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복 선생님의 <판타지 동화세계>에서는 소위 생활동화라 부르는 장르를 상당히 비판한 내용이 나온다. 이 책들을 읽다가 그 부분이 생각나 다시 찾아보았다.


"요즘 아이들이 불행하게도 생활동화(교훈동화)를 읽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유가 있다. 제도권 교육이 갖고 있는 문제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독후감을 강요한다. 아이들은 독후감 숙제에서 쉽게 놓여나는 방법으로 생활동화를 찾는다. 주제가 뻔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동화 읽기가 마치 답이 들어 있는 시험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 아이들은 동화를 읽고 작가가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보여준 해답을 자신의 경우로 바꿔 나도 이런 사람이 되겠다 하면 금방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 이래서 독후감용 동화가 생겨나게 되었고, 제도권 교육에서 진정한 문학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생활동화는 끊임없이 팔려나가고, 작가들은 또한 끊임없이 써나갈 것이다.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되어 우리 아동문학은 지금까지도 생활동화 시기에 갇혀 있다."


제도권 교육에 탓을 돌리는 이 대목을 읽고 살짝 억울한 면도 없지는 않았지만 내심 뜨끔했었다. 나도 아이들에게 읽힐 책을 고를 때 소위 <건강한 주제>를 찾는 편인데, 그게 문학적 완성도나 아이들의 내면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와 상관없는 어른의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재복 님의 이 책이 나온지 10년이 넘었으니 그동안 상황이 많이 달라지긴 했다. 요즘 나오는 어떤 동화는 도대체 주제가 뭔지를 모르겠다. 그냥 팍팍하고 잔인한 현실? 찌질한 인간의 본성? 이런 걸 말하고 싶어서 동화를 썼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나도 주제가 너무 표면에 드러난 동화는 싫다. 얘들아 너희들에게 이걸 심어주려고 썼어~ 라고 말하듯이 표지에 인성동화라 명시하고 심지어는 배려, 자신감 등의 덕목까지 명시한, 제목만 읽어도 대충 독후감을 쓸 만한 그런 동화들 말이다. 요즘도 이런 책들이 많이 나온다.


봄 단기방학을 위해 도서관에서 집어온 책 중 두 권을 첫날에 읽었다. 두 권 다 주제가 지나치게(?) 선명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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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책상 귀신 / 권타오 / 교학사


권타오 님의 다른 동화를 상당히 괜찮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책은 좀 심했다.

중국계 다문화 아이를 괴롭히던 악동대장 치웅이가 책상귀신(중국에서 왔으니 차이나 책상귀신)에게 혼쭐이 나고 반성하여 화해하는 훈훈한 결말이

내 기준으론 너무 유치해서 입맛이 떨떠름했다.

모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인데 “책상 귀신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로 다문화와 왕따 문제를 솜씨 있게 그려 낸 작품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열린 마음으로 다문화 가정 아이들과 소통할 것을 효과적으로 알려 준다.”라는 심사평이 전혀 공감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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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트러블메이커 / 앤드루 클레먼츠 / 비룡소


앤드루 클레먼츠의 작품은 챙겨 읽는 편이다. 프린들 주세요는 장기간 우리학교 권장도서 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있고 성적표, 잘난척쟁이 경시대회 등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근데 이 작품을 읽다가 중반부도 되지 않아 깜짝 놀랐다. 

헉, 뭐야, 이거 너무 심하게 교훈적인거 아냐? 이렇게 표나게 교훈을 말해도 작품이 되는거야? 

학교에서 눈살 찌푸려지는 말썽만 골라 부리고 그걸 의기양양해 하는 클레어. 몇 년에 한 번 정도는 꿈에서도 보기 싫은 아이를 만날 때가 있는데 딱 그 스타일이다.

이 아이가 못된 짓에 자부심을 느끼는 건 형의 영향이다. 소년원에서 출소한 형에게 그동안의 무용담을 들려주고 싶어서 안달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형은 단호한 모습으로 그동안의 사고치는 모습을 벗어버리고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할 것을 요구한다.

다른 권위는 다 무시해도 형의 권위만은 무시할 수 없는 클레어는 형의 지시대로 제멋대로인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고, 무난한 옷을 입고, 괴롭힐 먹이감이 눈에 보여도 참느라고 애를 쓰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 동화는 이렇게 놀라울 정도의 교훈성을 초반부터 보여주다가 그 맥을 쭉 이어가며 큰 반전없이 끝이 난다. 이렇게 되면 이 작품은 이재복님이 비판하던 그 <답이 들어있는 시험지 같은 교훈동화>에 속하는 것인가?


이상한 점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나귀 그림(교장선생님을 놀리려고 그린)으로 시작한 동화는 또다른 당나귀 그림(당나귀 가면를 벗는 그림)으로 끝나는데 그 연결이 유치하지도 억지스럽지도 않다. 다른 많은 동화의 주인공들이 말해주듯, 남을 괴롭히고 약올리는 행동에도 다 이유가 있으며 관심을 달라는 싸인이고, 우리는 그런 아이를 다 이해하고 품어 주어야 한다는 동화의 주제에도 일부분 공감은 하지만, 나쁜 짓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보란듯이 남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참 꼴같지 못한 짓이며 경멸받을 짓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당당하게 그런 주제로 요즘의 동화를 쓸 수 있는 것도 작가의 용기와 역량이라 할까?


가만히 보면 나는 참 편견이 심하고 이중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주제가 뻔해서 좋다는 건가? 싫다는 건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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