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네의 분류법은 인간과 그 외 모든 사물들을 계(동물), 강(포유류), 목(영장류), 속(호) 및 종사피엔스)으로 분류하는 것이었고, 현명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자기 만족에 빠진 우리 인간종은 훨씬 더 타당해 보이는 명칭, 예를 들어 이주하는 사람(호모 마이그런스 Homo Migrans) 대신 호모 사피엔스를 즐겨 쓰고 있다. 그리고 린네는 (현명하지 못하게) 호모 사피엔스 속을 아메리카(원주민),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등 네 가지 주요하위 그룹으로 세분했다. 그는 또 각 하위 그룹을 출신 대륙에 따라설명하고, 그 구성원들을 머리카락 색, 피부 색, 콧구멍 모양 등 신체적 특징과 도덕적 기질에 따라 분류했다. 모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분류의 대가‘ 린네는 동물과 식물을 물리적 특성에 따라 분류한 가장 잘 알려진 저서에서 아시아인은 천성적으로 오만하고 탐욕스럽고, 아프리카인은 교활하고 나태하며, 유럽인은 온화하고 창의적이라고 기술했다. - P278
중국의 반응은 이주민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전반적인 태도를보여주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였다. 그리고 서구에서 생각하듯이 획일적이고 단일한 문화를 가진 사회가 아니며 그랬던 적도 없다. 동남아시아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중국인 이민자들은 대부분 중국 남부 출신이었다. 자칭 최초의 차이나타운인 비논도에 살다가 마닐라 대학살의 희생자가 된중국인 이민자들은 베이징보다 마닐라에 더 가까운 중국 남부의 해안 지역인 푸젠성에서 왔으며, 나중에는 광둥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게 된다. 당시 중국 북부에서는 남부인들이 진정한 중국인이 아니며, 남부의 해양 상인들은 모두 밀수업자에 해적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20세기 초 <아큐정전>의 작가 루쉰은 남부인들에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북부인들은 성실하고 정직하다. 남부인들은 노련하고 기민하다. 이것이 그들 각각의 미덕이다. 그러나 성실과 정직은 어리석음을 낳고, 노련함과 기민함은 이중성을 낳는다. 남부인들은 자주 이주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불신이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복합적인데 거리적으로 동남아시아와 가깝고 중국 권력의 중심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가장 큰이유였을 것이다. 또한 불교가 이주를 문화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만드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불교는 원래 외국에서 온 것으로 여행과 순례에 중점을 두는 종교다. 북부의 대도시에서는 유교가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노골적으로 정주 문화를 지지했다. 이주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자를 인용했다. "부모님이 살아 있는 동안 아들은 먼 여행을 떠나서는 안 된다." 북부인들도 이주를 하기는 했지만 대개 중국 국경 내에서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경우 남부로 이주해 기존에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의 이주를 조장했다. - P286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중국과 인도 출신으로 ‘쿨리‘라고 불렸던 계약 노동자들은 노예제 폐지로 인해 생긴 공백을 채워줬다. 식민지행정부와 열대 지방의 지주들은 주로 새로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원했지만 그 외에 철도, 도로 및 운하 건설 업계에서도일꾼을 필요로 했다. 더 이상 아프리카인들을 납치해 일을 시킬 수 없었고, 유럽인들은 대부분 더운 나라에서 육체 노동하기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새롭게 재편된 고용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들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이주해왔다. 일부는 원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서, 어떤 이들은 노예처럼 그냥 납치된 경우도 있었다. - P292
경제가 호황일 때는 중국인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국인을 반대하는 쇼비니즘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부분 이민자들로 구성된 백인 노동자 노동조합은 중국 노동자들이 더 싼 노동력으로 자기들의 임금을 깎아내리고 있다고 불평했으며, 중국인 노동자들을 핑계로 파업을 단행했다. 아일랜드 이민자로 노동조합 대표였던 데니스 키어니 Denis Kearney는 모든 연설을 "중국인은 떠나야 합니다!"라는 말로 끝맺었다. 첫미국 횡단 철도가 완성되자 수천 명의 중국인들은 실직했고, 그 철도를 이용해 다수의 백인 이민자들이 대서양 연안에서 서부로 이주했다. 그리고 1870년대에 대공황이 닥쳤다. 더 이상 중국인들이 필요하지 않게 되자 중국 이민자들의 미국입국이 금지되었다. 그들은 개방된 국경을 자랑스러워하는 나라에서배제된 첫 번째 ‘인종‘이었다. 중국인 배제법에 대한 의회의 논쟁을 살펴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미국 서부의 백인 정치가들은 ‘존 차이나맨‘, ‘몽골인‘ 그리고 ‘황인종‘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과장된 인종차별주의를 주도했다. 18세기 ‘인종 과학자들에 의해 정의된 중국인이 ‘황인종‘이라는 개념은 영어와 다른 여러 언어에서 일상적인 증오 발언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 P298
