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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처럼 문이 열리고 - 뉴베리상 수상 작가 케이트 디카밀로의 행복한 크리스마스 선물 ㅣ 날마다 그림책 (물고기 그림책) 22
케이트 디카밀로 글, 배그램 이바툴린 그림, 서석영 옮김 / 책속물고기 / 2015년 1월
평점 :
아주 평이한 내용이다. 케이트 디카밀로와 같은 대가가 아니라도 쓸 수 있을 듯한 그냥 무난하고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
누군가는 "별거 아니네. 그냥 이웃을 돕자는 얘기야." 해버릴 수 있을 듯한 이야기.
근데 뭐지? 마법처럼 문이 열리고,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막혔던 대사가 큰 소리로 터졌을 때 울컥해지는 이 감정은?
소녀가 터뜨린 대사에서 벅차오르는 이 느낌은?
교회를 다닌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성탄절이 예전처럼 설레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 지도하는 일과 식사준비하는 일 등이 부담되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는 숙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어린 시절, 그리고 젊었던 시절 성탄절을 준비하며 느꼈던 설렘이 그대로 다시 느껴진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성탄절 전야 풍경이 비슷하다.)
성탄절 공연에서 프란시스는 천사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창밖으로 내다보는 풍경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거리의 악사 할아버지와 원숭이다.
원숭이는 양철컵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전을 얻고, 악사는 음악을 들려준다. 프란시스는 그 음악이 꿈속에서처럼 슬프고 아득하다고 느낀다.
프란시스는 궁금하다. '할아버지와 원숭이는 밤이 되면 어디로 가는 걸까?'
엄마에게 묻지만 엄마는 관심이 없다. 프란시스의 무대옷에만 신경을 쓴다.
밤 열 두시에 프란시스는 거실로 나와 손전등을 들고 거리를 내다본다. 그 시간에도 악사와 원숭이는 거리에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그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면 안되냐고 엄마에게 물었다가 핀잔만 듣는다.
드디어 프란시스의 연극이 있는 저녁이다. 엄마와 교회로 가는 길에, 프란시스는 악사에게 달려가 원숭이의 컵에 동전을 넣고 연극을 보러 오라고 초대한다.
"거리의 악사는 프란시스에게 웃어 주었지요. 그런데 두 눈이 슬퍼 보였어요."
프란시스는 그 눈을 가슴에 담았던 것 같다....... 연극은 시작되었으나 집중하기가 어렵다.
여기서 그림작가에 대한 평 하나.... 연극을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 - 목동 역할을 하는 아이들과 천사 역할을 하는 아이들 모두... (아 참, 얼굴은 안보이지만 낙타 역할을 하는 아이들도) 모두들 어찌나 천사같이 예쁜지.... 설렘으로 공연을 준비하던 그 옛날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하다. 긴장한 프란시스의 표정, 환하게 외칠 때의 표정, 마지막 장에 차와 간식을 나누는 모든 이들의 흡족한 표정 등.... 채도가 낮은 유화 느낌의 그림에 온갖 표정과 느낌이 살아있다.
프란시스의 차례가 되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모두가 초조해하며 숨죽이고 기다리는 그 순간,
마법처럼 문이 열리고, 원숭이를 안은 할아버지가 들어선다. 안심한 프란시스의 입에서 드디어 대사가 나온다. 천사의 메시지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커다란 기쁨의 소식을 가져왔노라!"
한 마디 덧붙이기까지.
"커다란 기쁨의 소식을."
30년이 넘는 교회 생활 동안 아마 이 구절을 20번은 넘게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책에 박혀 있는 이 구절에서 비로소 내 마음이 격동할 줄이야.....
한국 교회는 오늘도 기쁨의 소식을 외치고 있으나 그 울림은 강단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만 겨우 퍼져나갈 뿐이다. 예배당 문턱을 절대 넘지 못한다.
그래서 쿼바디스라는 영화는 수백억을 지어 만든(수천억인가? 잘 모른다) 어떤 큰 교회를 비판하며 영화를 시작한다.(이 영화를 꼭 볼 생각이었는데 보진 못했다. 주워 들은 내용이다.)
복음이 더이상 복음이 아니고 시궁창에 처박혀 비웃음과 질타를 받고 있는 요즘, 작은 천사 아이의 입에서 나온 한 구절에서 난 '복음'을 들었다.
예수님이 오셨다. 그가 오신 이유는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도 아니고 '너희들끼리 사소한 일이 뭔 대단한 일인양 내 이름을 걸고 핏대 올려 싸워라'는 더더욱 아닐 터.
할아버지가 들어오신 것, 그리고 성탄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누는 것. 이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 그것이 복음일 것이다.
펼친 화면에 그려진 마지막 장면엔 모두가 평화스럽게 웃고 있다. 할아버지도 엄마도 아직도 연극 분장을 다 벗지 못한 아이들도, 서빙을 하느라 분주한 집사님(?)들도. 원숭이까지도.
어떤 이유에서든 할어버지가 소녀의 초대를 거절했다면, 또는 현관 앞에서 차단 당했다면 이 장면에 웃음은 있되 평화는 빠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뭐가 빠졌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기적인 복음을 만들어 그것으로 자기 앞가림을 하는 자들 때문에 예수님은 오늘도 수난 당하시고 이 소박한 기쁨의 자리에도 예수님의 자리가 없는 것 같다. 정말 슬픈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은 나를 향하여 하는 말이다. 얼마 전 햑교에서 벌점을 받은 아들에게 내가 이런 말을 했었다.
"너는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든 자들과 니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라. 니가 속한 집단의 사소한 규율도 지키지 못하면서 교회 다닌다고 말하기 창피하지도 않냐?"
사실 이건 나에게 돌려야 할 말이다. 그래서 어디 가서 교회다닌다는 말을 잘 못한다.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게 도와주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편안함에, 게으름에, 욕심에, 집착에 그 무엇이든 어딘가에 매몰되어 있으면 예수님이 주신 복음을 받아들이기 무척 어렵다. 나는 저 중 여러가지에 해당한다. 언제쯤 나는 그것을 깰 수 있을까. 언제쯤 이 소녀의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이 그림책은 심각한 도전을 나에게 던진다. 주제에 욕심을 좀 내자면 나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에 던지는 도전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