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잔을 들었다. 선화가 잔을 들고는 내 잔 옆에 붙였다. 김 부장과 삼척동자도 잔을 들었다. 싸부는 식혜 캔을 들었다. 우리는 여느때처럼 건배했다. 순간 슈퍼할아버지가 관에서 나와 호상도 아닌데예절도 모른다며 버럭 하실 것 같다. 상관없다. 슈퍼할아버지의 잔소리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망원동 옥탑방의 밤이 깊어갔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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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잠시 멈춰 이슬람교와 초기 기독교를 비교해보자. 이 둘 사이에서는 많은 유사점들이 있다. 이주에 있어서는 특히 더 그랬다. 물론 이슬람은 최초의 지상 제국을 건설하는 데 기독교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두 종교 모두 신학 체계와 실천에 있어서 이동성이 아주 높아, 거의 이주성 종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초기에 성지나 창시자들이 중요하긴 했지만 그래도 두 종교 모두 특정영토나 민족 집단에 얽매이지 않았다. 또한 유대교나 힌두교와 달리특정 공동체나 장소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두 종교의 창시자들이 원거리 이주민은 아니었지만, 소소한 이주 이야기들이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예수는 이동 중에 말구유에 태어나 베들레헴에서는 집 없는 이주민이었고 이집트에서는 난민이었다. 무함마드는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했다. 그리고 양쪽 모두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여기저기 옮겨다닐 것을 권장했다.
이 두 종교의 성장은 불신자들을 개종시키려는 열망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는 그 신도들이 창시자들이 태어나고 죽은 거룩한 성지를 떠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유랑해야 함을 의미했다.  - P157

안달루시아에서는 믿기 어렵겠지만, 서반구에서 가장 위대한 이주민이자 탐험가였던 전형적인 북유럽인들도 소수 볼 수 있었다. 스페인 남부에는 우리가 바이킹이라고 알고 있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작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기 844년에 세비야를 습격했지만 결국 안달루시아인들에게 패했다. 많은 바이킹들이죽었고, 일부는 포로로 잡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개종한 바이킹들은 세비야 외곽에 정착할 수 있었고 치즈 제조업자로 일했다고 한다.
바이킹에 대한 여러 고정관념이 있겠지만 그중 어느 것도 남부스페인의 무슬림 치즈 제조업자를 떠오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이킹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이동하는 북유럽인, 특히 배를 타고 먼거리를 여행하는 스칸디나비아인을 떠올리지만, 보통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극도로 부정적인 것부터 요란스럽게 긍정적인 것까지 극과 극을 달린다. 어찌되었든 바이킹에 대한 고정관념은 대개 바이킹 이주의 규모와 범위를 폄하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 P160

최근 수십 년 동안 영어권 역사가들도 바이킹에 대한 기록을 바로잡아왔는데, 특히 바이킹 시대의 복잡한 이야기들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바이킹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일부 바이킹 이주민들이 유럽 지배 계층 엘리트에 동화되는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바이킹의 약탈, 무역 및 이주가 지리적으로 놀라운 규모였다는 내용이었다. 바이킹들은 바다와 강을 통해고향에서 2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까지 세 방향으로 이동했다.
북서쪽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캐나다 연안까지 갔으며, 남서쪽으로는 영국, 프랑스, 지중해까지 그리고 남동쪽으로는 러시아를 통해 흑해와 콘스탄티노플까지 갔다.
바이킹이 이렇게 이동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나 고국의 인구과잉이 한 가지 중요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뛰어난 조선과 항해 기술을 갖추고 있어 동시대 사람들보다 더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다른 요인들이 있었는데,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하면 부와 권력 그리고 토지와 지위를 얻을 수 있고, 폭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와 깊은 호기심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뒤섞여 세 방향으로 전개된 대대적인 바이킹 이주의 동기와 이주민들의 삶의 선택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많은 고고학 및 유전학적 증거가 남아 있어 바이킹에 대한 이해에 필요한 세부사항을 제공해주고 있지만, 많은 이주민들이 그랬듯이 정작 바이킹 본인들은 침묵하고 있다. - P161

아이슬란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주 이야기에서 예외인 경우였다. 한동안 그곳은 지구상에서 영주하는 원주민이 없는 마지막 주요 대륙 중 하나였으며, 870년대에 시작된 첫 정착 이후에도 대규모이주민 유입은 없었다. 약 100년 후 바이킹이 이주해 들어왔지만 그들이 경작할 만한 농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아이슬란드는 고립된위치와 낮은 이민율로 인해 유럽에서는 드물게 높은 수준의 유전적•문화적 연속성이 유지되었다. - P166

