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피플 존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직장과 집만 오가기에도 힘들던 시절에 나는 소설을 거의 읽지 못했다. 책을 안 읽었던 건 아닌데 직업정신으로만 읽으니 소설이 빠졌었다고 할까. 이제 직업정신을 놓고 책을 읽으니 소설을 주로 읽게 된다. 그리고 일상이 느려진 것에 비례하여 책 읽는 호흡도 그렇게 되어간다. 시간이 많은데도 리뷰 편수는 바빴을 때와 비슷한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이 책을 며칠 동안 붙들고 있었다. 지루한 책이 아닌데도 하루에 두세 편 이상은 넘어가지 않았다. 여운이 길게 남아서일 것이다. 한 권에 아홉 편의 작품이 담겼으니 각편의 길이가 짧은 편이다. 그런데 엄청 압축되어 있다고 할까. 식당 가면 주는 동전물티슈처럼 물을 부으면 몇 배로 늘어난다. 그래서 난 이 책을 독서모임에서 읽으면 어떨까 처음으로 생각해 봤다. (모임이 있긴 하다. 이름만 들어도 엄청 독서스러운 이름인데ㅋㅋ 요즘 하는 일은 주로 동네 나들이나 영화 등의 문화활동. 어쩌다보니 그렇게 흘러갔기도 하고 모두의 관심사에 맞는 책을 고르기 어려워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짧은 글에서 풀어낼 생각들이 아주 많고, 또 각자의 입장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고 머무르는 지점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모임을 통해 감상을 넓히기에 아주 적합한 소설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이현 님도 팬층을 보유하신 작가님인 것 같은데 나는 처음 읽어봤다. 젊은시절, 세대를 대변하는 문장으로 큰 반응을 일으킨 작가님이 중년이 되어 조금은 달라진, 그러면서도 여전한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돌아온 것 아닐까. 알라딘 100자평들을 쭉 훑어보면서 그런 짐작을 해봤다.

단편을 읽고 아울러 감상을 쓰기엔 아직 통찰력이 부족해서 한편 한편 따로 쓰다보면 너무 늘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어느정도 길어지면 끊을 생각을 하고 시작해 보겠다.

첫 수록작 [실패담 크루]부터 눈을 사로잡았다. 제목부터 흥미가 당겼다. 이런저런 크루들을 봤지만 '실패담' 크루라니? 이 작품의 화자는 30대의 변호사다. 내 수준에선 엄청 엘리트다.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에선 그 안의 계급이 또 있는 법이다. 얼마만큼이나 세분화되어 있는 걸까. 화자인 주변호사(이하 주변)는 법대를 나오고 변호사 시험에도 붙었지만 세련된 교양은 없어보이고 처신이 어딘지 부족하고 불안하다. 보통 서툰 주인공이 나오면 응원의 마음이 들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난 그렇지가 않았다. 그를 경계하는 내 마음이 느껴졌다. 이유가 뭘까.

수습때 잠시 있었던 로펌의 대표 집에 초대받았을 때 만났던 성지연씨가 주변을 그들만의 리그에 영입했다. 바로 제목의 '실패담 크루'. 돌아가며 자신의 실패담을 털어놓는 모임.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나 왜이래ㅠ) 꽤나 쿨하고 진실돼 보이지만 그것마저 계산이고 포장이겠지. 아니라면 더 큰일이고.

소속감에 뭔가 갈증을 느낀 주변이 그 우아한 실패담에 폭탄을 던진다. 아니 반쯤 던졌을 때 회수되었다. 원래 끊지 않는 게 규칙인데 예외적으로 성지연 씨가 중간에 끊었다. 그 자리는 대충 수습됐고 주변은 더이상 크루에 가지 않았다.

