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이유정 푸른숲 작은 나무 13
유은실 지음, 변영미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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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실 작가의『만국기 소년』을 읽었을 때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재미는 있었지만 뭐랄까... 아팠다. 아니 그보다는, 불편했다..? 왠지 아이들에게는 별로 권하고 싶지가 않았다.

중학년 정도를 대상으로 좀 더 짧고 쉽게 나온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이제는 불편하지도 않았다. 내가 작가의 코드에 익숙해진 것인가? 아니면 작가가 날카로운 부분을 좀 깎아낸 것인가? 그건 모르겠다. 다 읽자마자 초등학생인 아들에게 내밀었다. 어떤 곳에서는 저학년용으로 추천하기도 하던데, 책이 얇기는 하지만 좀 공감하면서 읽으려면 고학년도 괜찮을 것 같다.

첫 번째 이야기『할아버지 숙제』는 참 고소한 이야기다. 으스대고 자랑할 수 있는 할아버지를 기대하고 집으로 달려갔건만,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은 왜 한결같이... 주정뱅이 아니면 노름꾼이었는지... 숙제를 앞에 둔 경수는 좌절한다. 사실을 알려주는 할머니 앞에서 화를 내는 아빠보다, 담담하게 사실을 알려주는 엄마가 여기서는 훨씬 현명해 보인다. 어쨌든. 경수는 숙제를 다 했다. 할머니와 엄마의 코치를 받아서. 술주정뱅이였다... 라고 쓰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게. 다 쓰고 읽어본 경수는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부끄럽지도 않다고 한다. 그럼 됐지 뭐... 사는 게 다 그런거지. 세상에 다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와 다 자랑스러운 아버지만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사람 다 거기서 거기다. 핑계 대지 말고 내가 잘 살아야 되는 거다. 생각해보니 나도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해 주고 싶었다. 내가 자랑스러운 엄마가 아니라서 그런가... 어쨌든, 첫 이야기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냥』은 엄마의 출산 때문에 고모집에 며칠 살게 된 진이의 ‘해방기’이다. 아빠의 누님인 고모는 나이만큼 마음도 넉넉해서 아이를 닦달할 줄 모른다. 자기 집보다 훨씬 좁은 고모집을 나오면서 진이는 ‘고모집은 왜 그렇게 크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새장에 가두는 부모들이 한번쯤 생각해야 될 대목이다.

표제작인『멀쩡한 이유정』은 다른 건 멀쩡한데 심각한 길치인 유정이의 이야기다. 4학년인데 집을 못찾아서 늘 동생과 함께 다녀야 하는 유정이. 누구에게나 잘 안 되는 일이 있다. 나만 해도, 운전을 못한다. 배울 엄두도 내 본 적이 없다. 내 차 망가지고 돈 드는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 다치게 하면 평생 어떻게 살아가나? 이런 두려움 때문에 누구 말마따나 '사지 멀쩡하고 대학까지 나온^^;;' 내가 운전을 못한다. 솔직히 나는, 자전거도 못 탄다. 가끔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 같은 모지리도 없어” 이러고 떠들고 다닌다. 하지만 난 <멀쩡히> 직장생활 잘 하고 살아간다. 그러니, 남의 약점에 호들갑을 떨지 말고 이해하고 배려할 일이다.

『새우가 없는 마을』 난 이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을 뿐 아니라 눈물까지 났다. 빈병 줍는 일로 살아가시는 생활보호자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살아가는 기철이. 조손간의 대화가 어찌나 실감나는지, 난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읽기까지 했다. 난생 처음 <진짜 짜장면>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 왕새우를 먹으러 갔다가 대형마트와 카트에 좌절하고 발길 돌릴 때의 대화.... 작가 특유의 유머가 들어있긴 한데 왜 눈물이 나는지....

『눈』을 읽으며 나는 작가가 혹시 하나님을 믿는 분인가 궁금해졌다. 그간의 작품을 볼 때 무신론자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빠를 잃고 매사에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영지를 놓고 엄마는 이렇게 기도한다.
“우리 영지는 불공평해서 억울한 게 많습니다. 우리 영지가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아빠를 살려달라는 기도도 들어주시지 않던 하나님이 어찌 이런 기도는 금방 들어주시는지, 바로 다음날 옥상에서 눈사람을 만드는 영지 눈앞에 장갑도 못끼고 눈을 만지는 옆집 옥탑방의 아이가 나타난다. 장갑이 두 개인 건 어떻게 알고... 엄마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걸 끝까지 방해하려던 영지는 결국 포기하고(장갑을 꽁꽁 뭉쳐 옆집 옥상에 던져주고) 새 장갑을 끼며 되뇌인다. “이건 못 줍니다. 절대 못 줍니다.”
난 여기서 하나님의 미소를 보는 듯 했다. 작가는 어떤 뜻에서 쓰셨는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은 요지경이고 어디에도 하나님의 뜻 같은 건 없어 보인다. 그리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내 뜻이 맞다고 부르짖고 싶은 순간들이 종종 닥친다. 그 때 내가 하는 행동이, 영지와 크게 다를 것 없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느낀다. 그것까지도 예쁘게 보아주셨다는 것을...

쓰다보니, 어린이용 짧은 단편에 이렇게 인생의 이야기를 많이 담을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다시 한 번 존경스러워진다. 자기가 살아 온 세월만큼, 겪고 생각한 것만큼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들도 이 책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게 어른의 욕심이라면 그냥, 재미있게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책이다.


(2009년에 다른 곳에 썼던 것을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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