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단편동화집을 한 권 읽었다. 김태호 작가의 <제후의 선택>이라는 책이었다. 표제작을 비롯 9편의 작품이 실려 있었다. 책이 두껍지 않은데 9편이니 대부분 길이가 짧았다. 하지만 의미를 곱씹으려면 그리 빠르게 넘길 수가 없는 작품들이었다. 재치가 번득여 웃음짓기도 했고, 경고가 엄중해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이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작가의 특징이 어떤 것 같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고 이 책만 가지고 본다면1. 주인공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능청스럽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목이>가 대표적인데 '친엄마가 아닌 엄마'에게 쫓겨나 아파트 복도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은 한참 읽다 보니 모기였다. 그러고 보니 제목이 '나목이'! 와~작가는 짖궂다. 좀 얄미울 정도.^^;;표제작인 <제후의 선택>에서도 주인공이 고양이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는 모습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불러온다. 사람이 아닌거야...? 역시, 제후가 애완동물로 키우던 흰 쥐의 변신이었다.위 두 작품처럼 정체 파악이 어려운 경우는 아니지만 <창 안의 아이들>에서 아이들의 말과 표정, 행동들도 무심코 보다가는 오해할 수 있다. 아이들은 모두 '창 안에서만' 떠들고 날뛰고 있다. 마지막에 강미 한 명만 대화창을 빠져나와 현장에 온다. 한 목숨이 꺼져가는 장면을, 그래도 연수 혼자 지키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창 안에서만 떠들기' 우리가 늘상 하고 있는 짓이 아닌가. 부끄러웠다.2. 상징성이 매우 강하다. <나리꽃은 지지 않는다>에서 군인들은 나리꽃들을 함부로 꺾어 가져간다. "꽃들에게 사과하세요.""우리는 꽃 따위에게 사과하지 않아""꽃들이 사라졌으니 곧 잊힐거야."이런 말들 사이에서 연상되는 것이 또렷이 솟아올랐다. 물론 누구나 다 똑같이 보이고 느끼지는 않겠지만.<꽃지뢰>라는 작품도 그렇다. 지구인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아토라는 행성을 발견했다. 지구인의 딱한 사정을 알고 아토인들은 협조를 해주었는데 지구인들은 그것을 원수로 갚았다. 전쟁이 벌어졌고 서로가 뿌린 돌지뢰와 꽃지뢰는 아토별을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고 말았다. 지구인들은 아토인들을 불행에 빠뜨렸고 자신들도 행복해지지 않았으며 목적한 것도 손에 넣지 못했다.3. 패러디와 언어의 재치가 넘친다. 난 첫작품 <남주부전>이 가장 재미있었다. 전업주부인 담이아빠는 정수기 수리기사 구과장의 꾀임에 빠져 용사장 앞에 끌려간다. 용사장은 역시나 '간'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 아닌가! 살려달라는 담이와 아빠 앞에 그들은 커다란 가마솥을 끌고 온다. 그들은 역시 '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업주부 담이아빠는 이렇게 해서 용왕님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ㅎㅎ지난달에 우리는 동형어(동음이의어) 수업을 했다. 그때 난 "우리말의 동형어는 수많은 농담과 개그의 소재가 되곤 하지요."라고 설명했지만 실제로 그 개그를 아이들에게 펼쳐주진 못했다. 아깝다!! 이 동화를 읽어줄 것을....^^ 나이든 내가 동화를 읽는 것은 그 자체로 재미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생생한 수업 텍스트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건졌다!^^4. 교훈적이지는 않으면서 메시지가 적당하다. <게임 중>이라는 작품에는 아들의 친구들과 신나게 놀아주는 아빠의 모습이 나오는데, 읭? 이건 뭐 놀아준다기보다 놀이를 주동한다. 아빠는 게임중독이었던 것이다. 게임중독 아이와 그걸 꾸짖는 부모가 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섬뜩하다. 이 작품도 품에 끼워놨다가 필요하면 써먹을테다.요즘 우리반 아이들과 나라별, 작가별 책읽기를 하고 있는데 아이들과 깊이읽기를 시도하다 보면 꽤 수준높은 작품에 관심과 호의를 보이는 아이들이 늘어난다. 이 책도 그렇게 읽을 만한 책인 것 같다. 아이들의 해석과 감상이 무척 궁금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