19세기 말이 되자 다른 나라들도 미국을 따라 중국 이민자들에대한 제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주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같은 영국이 통치하는 영토들이었는데 그들은 동시에 대규모 백인 이민을 장려했다. 유럽인과 유럽 출신 사람들 사이에 중국인 혐오증이 깊게 뿌리를 내리면서 이제 중국인을 배제시키기 위한 이유로 내세웠던 경제적 핑계도 필요가 없어졌다. 논쟁은 점점 더 인종적·문명적 측면으로 진행됐는데, 어떤 면에서는오늘날의 이슬람 혐오증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 논쟁들은 백인 유럽인들이 스스로에게 이제 곧 자신들이 ‘황인종‘(중국인은 늘 포함되고, 때로는 일본인까지 포함한다)에게 압도당할 것이라고 불안해하는 더 광범위한 담론의 일부가 되었다. ‘황색 위협‘은 1890년대에 처음 언급되었고 금세 유행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자신이 유럽 국가 원수들에게 보낸 석판화의 제목으로 그 문구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의 식민 열강들에게 ‘황인종의 침입‘에 저항하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국을 분할해 자신들의 제국으로 통합시켜야 한다고 부추기기도 했다. 중국과 중국인들은 유럽인들의 상상과 현실 속에서 거대한 적이 되어 있었다. - P300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여권 없는 옛 시절로 돌아가는것에 대해 낙관적으로 이야기했다. 그 이유는 아주 다양했다. 쉬테판츠바이크가 열렬히 주장했던 자유주의와 과거에 대한 향수뿐만 아니라 인도주의와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일부 경제학자들은근로자들의 국경 자유 통행이 전후 경제를 재건하는 데 중요할 뿐만아니라 자본주의의 이념적 초석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도주의 단체들은 사람들이 내전과 박해를 피해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 결성된 국제 연맹의 후원으로 1920년 파리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여권 회의는 여권 없는 이동을 지향하는 ‘완전한 제한 철폐‘ 시대를 예고했다. 그러나 각국 정부는 이주민들이 혁명과 스페인독감을 확산시키지 않을까 우려했다. 민족주의의 성장 역시 여권 폐지를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생국들을 포함하여 많은 나라들은 자국을 동일한 언어·역사·문화 그리고 동일한 여권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로 규정하고 싶어 했다. - P313
팔레스타인이 아닌 곳에 조국을 건설하고자 한 시도는 그 외에도 많이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했던 계획은 1903년 영국이 지원한우간다 계획으로 현재의 이스라엘보다 약간 작은 면적의 동아프리카 지역을 유대인 자치 정착지로 만들려고 했다. 영국인들은 그 땅이(사실은 우간다가 아니라 케냐였다) 비어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거주자 대부분이 유목민이었을 뿐이었다. 우간다 계획은 시온주의 운동을 분열시켰고 일부는 앙골라, 리비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등 팔레스타인을 대체할 지역을 계속 찾아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그이유 중 하나는 더 매력적이고 더 안전한 다른 대안 지역들이 있었기때문이다. 그중에는 폴리와 자매들이 정착한 영국이 있었고 여러 남미 국가와 남아프리카, 호주 그리고 당연히 미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급증할 때에도 미국은 유럽을 떠나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목적지였다. - P327
폴리가 1919년에 팔레스타인에 타고 온 배는 ‘SS 루슬란‘으로이스라엘 건국 신화에서 ‘시온주의 메이플라워‘ 같은 중요한 역할을했고,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100주년 기념 전시회의 주제가 되었다. 루슬란의 유대인 승객 644명은 영국이 유대인 국가에 대한 지지를 발표한 후 팔레스타인에 입국한 최초의 대규모 이주민 집단이었다. 루슬란의 도착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새로운 유대인 이주 물결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3차 알리야‘로 알려지게 되는데, 알리야Aliyah라는 용어는 순서를 나타내는 앞의 숫자와 함께 현대 이스라엘의 이주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그것은 한 이주 공동체가 언어를 통해 자신들을 다른 이주민 공동체와 구분하는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낸 좋은 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알리야는 히브리어로 원래는 언덕을 올라간다는 의미에서 ‘올라가다‘ 또는 ‘오르다‘를 의미했다. 또한 종교 의식을 묘사하는 데도사용되었는데, 유대교회당에서 어떤 사람이 토라가 보관되어 있는곳으로 ‘올라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19세기가 되어 알리야는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도 의미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 이 단어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념적 함축성을 갖게 되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은 이주를 통해 애국 행위를 하거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알리야는 과거에 이주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였던 하기라hagira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고, 하기라는 그후에 유대인이 이기적인 이유로 이주한다는 의미를 갖거나 아니면 유대인이아닌 이주민들의 이주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알리야는 생활 방식의 선택이 아닌 도덕적 의무로 변모했고 이는 단순한 이주 행위가 아니라 귀환 행위가 되었다. - P328
"예리다 verida‘는 폴리처럼 결국 팔레스타인을 떠나게 되는 유대인의 행동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다. 예리다는 ‘내려가다‘라는 뜻으로 알리야의 정반대의 의미이며, 약속의 땅에서 이주해나간다는뜻이다. 이스라엘에서 이 단어는 배교와 반역이 기저에 깔려 있는 실망감을 내포하는 아주 부정적 의미가 되었다. 1974년에 팔레스타인태생으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총리가 된 이츠하크 라빈 Yitzhak Rabin(그의 어머니는 폴리와 함께 루슬란 호를 타고 왔다)은 약속의 땅에서 떠나가는 이주민들을 ‘의지 박약 낙오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리다는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 비율은 알리야보다 낮지만 그래도일부 시온주의자들에게는 충분히 당혹스러운 문제였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를 이스라엘 국민들과 그들의 기술이 수출될 만큼 세계화에 걸맞게 성장했다는 반가운 신호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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