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와같은 충격과 항의와 관심은 요컨대 첫째로, 원판결이 미혼여성 회사원인 원고 이경숙이 25세에 달하면 결혼하여 퇴직한다는 예상을 전제로 하여 배상액을 산정한 것은 사법부에 의한 결혼퇴직제의 정당화에 귀착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 및 둘째로, 법원이 주부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서 하필이면 ‘최하위 생계유지노동‘인 도시여성 일용임금 일당 4천원을 산정 기초로 삼았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의구심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 관하여 성명서, 건의문 또는 좌담회 등을 통하여 발표된 여성단체들이나 개인들의 견해를 종합하여보면 여성들은 원판결의 위와같은 입론에 대하여 이를 여성에 대한 차별적 편견의 반영으로 보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뿐더러 언론에 보도된 사회 일반의 여론 역시 원판결에대하여 이를 일반적 법감정에 부합되지 아니하는 의외의 판결로 보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와같은 여론의 반응에 대하여 이를 단순히 민사소송에 있어서의 당사자주의, 손해배상사건에 관한 법원의 판결관행, 기타 제반 소송기술상의 문제 등에대하여 전문적 지식이 없는 문외한들의 무지와 오해의 소치로만 가볍게 돌려버린다는 것은 결코 정당한 일이 되지 못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원판결의 판단이설사 손해배상소송에 있어서의 종래의 재판관행에 따른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상 최초로 사회 일반에 널리 주지되면서 소박한 일반적 법감정에 현저히 어긋난다는 여론의 비판에 봉착하게 된 이 마당에 있어서는 그같은 종래의재판관행 자체에 대하여 근본적인 비판과 재검토가 가해져야 옳을 것이며 법원으로서는 자세하고도 충분한 심리를 통하여 일반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논거를 제시함으로써 종래의 관행을 재확인하든지 아니면 종래의 관행을 수정. 변경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 P45

바꾸어 말하자면 각종 법령, 취업규칙, 단체협약, 근로계약 등의 규정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단순한 관행, 관습, 지배적 편견, 기타사실상의 강제력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근로여성들에대하여 부과되고 있는 일체의 결혼퇴직강제 현실의 잔존수명은 법원이 이를 얼마나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얼마나 강경한 어조로 비난하느냐에따라서 크게 좌우되는 것이며 이같은 견지에서 볼 때 미혼여성 근로자의 결혼후 계속근무 가능성 여하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이른바 ‘자기실현적 예언‘ (self-fulfilling prophecy)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위 원고가 근무하던 회사에 기혼여성이 없다는 등의 사유만으로 가볍게 위 원고의 결혼퇴직을 예언한 원판결의 위 입론의 근저에는 아무래도기혼여성의 취업을 백안시하고 가사노동 전념을 미덕으로 보는 전통시대적 · 남성지배적 편견과, 대등한 사회참여를 통하여 경제적 독립, 인격적 통합, 인간[적 존엄을 획득하고자 하는 다수 여성들의 절실한 염원에 대한 몰이해 (沒理解)가 은연중에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으며, 사회여론이 원판결에 대하여 사법부에 의한 결혼퇴직제의 정당화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는것을 단순한 문외한의 오해라고 돌려버릴 수 없는 소이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P48

나. 주부 가사노동에 대한 화폐적 평가의 점
(1)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부부재산제도는 여성의 경제적 무력화와 예속상태를 영구화하는 방향으로만 운용되어왔습니다. 주부가 가사노동에만 전념하는경우 주요한 재산은 모두 남편의 소유명의로 되고 만약 그렇지 아니할 때는 자금출처의 조사, 증여세의 부과 등 감내하기 어려운 불이익이 부과됩니다.
결혼생활을 통하여 형성된 남편명의의 재산은 가정공동체 속에서의 아내의헌신적인 기여와 협력에 힘입은 것이고 따라서 부부 공동의 노력의 산물이라고하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혼시 아내에게 그 재산에 대한 정당한 몫만큼의 분할청구권이 인정되지 아니하고 다만 남편의 유책 (有責) 행위로 인하여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배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위자료만이 인정될 뿐이며그 수액 또한 남편에게 남겨지는 재산과의 균형상 지극히 미미하게만 인정되고있습니다. 이같은 여성의 경제적 무권리상태 및 그로 인하여 여성들이 감내하여야만 하는 온갖 수모와 굴종과 고통은 결국 주부의 가사노동에 대한 천시(賤視), 그 경제적 가치에 대한 부당한 외면의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51