당시 크루에 영입된 젊은 피로는 주변 말고 제리라는 유튜버가 있었다. 주변은 그의 순수성을 의심했고 몹시 견제했다. 크루를 나온 후에도 그의 유튜브를 찾아보곤 했는데 어느날 드디어 낯익은 얼굴들이 섬네일에 올라온 것을 보았다. 그 내용은 딱 봐도 고발성은 전혀 아니었다. 순수한 사람은 누구이고 순수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간신나라의 간신은 충신인가, 충신나라의 간신은 간신인가.... 간신과 충신의 기준이 있기는 한가. 순수함이란 그렇게도 복잡하다. 이미 오래전에 날아가버린 풍선을 찾는다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만이 바보같아 보일 뿐이다. 나는 바보같아 보이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나를 느끼면서 쓸쓸해진다.

[언니]라는 작품에서는 믿고 응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마음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앞의 작품에서 주변이 표면적으로는 딱히 잃은 게 없는 것에 비해 '언니'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절실하고 배경 없지만 실력은 있는 사람의 단물을 다 빼먹고 토사구팽하는 일. 그 일이 학문을 한다는 대학에서 가장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면서도 작품으로 만나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요즘은 지위가 곧 갑은 아니더라만 (학생을 무서워하는 교수도 많다고...) 그래도 이런 일은 어디에선가 아직도 일어나고 있을 것 같다. 본인은 자신이 한 행위가 그토록 부당하다는 사실도 모른채....

매력적인 성품의 '언니'. 그가 일인시위를 할 때 몇 명 안되는 동조자 사이에 끝까지 서 있어준 고향 동생 화자. 너무 많은 시간과 능력이 내버려졌지만, 그래서 많이 늦긴 했지만 그래도 '언니'에게 새로운 길이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한다. 이럴 때만은 나도 순수함을 추앙하는 사람이다.

[선의 감정]은 보는 관점에 따라 생각이 다를 것 같은 작품이었다. 화자인 내과 여의사를 '법적으로 잘못한 건 없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겠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있는 사람만 돌을 던져라.

여러 직종들을 거쳐간 '직종 두드려패기'가 의사직에까지 이른 것 같다. 물론 여전히 부러워할 만한 지위와 수입을 갖고 있는지는 몰라도 내가 생각하는 고통은 소아과가 없어지고 응급의료가 위기를 맞은 작금의 문제와 맞닿아있다. 왜 그런지를 생각해보면 나는 화자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소위 '진상'으로 이름이 드높은 할머니와 딸. 화자도 재수없게(?) 그 할머니의 담당의가 됐고 치료 후 어렵게 어렵게 퇴원을 시켰다. 얼마후 할머니가 심정지로 실려왔고 사망했다. 화자의 진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증상이었고 해당 과도 달랐다. 하지만 화자는 검진 결과들 중 아주 미세하게 달라진 그래프를 뒤늦게 발견한다. '관련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차이라고 할까. 화자는 본능적인 공포에 휩싸인다. 결과지에 찍혀나온 'non-specific change' (유의미한 변화가 없음) 라는 문구에 형광펜을 칠하는 그를, 나는 이해한다. 나도 똑같이 할 것이다. 세상에 나보다 남이 더 중한 사람 나와보라. 나의 발밑이 흔들리는데 일단 그것부터 붙잡고 보지 않겠는가. 또한명의 진상 따님께서 날마다 출몰하여 소리를 지르고 있다지 않는가.

그런데, 결말은 예상 밖의 반전이다. 얼어서 돌덩이가 된 엿은 날카롭게 깨면 흉기도 될 수 있다. 근데 말랑하게 녹으면... 그저 맛난 간식일 뿐이지 않은가. 세상사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세상에 진상은 실제로 있다. 진정한 진상과 무늬만 진상이 있는데 그걸 구별하기는 어렵다. 구별하려는 노력조차도 만용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전혀 무장 상황이 아닌데도 무장 해제를 못한다. 그걸 왜 못하냐고 비난할 것인가. 그 헛된 무장에 들어가는 감정과 에너지의 낭비, 비효율성, 관계의 형식성과 차가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이다. 작가님은 다른 의미로 쓰셨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읽었다.

