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처럼 조용하게 또 고통이 덜한 방식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사람에 대하여 과연 얼마나 ‘인도적‘인 일이 될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만일에 그것이 억울한 죽음이라고 한다면, 칼날 아래 목이 잘려 죽거나 총알에 맞아죽는 대신에 밧줄에 목매달려 죽는다고 하여 더 ‘인도적‘이며 덜 ‘야만적‘인 처우를 받은 것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에 우리가 끔찍한 공개처형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그 죽음에 대하여 갖게 되었던 깊은 관심을, 이제 더는 우리 눈앞에는 그같은 끔찍한 장면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포기하여버리게 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인도주의의 탈 아래 은폐된 국가의 야만은 오히려 더욱더 조장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범죄자들, 특히 사형수들은 흔히 사회의 쓰레기처럼 여겨진다. 보통사람들은 대개 사형수와는 어떤 관계도 없다. 사형수를 본 일도 없기 쉬우며, 이웃이나 친척, 친지 중에도 사형수가 있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자. 사형수들에 대한 문제는 경찰, 검찰, 법원 또는 교도소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아닌가, ‘억울한 사형수‘의 문제에 대하여는 ‘인권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가 있지않은가, 병은 의사에게 맡기고 교육은 학교에 맡기듯이 재판은 판사에게 맡겨두면 되지 않는가, 검사, 판사가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인가라는 식으로 제도에대한 거의 맹목적인 신앙에 사로잡혀 있다. - P91
우리나라 헌법의 이념에 입각하여 판결을 내린다면 지극히 간단하다. 이개는 무적이다. 죄는 아무런 정당한 이유 없이 이 개를 걷어찬 신사에게 있다. 걷어차인 개는 "저 신사가 날 걷어찬 것은 부당한 일이고 걷어차인 나는 아프고억울하다"고 생각할 권리즉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있다. 나아가 그 신사를 향하여 "당신이 날 걷어찬 것은 부당한 일이고 나는 지금 몹시 아프다"라고 짖어댈 권리즉 ‘표현의 자유‘가 있다. 그 신사의 ‘불안‘은 그가 개를 까닭 없이 걷어참으로써 자초한 것이지 아프기 때문에 짖어댄 개에게 책임이있는 것은 아니다. 개를 침묵시킴으로써 유지되는 ‘질서‘ 그것은 민주주의가 원하는 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이다. 부당하게 걷어차인 개는 마땅히 시끄럽게 짖어대야 하고 그같은 소란을 통하여 신사와 개 사이의 올바른관계가 회복되어가는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가 바라는 역동적인 질서 즉 ‘민주적 기본질서‘이다. 강자의 횡포와 약자의 침묵 위에 자리잡아 유지되는 평온 그것은 죽음의 질서이며 사이비 질서이며 반(反) 질서이다. 그같은 불의의 질서를 위하여 약한 자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야말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일이다. 이 개는 명백히 무죄이다. 너무나 쉽다. 대체 무슨문제가 있는가? - P95
그 대표적인 예로서는 ‘집시법‘ 제3조 제2항 제4호의 ‘현저히 사회적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 또는 시위‘에 관한 처벌규정과 경범죄처벌법제1조 제44호의 ‘유언비어 날조 · 유포‘에 관한 처벌규정을 들 수 있다. 위처벌규정들은 어느 것이나 ‘사회적 불안의 야기‘ 또는 ‘사회의 안녕 질서 저해‘ 등을 그 구성요건으로 정하고 있는데, 이 불확정개념들을 구체적 사안에 관하여 어떻게 해석,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법령에 더이상 참고할 만한 세부규정이나 정의규정 (定義規定)이 마련되어 있지 아니할 뿐더러 판례 · 학설상으로도 아직 이렇다 할 만한 뚜렷한 원칙이나 기준이 확립된 바 없다. 이같은 상태 아래서는 법집행자의 의도 여하에 따라 이 불확정개념들이 표현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만능의 도구로서 남용될 위험이 존재하며, 작금의 상황이 그러한 위험의 존재를 실증하고 있다. - P101
‘표현의 자유‘는 그토록 무력한 것인가? ‘사회질서‘란 그토록 고요한 것,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것, 죽음에 가까운 것인가? 그같은 침묵의 ‘질서‘가옹호됨으로써 민주주의는 옹호되는 것인가, 아니면 파괴되는 것인가? - P111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변론 요지
변호인들은 먼저 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있는 이름없는 유명인사, 얼굴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 …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눈물 없이는 상기할 수 없는 ‘권양의 투쟁‘ 저 처참하고 쓰라린, 그러면서도 더없이 숭고하고 위대한 인간성에의 투쟁에 대하여, 그리하여 마침내 다가올 ‘권양의 승리‘, 우리 모두의 승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해맑은 연꽃처럼 오늘 이 법정을 가득히 비추고 있는 눈부신 아름다움, 그 백설 같은 순결, 어떤 오욕과 탄압으로도 끝내 꺾을 수 없었던그 불굴의 용기와 진실을 위한 눈물겨운 헌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지금 이 법정에서 이룩되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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