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늑대들이 사는 집 - 제4회 비룡소 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ㅣ 난 책읽기가 좋아
허가람 지음, 윤정주 그림 / 비룡소 / 2015년 9월
평점 :
작년에 이야기 만들기 수업을 좀 업그레이드 하면서 이야기의 첫머리를 몇 개 만들었다. 맘에 드는 첫머리를 골라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는 수업이었다. 그 첫머리 중 하나는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비어있던 옆집에 묘령의 사람이 이사를 왔다. 나는 호기심이 생겼지만 이사온 날 그와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며칠 후, 놀이터에 가려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마침 나오던 그와 마주쳤다. "안녕" 그가 인사를 건넸다...."
많은 아이들이 이 첫머리를 골랐다. 그런데 아이들이 쓴 이야기를 보고 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모든 아이들이 유괴와 끔찍한 범죄를 연상해서 글을 썼던 것이다. 결말은 다행히 범죄에서 벗어난다든지, 아니면 비극으로 끝난다든지 조금씩 달랐지만 범죄를 연상한 건 누구나 똑같았다. 나라면 "이 의문의 이웃을 처음엔 경계했지만 그가 나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해서 우리는 행복한 모험을 했다...." 이런 식으로 끌고 나갔을 것 같은데, 정말 충격이었다. 한편으론 슬펐다. 우리가 가르친 대로 아이들은 사고하고 있을 뿐이다. 모르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의심해야 하고 조금의 빈틈도 주어서는 안된다. 때로는 아주 가까운 곳에 나를 노리는 범죄의 손길이 있다.... 우리가 하는 안전교육의 내용을 까놓고 말하면 이런 말이 된다.
그런데 <늑대들이 사는 집> 이 책은 역사깊은 범죄적 이미지까지 깨어놓는다. 바로 늑대의 이미지다. 늑대같은 놈. 이거 한마디면 대충 통할 수 있는 이미지에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혼합되어 있지 않은가. 음흉함, 사나움, 잔인함 등.... 이 책에서 그것이 깨어지는 과정이 얼마나 따뜻하고 아기자기한지 흐뭇하다못해 눈물겨울 지경이다.
'늑대들이 사는 집'엔 뾰족귀, 넓적귀, 처진 귀 이렇게 세 마리의 늑대가 산다. 세마리가 각각 주인공인 세 편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뾰족귀가 주인공인 표제작 <늑대들이 사는 집>에서는 눈보라가 심한 어느날 양 오누이가 '제발로' 그들의 집을 노크한다. 늑대와 양이라니. 수많은 옛이야기에서 다룬 이들의 뻔한 관계. 모든 상황은 그 뻔한 관계를 향해서 가는데도, 결국 뻔함을 벗어나는 이 재미와 훈훈함.^^
두번째 이야기 <버섯국>에서는 넓적귀가 주인공이다. 세 늑대의 놀이이자 일과인 카드놀이를 하다 꼴등을 한 넓적귀는 벌칙으로 버섯을 구하러 나간다. 하지만 버섯 대신 몽글왕자를 만나게 되고 그를 돕는 기사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바람에 버섯을 구해오지 못해 친구들에게 한소리를 들었지만 다음날 그들의 뒷마당에는....
세번째 이야기 <이상한 나무뿌리>에서도 늑대들은 카드놀이를 했고 벌칙으로 지하실에 다녀올 늑대를 뽑았다. 이번엔 처진귀였다. 지하실에 내려간 처진귀는 벽돌 틈 사이에서 조그만 나무뿌리를 보았다. 마싹 마른 나무 뿌리가 불쌍해 보인 처진귀는 물을 흠뻑 주었다. 그러자 나무뿌리는 무섭게 자라는 것이 아닌가? 빨리 잘라버리지 않으면 기둥을 휘감고 금방이라도 집을 무너뜨릴 기세였다. 늑대들은 톱을 가져왔지만 누구도 나무를 차마 자르지 못했다. "이제 따뜻한 집에서 편하게 카드놀이하는 것도 끝이구나..." 라며 슬퍼하면서도 말이다.
다행히 엄마가 가르쳐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 세마리 늑대.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고정이미지의 늑대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인정 많고, 마음 약하고, 생명을 사랑하고, 친절하고 배려하는 어리고 귀여운 늑대! 친구로 삼고 싶은 다정하고 친근한 늑대의 이미지만 살아남아 있었다.
작품을 통해 이렇게 이미지의 전환을 가져오는 작업은 작가에겐 어려운 과제이면서도 큰 쾌감을 가져오는 일이었을 것 같다.(그래서 작가분들이 부럽다^^;;) 독자로서도 참 재미있고 즐길만한 시간이다. 읽어주기로도 아주 좋은 책이다. 연작 세 편이니 한 번에 한 편씩 읽어주면 되겠다.
이 책을 통해 주변인들의 선함에 대한 환상을 갖고 경계심을 늦추는 것이 좋을까? 굳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은 현실이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착한 존재들이 훨씬 더 많고 선한 의도가 앞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니 나도 착한 삶을 사는게 바보는 아니라는 것도.
뭐 이러니저러니를 따질 것 없이 재미있으니까 읽는다. 그것이 이야기의 본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