집단이 반대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메이카 시인 루이스 베넷 Louise Bennett이 ‘역 식민화‘라고 표현한 움직임이었다. 이에 대해 스리랑카의 정치 이론가 A. 시바난단Sivananda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이 거기(스리랑카)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영국)에 있는 것이다." 시차를 둔 이러한 인구 흐름은 대칭으로 일어났고, 영국은 한때 대영제국이었던 지역의 이민자를 배제하는 것을 정당화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 - P402

멕시코 젊은이들을 포함한 전 세계 수많은 이주민들에게 이주라는 개념은 또한 독립을 의미했다. 이주를 통해 보수적인 문화와 가족의 통제를 벗어나고, 부모처럼 되지 않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수 있는 것이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 이루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기대하는 엄청나게 위험한 행동, 예를 들어 조국을 위해 싸운다든지 하는 것을 기억해보라. 그들이 국가의 이익 대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위험을 통해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혜택 중 일부는 실용적인 것들로 좋은 직업, 더 나은 의료 서비스, 자기만의 방, 자녀를 위한 좋은교육 그리고 물론 박해로부터의 자유 등이다. 그러나 고대부터 인간이 이주하는 이유 중에는 실용적이지 않는 것들과 실용적인 것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으며 항상 그래왔다. 국경과 민족국가가 있는 오늘날의 정주주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역사를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 지루하거나 호기심 혹은 모험심 때문에, 아니면 도전을 즐기거나 꿈을 이루고 싶어서 이주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지구의 거의 모든 곳으로 이주했고,
그것을 막으려는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이주의 역사야말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촌인 유인원과 인류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것 중 하나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주민과 이주민 후손으로서 우리의 역사가 모두의 공통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 P4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린네의 분류법은 인간과 그 외 모든 사물들을 계(동물), 강(포유류), 목(영장류), 속(호) 및 종사피엔스)으로 분류하는 것이었고, 현명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자기 만족에 빠진 우리 인간종은 훨씬 더 타당해 보이는 명칭, 예를 들어 이주하는 사람(호모 마이그런스 Homo Migrans) 대신 호모 사피엔스를 즐겨 쓰고 있다. 그리고 린네는 (현명하지 못하게) 호모 사피엔스 속을 아메리카(원주민),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등 네 가지 주요하위 그룹으로 세분했다. 그는 또 각 하위 그룹을 출신 대륙에 따라설명하고, 그 구성원들을 머리카락 색, 피부 색, 콧구멍 모양 등 신체적 특징과 도덕적 기질에 따라 분류했다. 모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분류의 대가‘ 린네는 동물과 식물을 물리적 특성에 따라 분류한 가장 잘 알려진 저서에서 아시아인은 천성적으로 오만하고 탐욕스럽고, 아프리카인은 교활하고 나태하며, 유럽인은 온화하고 창의적이라고 기술했다. - P278

중국의 반응은 이주민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전반적인 태도를보여주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였다. 그리고 서구에서 생각하듯이 획일적이고 단일한 문화를 가진 사회가 아니며 그랬던 적도 없다. 동남아시아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중국인 이민자들은 대부분 중국 남부 출신이었다. 자칭 최초의 차이나타운인 비논도에 살다가 마닐라 대학살의 희생자가 된중국인 이민자들은 베이징보다 마닐라에 더 가까운 중국 남부의 해안 지역인 푸젠성에서 왔으며, 나중에는 광둥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게 된다. 당시 중국 북부에서는 남부인들이 진정한 중국인이 아니며, 남부의 해양 상인들은 모두 밀수업자에 해적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20세기 초 <아큐정전>의 작가 루쉰은 남부인들에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북부인들은 성실하고 정직하다. 남부인들은 노련하고 기민하다. 이것이 그들 각각의 미덕이다. 그러나 성실과 정직은 어리석음을 낳고, 노련함과 기민함은 이중성을 낳는다.
남부인들은 자주 이주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불신이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복합적인데 거리적으로 동남아시아와 가깝고 중국 권력의 중심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가장 큰이유였을 것이다. 또한 불교가 이주를 문화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만드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불교는 원래 외국에서 온 것으로 여행과 순례에 중점을 두는 종교다. 북부의 대도시에서는 유교가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노골적으로 정주 문화를 지지했다. 이주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자를 인용했다. "부모님이 살아 있는 동안 아들은 먼 여행을 떠나서는 안 된다." 북부인들도 이주를 하기는 했지만 대개 중국 국경 내에서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경우 남부로 이주해 기존에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의 이주를 조장했다. - P286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중국과 인도 출신으로 ‘쿨리‘라고 불렸던 계약 노동자들은 노예제 폐지로 인해 생긴 공백을 채워줬다. 식민지행정부와 열대 지방의 지주들은 주로 새로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원했지만 그 외에 철도, 도로 및 운하 건설 업계에서도일꾼을 필요로 했다. 더 이상 아프리카인들을 납치해 일을 시킬 수 없었고, 유럽인들은 대부분 더운 나라에서 육체 노동하기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새롭게 재편된 고용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들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이주해왔다. 일부는 원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서, 어떤 이들은 노예처럼 그냥 납치된 경우도 있었다. - P292

