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ㅣ 햇살어린이 2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현북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학교에서 일어나는 아이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와 양상을 루이스 새커만큼 정확하게 꿰뚫고 묘사하는 작가를 보지 못한 것 같다.
빨간머리 마빈 시리즈 중의 한 편인 <왜 나한테만 그래?>를 3학년 아이들과 읽었는데, 왕따가 일어나는 상황과 동조자 또는 방관자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건강하게 극복을 했고, 그 명쾌한 해결이 현실에선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저학년 아이들과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에는 아주 좋은 이야기였다.
이 책은 350쪽이나 되는 분량이 말해주듯 저학년이 보기엔 무리가 있다. 5,6학년 또는 중학생이 보면 좋을 것 같다.
아이들에 따라 독서수준이 천차만별인데 이 정도의 책을 읽다보면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아이들에게 읽히려면 걱정스럽다. 5,6학년 중에 이 수준을 뛰어넘는 아이도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어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초라한 독서수준을 갖고 있다. 그건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어른들의 기대가 너무 높은게 문제지.
제목으로 잡은 '잃어버린 얼굴'의 의미와 상징성에 감탄한다. 나는 '내 얼굴'을 가지고 살고 있는 걸까?
베이필드 할머니를 마녀로 생각하는 동네 아이들은 그녀가 남편의 얼굴을 벗겨내서 거실 벽에 걸어놨으며 그 남편은 얼굴 없이 숨어 살다가 죽었다는 괴담을 주고 받는다.
할머니의 저주와 관련된 긴장감이 높아질 때, 독자들은 살짝, '뭐야... 그럼 데이비드도 얼굴이 어떻게 되는 건가?'라고 걱정할 수도 있는데
끝까지 읽어보면 명확해진다. 작가가 사용한 '얼굴'의 의미가.
사실은 끝까지 가지 않아도 중간쯤에서 아이들의 대화 중에 그 의미를 풀어 놓았다. 데이비드와 래리의 대화다.
"넌 방금 네 얼굴을 잃어버렸어."
"무슨 소리야?"
"모가 늘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잖아. 그거하고 같은 거야.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일본 사람들은 얼굴을 잃었다고 말해. 방금 걔들이 우리 쪽으로 걸어 왔을 때, 우리도 걔들만큼이나 이 길을 걸을 권리가 있었어. 근데 넌 비켜셨잖아. 그러니까 얼굴을 잃은 거지."
얼굴을 잃어버렸다는 건, 나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거다. 결국 나의 정체성을 포기했다는 거고.
역자는 이 책이 '또래압력'이라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찌질이처럼 보이기 싫어서" 로저 일당의 악행에 가담을 했다. 그 아이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하면서 늘 그 주변을 맴돈다.
어른들의 눈보다 또래의 눈이 더 무서운 사춘기 무렵의 아이들은 이렇게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이유로 막나간다. 또래의 눈이 더 무섭기 때문에 어른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으로 주변의 환호를 받을 수 있다면 서슴지 않고 그 일을 한다. 그들이 타인에게 요구하는 '인권 존중'은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일 뿐 내가 남한테 할 필요는 없다는 듯이 행동을 한다. 주변인들은 화가 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아이를 비난하게 되고 아이는 거기에 상처받아 더 엇나간다. 악순환이다.
요즘은 학교폭력을 다룰 때 가해자보다도 방관자에 더 집중해서 접근하자는 이야기들을 한다. 또래 아이들이 방관자에서 벗어나 따가운 눈"총"을 쏘아주면 가해자들의 거침없는 악행에 제동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 힘은 어른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이 또한 '또래압력'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니 또래압력은 부정적 압력도 있지만 긍정적 압력도 있다. 로저 일당을 쫒아다니던 데이비드가 부정적 또래압력에 놓여 있었다면 각자의 개성에 충실한 모와 래리와 삼총사가 되었을 때, 그들의 조언은 긍적적 또래압력으로 작용했다. 마침내 데이비드는 "너의 도플갱어가 네 영혼에 역류할 거야!" 라는 저주를 풀러 할머니를 찾아간다.
'3인의 법칙'이라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교실을 뒤덮은 부정적인 또래압력에 대항하려면, 일단 3인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거다. 3인의 힘은 지하철 승강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움직여 열차를 밀고 사람을 구해내는 일을 해냈다. 피해자를 고립시키는 것과 몇 명이라도 옆에서 지원해 주는 것과는 극명한 차이가 난다. 홀로 두면 구해 낼 수 없는 깊은 골짜기로 빠지지만 조력자의 힘은 상황을 반전시킨다. 문제는 이 법칙에 확신을 가지고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가 저주를 풀러 갔을 때, 사실은 저주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 대목이 내겐 가장 인상깊었다. 그동안 데이비드를 괴롭혔던 건 자신의 섬세한 양심과 죄책감이었던 것이다. 양심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에게 벌을 내린다. "우리가 사는 이 냉정한 세계에서는 그게 저주일 수도 있지"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하지만 독자들은 안다. 그건 극히 일부분만 그렇다는 걸. 혹은 전혀 사실이 아닐지도.
나와 이땅의 아이들이 내 얼굴을 잘 챙겨서 살 수 있길 바란다. 혹 남의 얼굴을 뒤집어 쓰고 있는 아이가 보이면 "얘, 그거 니 얼굴 아니야." 라고 말해줄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내게 있으면 좋겠다. 사실 그 반응이 난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