어떤 면에서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족보망은 의미가 거의 없으며 바이킹 유전자의 확산도 일시적인 흥미거리일 뿐이다. 우리가 야로슬라프, 보에몽, 정복왕 윌리엄, 영국의 해롤드를 정말 바이킹이었다고 생각하는지, 그들의 DNA 중 몇 퍼센트가 스칸디나비아 혈통인지는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두 가지 중요한 이주 이야기는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첫째, 바이킹과 그 후손은 이른바 중세 귀족의 중심부가 되어, 여왕이 외국인인 경우는 흔한 일이었고, 왕이 외국인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기회는 동유럽의 기독교 국가 국경 지역이나,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에 있었다. 따라서 십자군 원정은 특히 둘째 아들이나 사생아들에게 큰 기회였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 성지에서 무슬림들을 몰아내는 것이 사명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던것 같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한 이들의 사명은 곧 추악한 토지 수탈로 바뀌곤 했다. 그 당시 서유럽인들이 통치하는 십자군 왕국이 여러 개 수립되었으며, 그들은 서로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둘째, 이 이주 이야기는 바이킹에 관한 것이지만, 그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중심에는 미개하고 잔인한 야만인으로 묘사되는 북쪽의 이교도 집단이 있다. 이들은 기독교 중심의유럽에서 경멸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유럽 엘리트층에 편입되면서 귀족의 일원이 되었다. 바이킹과 그 후손들의 군사적 능력이 성공의 주요한 이유였지만, 현지와 적극적으로 동화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현지와의 동화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면서 스칸디나비아 이름과 언어, 관습 등 거의 모든 것을 포기했으며, 오딘과 토르 등자신들의 신들도 내려놓았다.
하지만 바이킹들은 그들의 역사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주했던 과거를 자랑스러워했고, 고대 북부 이교도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궁정 역사에 남겨놓았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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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심제도가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되는 사례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근래에 이르러 정치적 또는 사회적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사와 견해를 말이나 글로표명한 많은 사람들이 경범죄처벌법 제1조 제44호의 유언비어 날조유포라는 죄목으로 즉결심판에 회부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정치사회문제에관하여 표명된 사실적 주장이나 견해의 옳고그름이 즉결심판절차에서 판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즉심제도의 취지에 비추어 부적절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경범죄처벌법 제4조는 "이 법의 적용에 있어서는 국민의 권리를 부당하게침해하지 아니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다른 목적을 위하여 이 법을 함부로 적용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백히 돼 있는데, 근대사회에 있어서의 개인의 자유의 중핵이자 민주정치제도의 근간이기도한 국민들의 의사표현과 여론형성의 자유를 제약하기 위하여 전혀 그 입법목적을 달리하는 경범죄처벌법을 동원한다는 것은 위 남용금지규정의 명백한 위반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 P28

연전에 미국에서 레이건 대통령을 저격한 범인이 정신이상자라고 하여 석방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근대 형법이론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즉 근대적 의미에 있어서의 형벌은 자유의지에 의하여 저질러진 범죄행위에대하여 사후적 · 회고적인 비난과 응징으로서 주어지는 것이고, 그같은 일벌백계적 응징을 통하여 자유의지를 지닌 모든 시민들로 하여금 범죄행위를 스스로 회피하도록 유도하는 이른바 일반예방의 목적을 위하여 발동되는 것이다. 따라서 형벌은 범죄행위에 대한 윤리적 비난 가능성을 전제로 하며, 자유의지가 결여된 이른바 책임무능력자의 행위에 대하여는 발동될 수가 없는 것이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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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즉심과 보안처분
사법부와 독립성

문둥이 시인 한하운(韓何雲)의 시는 우리에게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의 쓰라린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게 하는 아픔을 준다. "성한 사람들인 우리는 그동안 우리와 "다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 버림받은 천형 (天刑)의 사람들의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우리가 그같은 부류에 속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에만 안도한 채 "성한 사람들 저희들끼리의"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입술로는 기억하나 가슴으로는 잊어버리는 「성서」의 숱한 구절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예는 아마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모든 것을 남김없이 수량화 • 추상화하려 드는 오늘날의 세태에서는 더욱그러하다. 그 한 마리의 양은 잊혀지고 무시되어도 좋은 것인가. 한 인간의 자유와 생명의 값어치는 다른 99명의 인간의 그것의 99분의 1로 계산되어야 하는가.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한다면, 지극히 작은 한 인간의 생명이 우주 전체와도 맞바꿀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잊혀진사람들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몽키차‘라고 불리는 호송차에 실려즉결심판소로 끌려가는 사람들, 한번 찍히면 다시는 지워지지 않는 반국가사범이라는 낙인 때문에 언제라도 영장 없이 구속되어 재판 없이 무한정 수감될 수있는 거의 완벽한 무(無) 권리상태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불우했던 과거의 범죄생활 경력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범법행위로도 본형 (本刑)에덧붙여 10년 또는 7년의 보호감호처분을 덤으로 선고받게 될 위험에 놓인 사람들. 우리가 늘상 우리와 무연(無)한 타인이라는 착각 때문에 외면하고 있는, 그들의 인권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관심이 현저하게 결핍되어 있는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22