경제가 호황일 때는 중국인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국인을 반대하는 쇼비니즘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부분 이민자들로 구성된 백인 노동자 노동조합은 중국 노동자들이 더 싼 노동력으로 자기들의 임금을 깎아내리고 있다고 불평했으며, 중국인 노동자들을 핑계로 파업을 단행했다. 아일랜드 이민자로 노동조합 대표였던 데니스 키어니 Denis Kearney는 모든 연설을 "중국인은 떠나야 합니다!"라는 말로 끝맺었다. 첫미국 횡단 철도가 완성되자 수천 명의 중국인들은 실직했고, 그 철도를 이용해 다수의 백인 이민자들이 대서양 연안에서 서부로 이주했다. 그리고 1870년대에 대공황이 닥쳤다.
더 이상 중국인들이 필요하지 않게 되자 중국 이민자들의 미국입국이 금지되었다. 그들은 개방된 국경을 자랑스러워하는 나라에서배제된 첫 번째 ‘인종‘이었다. 중국인 배제법에 대한 의회의 논쟁을 살펴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미국 서부의 백인 정치가들은 ‘존 차이나맨‘, ‘몽골인‘ 그리고 ‘황인종‘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과장된 인종차별주의를 주도했다. 18세기 ‘인종 과학자들에 의해 정의된 중국인이 ‘황인종‘이라는 개념은 영어와 다른 여러 언어에서 일상적인 증오 발언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 P298

19세기 말이 되자 다른 나라들도 미국을 따라 중국 이민자들에대한 제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주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같은 영국이 통치하는 영토들이었는데 그들은 동시에 대규모 백인 이민을 장려했다. 유럽인과 유럽 출신 사람들 사이에 중국인 혐오증이 깊게 뿌리를 내리면서 이제 중국인을 배제시키기 위한 이유로 내세웠던 경제적 핑계도 필요가 없어졌다. 논쟁은 점점 더 인종적·문명적 측면으로 진행됐는데, 어떤 면에서는오늘날의 이슬람 혐오증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 논쟁들은 백인 유럽인들이 스스로에게 이제 곧 자신들이 ‘황인종‘(중국인은 늘 포함되고, 때로는 일본인까지 포함한다)에게 압도당할 것이라고 불안해하는 더 광범위한 담론의 일부가 되었다.
‘황색 위협‘은 1890년대에 처음 언급되었고 금세 유행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자신이 유럽 국가 원수들에게 보낸 석판화의 제목으로 그 문구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의 식민 열강들에게 ‘황인종의 침입‘에 저항하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국을 분할해 자신들의 제국으로 통합시켜야 한다고 부추기기도 했다. 중국과 중국인들은 유럽인들의 상상과 현실 속에서 거대한 적이 되어 있었다. - P300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여권 없는 옛 시절로 돌아가는것에 대해 낙관적으로 이야기했다. 그 이유는 아주 다양했다. 쉬테판츠바이크가 열렬히 주장했던 자유주의와 과거에 대한 향수뿐만 아니라 인도주의와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일부 경제학자들은근로자들의 국경 자유 통행이 전후 경제를 재건하는 데 중요할 뿐만아니라 자본주의의 이념적 초석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도주의 단체들은 사람들이 내전과 박해를 피해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 결성된 국제 연맹의 후원으로 1920년 파리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여권 회의는 여권 없는 이동을 지향하는 ‘완전한 제한 철폐‘ 시대를 예고했다. 그러나 각국 정부는 이주민들이 혁명과 스페인독감을 확산시키지 않을까 우려했다. 민족주의의 성장 역시 여권 폐지를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생국들을 포함하여 많은 나라들은 자국을 동일한 언어·역사·문화 그리고 동일한 여권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로 규정하고 싶어 했다. - P313