감옥 안에서 밥을 굶는다는 것은 보통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의 극한상황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연약한 육신이 짊어질 수 있는 모든 고뇌와 저주가 집약되어 있다. 무엇이 우리의 젊은이들을 이같은 극한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는가?
마하트마 간디도 옥중에서 단식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도처에서 옥중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인간적 상황은 간디의 경우와는 근본적으로다르다. 간디는 그의 비폭력 · 불복종 운동의 대의를 전파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서 옥중단식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우리 젊은이들은 감옥내에서의 폭행등 각종 굴욕적인 처우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어방법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강요받다시피 단식을 하고 있다. 또 간디의 옥중단식에 관한 소식은 그때그때 세상에 널리 공표되어 온 세상이 그 귀추를 지켜보았으나, 우리 젊은이들은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절연된 처절한 고독 속에서 허기를 가누고 있다. 간디는 결코 ‘강제급식‘과 같은 일은 당하지 않았고, 그의 단식투쟁은 언제나 소기의 성과를 거둔 후 자의에 의해 종결되었다. 그런데 우리 젊은이들의 외로운 단식은 거의 언제나 강제급식이라는 이름의 어쩌면 인도적인 듯하면서도 어쩌면 가장 비인도적인 엄청난 물리력에 부딪혀 끝내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중도에서 좌절되고 만다.
세칭 ‘서울대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전 서울대생 유시민씨는 만기출소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구매신청한 포도가 썩어서 들어온 것을 보고 그동안의 인내가 한계점에 도달하여 "들척지근하고 텁텁한 포도를 씨앗까지 씹어 삼키면서 ••• 독심을 품고" 옥중단식을 결행하였다가 단식 나흘째 되는 날 예의 강제급식을 당한다. 최근에 펴낸 「아침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이제 완전히 덫에 걸린 짐승꼴이었다. 발버둥칠수록 덫은 더욱 고통스럽게 조여들 뿐이다. 누군가가 내 머리카락을 잔뜩 움켜쥐고 진찰대 아래로 잡아당겼다. 여러 차례 쐐기질을 시도하던 손길이 조금 늦추어진 순간 나는 결심했다. 말해야한다. 끝까지 입을 벌리지 않으면 저 고무호스를 콧구멍으로 집어넣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한껏 모로 비틀어 젖힌 다음 재빨리 입을 열었다. 당할 때 당하는한이 있더라도 의사표시만은 명확히 해야 한다.
"그만! 내 스스로 먹겠..
노련한 과장이 기회를 놓칠 턱이 없다. 쐐기는 조금씩 밀려들어왔다. 혀끝에 느껴지는 껄끄러운 나무의 감촉. 앞이빨이 몽땅 부러져나가는 듯한 아픔. 숨쉬기가 거북스럽다. 과장의 씨근대는 숨소리말고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팔다리에서힘이 빠져나갔다. 미끄러운 무엇이 목 안을 스치고, 곧이어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꾸루룩 꾸룩 미음이 뱃속으로 흘러들었다. 구역질은 더욱 격렬해지고 숨이 가빴다. 어릴 때 집에서 기르던 개가 쥐약이 든 음식을 먹고 죽어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개는 옆으로 길게 뻗은 채 뱃속에 든 것을 몽땅 토해놓고 죽었다. 토할 때마다 갈빗대가 숭숭 드러난 개의 배는 마치 아코디언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했다. 내가 바로 그런 꼴이었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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