즉결심판제도의 존재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어차피 경미하게 처벌될 사건에 대하여서라면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기 위한 절차적 엄격성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간이. 신속한 처리를 도모하여 재판절차 자체에서 오는 번잡과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국가는 물론이요 피고인 본인을 위하여서도 도리어 이익이 된다고 하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편의주의에 일면의 진실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으나, 바로 그 편의가 피고인의 권리에 대한 소홀한 취급이라는 희생을 대가로 하여 추구되어야한다는 게 문제다. 뿐만 아니라 이 제도의 운용 여하에 따라서는 이같은 인권의 희생이 절차적 편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값비싸고 심각한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유의, 이같은 함정에 대하여 특별한 주목과 경계가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현행 즉결심판에 관한 절차법에 규정된 즉결심판절차가 정식재판절차와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보자. 우선 재판청구권자가 검사가 아닌 경찰서장인데, 이것은 수사절차에 있어서의 적법성의 보장이 그만큼 약화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 피고인의 진술서와 기타 경찰서장이 제출하는 서류나 증거물만 있으면 개정(開廷) 없이도 심판할 수 있으며, 벌금 또는 과료를 선고하는 경우에 피고인이 출석하지 않는 때에는 피고인의 진술을 듣지 아니하고 형을 선고할 수 있게되어 있다. 이같은 경우에는 피고인의 유·무죄와 그 정상(情狀)에 관한 판단이 사실상 경찰 조사과정에서 끝나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꼴이 된다고 해도과언이 아닐 것이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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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정착시키고 인구를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또 반대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주시키라. 그리고 가장 큰 대륙을 통혼과 친족 관계를 통해 화합과 우의로 이끌라

알렉산더는 아주 거대한 대륙 규모의 사회적 통합을 꿈꾸었던것 같다. 그는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또 제국의 다른 민족들을 통합하기 위해 다른 대륙의 사람들 간의 대대적인 양방향 국가 주도 이주와 통혼을 제안했다. 또한 아시아인과 유럽인이 동등하며, 이주와 혼인을 통해 양측의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친 갈등을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 군인들이 새로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에 정착할 수있도록 장려했고, 그들이 현지 여성들과 결혼하게 함으로써 그는 그 과정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그쳤고, 양방향이 아닌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한 방향의 이주일 뿐이었다. 그가자신의 계획들을 어떻게 진행할 생각이었는지, 여성의 이주도 계획했는지, 그리스 도시국가에도 페르시아인들을 정착시킬 예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후계자들은 세상을 바꾸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이 그리스 혈통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자랑스러워했으며, 그의 이념을 실행할 의도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거대한 이주 계획은 그와 함께 사라졌다. - P96

18세기 들어 여러 학자들이 산스크리트어와 서양의 고전 언어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 언어들이 단일 어원에서 유래했으며, 인도 북부, 이란 및 유럽 대부분의 언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상상의고대 민족이 탄생했다. 그들은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통과해 이주했으며, 그들의 유산은 서쪽의 아이슬란드어에서 동쪽의 벵골어에 이르기까지 서로 관련된 매우 광범위한 현대 언어로 이어졌다. 그러나인도-유럽인이 정확히 어느 지역에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모르고, 그들의 대규모 이주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도 없었으며, 대규모 인구 이동으로 언어가 확산됐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일부 유럽 학자들은 자신들이 답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아리아인에 대해 언급한 고대 자료에서 몇 가지 단서를 발견했는데,
그들은 매우 허술한 서면 증거를 바탕으로 초기 산스크리트어 문헌중 리그베다 Rigveda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브라만교 경전- 역자 주)에 나오는 아리아인들은 서쪽에서 온 이주민이거나 침략자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에 따라 아리아인의 조국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지역들이제시됐는데, 그곳에는 독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주장들은 훨씬 더허술하고 인종차별로 가득 차 있었지만 여러 나라의 많은 학자들이아리아인이 원래는 금발에 파란 눈과 하얀 피부를 가진 독일인이고,
그들이 북유럽에 있는 조국을 떠나 멀리 이주하여 통혼함에 따라 신체적 특성들이 희석됐다는 개념을 수용했다.
영국 태생으로 독일에 살고 있던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Houston Stewart Chamberlain이라는 작가가 1920년대에 이러한 개념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에 알려준 핵심 인물이었다. 오래지 않아 나치는 독일인이 원조 아리아인이며 지배 인종이라는 이념을 채택했다. 그들은 심지어 고대 인도의 스와스티카 swastika 문양을 당의 상징으로 차용했다. 히틀러가 패배한 이후로 서방에서는 신나치 집단을 제외하고는 아리안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인도 이외 지역에서는 스와스티카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 P101