팔레스타인이 아닌 곳에 조국을 건설하고자 한 시도는 그 외에도 많이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했던 계획은 1903년 영국이 지원한우간다 계획으로 현재의 이스라엘보다 약간 작은 면적의 동아프리카 지역을 유대인 자치 정착지로 만들려고 했다. 영국인들은 그 땅이(사실은 우간다가 아니라 케냐였다) 비어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거주자 대부분이 유목민이었을 뿐이었다. 우간다 계획은 시온주의 운동을 분열시켰고 일부는 앙골라, 리비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등 팔레스타인을 대체할 지역을 계속 찾아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그이유 중 하나는 더 매력적이고 더 안전한 다른 대안 지역들이 있었기때문이다. 그중에는 폴리와 자매들이 정착한 영국이 있었고 여러 남미 국가와 남아프리카, 호주 그리고 당연히 미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급증할 때에도 미국은 유럽을 떠나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목적지였다. - P327

폴리가 1919년에 팔레스타인에 타고 온 배는 ‘SS 루슬란‘으로이스라엘 건국 신화에서 ‘시온주의 메이플라워‘ 같은 중요한 역할을했고,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100주년 기념 전시회의 주제가 되었다. 루슬란의 유대인 승객 644명은 영국이 유대인 국가에 대한 지지를 발표한 후 팔레스타인에 입국한 최초의 대규모 이주민 집단이었다. 루슬란의 도착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새로운 유대인 이주 물결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3차 알리야‘로 알려지게 되는데, 알리야Aliyah라는 용어는 순서를 나타내는 앞의 숫자와 함께 현대 이스라엘의 이주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그것은 한 이주 공동체가 언어를 통해 자신들을 다른 이주민 공동체와 구분하는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낸 좋은 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알리야는 히브리어로 원래는 언덕을 올라간다는 의미에서 ‘올라가다‘ 또는 ‘오르다‘를 의미했다. 또한 종교 의식을 묘사하는 데도사용되었는데, 유대교회당에서 어떤 사람이 토라가 보관되어 있는곳으로 ‘올라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19세기가 되어 알리야는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도 의미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 이 단어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념적 함축성을 갖게 되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은 이주를 통해 애국 행위를 하거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알리야는 과거에 이주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였던 하기라hagira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고, 하기라는 그후에 유대인이 이기적인 이유로 이주한다는 의미를 갖거나 아니면 유대인이아닌 이주민들의 이주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알리야는 생활 방식의 선택이 아닌 도덕적 의무로 변모했고 이는 단순한 이주 행위가 아니라 귀환 행위가 되었다. - P328

"예리다 verida‘는 폴리처럼 결국 팔레스타인을 떠나게 되는 유대인의 행동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다. 예리다는 ‘내려가다‘라는 뜻으로 알리야의 정반대의 의미이며, 약속의 땅에서 이주해나간다는뜻이다. 이스라엘에서 이 단어는 배교와 반역이 기저에 깔려 있는 실망감을 내포하는 아주 부정적 의미가 되었다. 1974년에 팔레스타인태생으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총리가 된 이츠하크 라빈 Yitzhak Rabin(그의 어머니는 폴리와 함께 루슬란 호를 타고 왔다)은 약속의 땅에서 떠나가는 이주민들을 ‘의지 박약 낙오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리다는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 비율은 알리야보다 낮지만 그래도일부 시온주의자들에게는 충분히 당혹스러운 문제였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를 이스라엘 국민들과 그들의 기술이 수출될 만큼 세계화에 걸맞게 성장했다는 반가운 신호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 P3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