인도에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알지도 못하는고대 이주에 대한 논쟁이 그 정도로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카스트 제도, 성별, 언어, 종교, 피부색 그리고 이주 같은 현대 인도의 정체성을 놓고 벌이는 투쟁의 일부다. 그 정체성에 대해 깊은 의견 충돌이 있으며, 이 문제 하나 하나에 깊은 분열이 담겨 있다. 아리안 논쟁은 그 모든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렇게 빈약한 한 단락이 아니라 별도의 책으로 다뤄져야 할 정도로 광범위한 주제다. 그러나 인도의 권력이 대체로 아직도 피부가 더 희고, 카스트 계급이 높고,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북부 남자들의 손에 놓여 있다는 점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유전학자들의 증거와 주장을 믿는다면 그들은 약 4천 년 전에 인도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유럽어 사용자의 기원을 찾는 데 있어서 해결해야 할 더광범위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 대초원이든 다른 곳이든 조상의 모국이 존재한다는 개념 그 자체다. 우리에게 그런 근원이 있다는 전제하에 모든 논쟁이 이루어졌지만, 사실은 그 반대가 진실에 더 가깝다. DNA, 고고학, 언어 분석 또는 문화적 전통 등을 통해 우리의 근원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 지역들은 기껏해야 고대 조•상들이 통과한, 깊은 역사 속의 임시 거주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 P106

그리고 그들이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파시족이 배를 타고 구자라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서로 언어가 달라 그곳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지역의왕은 자신의 영토에는 이주민을 받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정중하게 표현하기 위해 찰랑찰랑할 정도로 가득 찬 우유 항아리를 내밀었다. 그러자 이주민들의 지도자였던 조로아스터교 사제는 그 항아리에 설탕 한 숟가락을 넣었고 우유는 넘쳐흐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달고 맛이 좋아졌다. 그의 지혜 덕분에 파시족은 구자라트에 머물도록 허락을 받았다. - P109

로마는 로마 공화국을 종식시키고 제국으로 탄생했다. 이때쯤 ‘로마‘라는 단어에 문제가 생겼다. 물론 로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를 의미한다. 그러나 로마가 오지 너머까지 정복하여 세력이 커지면서 로마는 도시 이상을 의미하게 되었다. 로마는 더 이상 일개 도시가 아니라 제국의 수도, 문명의 본보기, 군사적·종교적 권세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고 로마는 이제 한 도시가 아니라 그들에게 정복당한 모든도시 국가를 통합하는 이름이 되었다. 비록 그들 대부분이 온전한 시민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국경 안에 사는 모든 이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인이었다.
로마라는 개념은 점점 더 성장하여 도시로서의 로마 없이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로마가 바퀴라도 달린 것처럼 스스로 로마인이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굴러가 정복할수 있는 것 같았다. 오비디우스 시대에 이르러 로마는 북해에서 사하라까지, 대서양에서 흑해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 시에 한 발짝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시민‘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시민권을 샀을 수도 일을 통해 얻었을 수도, 또는 새로운 식민지에 정착한 군인일 수도 아니면 그냥 로마 시민의 자녀일 수도 있었다. - P121

야만인 barbarian이란 개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복잡한 개념이다.
그것은 광범위한 다른 용어 집단을 파생시킨다. 대부분은 ‘야만스러운‘, ‘야만성‘과 같이 경멸감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이지만 때로는 베르베르족 Berbers, 바르바리 해안 Barbary Coast처럼 그냥 서술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는 로마인들의 변화하는 세계관, 좀 더 구체적으로 로마인들이 국경 근처에 사는 외부인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이다. 원래 ‘야만인‘은 그리스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를 묘사하는 의성어였으며, 헤로도토스 같은 초기 그리스 작가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 가치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중립적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후기 그리스에서는 이 말이 야만성과 어리석음을 함축하는 부정적인 용어가되었고, 주로 라틴어에서 그랬다. 하지만 ‘로마인‘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제국 성장에 따라 달라진 것처럼 ‘야만인‘의 의미도 달라졌다. 그리고 ‘야만인‘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경우 ‘로마인‘의 반대말이되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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