[빛의 한가운데]는 금기에 가까운 놀라운 문장으로 시작한다.
“만약 아무것도 없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123쪽)
이 말을 미친 소리라며 부인할 부모들도 많겠지만.... 의외로 공감할 사람들도 많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에서도 이어지는 문장에서 부연했듯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일까. 가장 단순하게 말한다면 ‘고통스러워서’ 겠지.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울까 생각해 봤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요즘 뉴스를 보다가 생각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부모가 범죄자의 부모 아닐까 라는 것이다. 그 부모조차도 양심이 전혀 없다면 문제가 다르겠지만.... <나는 가해자의 부모입니다>라는 책도 있었는데, 그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다 상상도 되지 않는다. 특히 피해자의 고통이 극심한 경우, 부모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닐 것이다. 양육이 잘못돼서... 라는 말은 너무 단순하다.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자식 잘못되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 앞의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자식을 낳아 괜찮은 사람 만든다는 보장이 이토록 없다. 그러니 저 첫 문장 같은 말들도 나오는 것 아닐까.

이 작품을 읽으며 이창동 감독의 <시>라는 영화가 줄곧 떠올랐다. 본인이 양육한 손자가 죄를 지었을 때, 미자 할머니(윤정희 배우 분)는 고통스러워했지만 결국은 경찰에 인계했다. 이 작품의 엄마 안희는 어떤 선택을 하려나. 펄펄 뛰는 남편이 옆에 있으니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 남편이 없더라도 미자 할머니 같은 결정은 못할 것 같아 보인다. 할 수만 있다면 덮고 갈 것 같다.

사실 평범성으로 보자면 못할 가능성이 99% 넘는다고 본다. 미자 할머니 같은 결정은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안희의 공포와 무력감과 죄책감과 혼란을 이해하고 같이 슬퍼한다. 하지만 그 이중성과 비겁함을 부인하기도 힘들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라는 자각도. 그리고 자식 키우기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무겁게 느낀다.

표제작이 있을 줄 알고 읽다보니 없어서 좀 의외였다. 표제작이 없는 소설집이 이게 처음이 아닌데도 아마 그런 제목의 작품은 내용이 뭘까 궁금했었기에 살짝 실망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읽다보니 제목은 아니어도 내용에 들어있는 작품을 발견했다. [단 하나의 아이]였다.

이런저런 알바를 하던 대학생 한나는 ‘케이 파라디소’라는 중개업체에 가입하고 ‘플레이 튜터’라는 생소한 직업을 얻게 되었다. 요즘은 작명이 열일을 한다. 쉬운 말로 하면 시터, 도우미 쯤 되겠다. 중개업체에서 제시한 지침은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직업으로서는 가장 적절치 않아 보인다. 예를 들면 신체접촉 금지, 관심 금지 같은 것.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현실 반영이라고 난 느꼈다. 한나가 맡은 아이 하유와의 그다지 힘들지 않고 무료한 시간들이 어느 정도 흘렀을 무렵, 한나는 하유의 문제점을 감지했고 (모를 수가 없다. 매우 심각한 수준)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돌려돌려 말을 꺼냈음에도 바로 짤렸다.

이런 부모들이 있다. 양육은 아웃소싱으로 하면서 통제권은 자신이 쥐겠다는 태도. 자식을 매개로 왕같은 소비자의 포지션만 취하는 부모. 아이가 잘 자란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못할 때도 그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으려하고 애써 설득해도 “알아서 하겠다”고 한다. 알아서 하긴 개뿔, 아무것도 안하고 상황만 계속 악화시킨다. 그러면서도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자식을 고립시킨다. ‘노 피플 존’에 두고 자신은 방치한다. 아이는 부모를 골라 태어날 수도 없는데 무슨 죄란 말인가? 그렇다고 부모가 끼고 있는 것도 아니니 이들의 존재는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근심에 빠뜨린다. 그러나 엄연히 부모가 통제권을 틀어쥐고 있으니 손쓸 방도가 없다.

몇 작품 더 남았지만 이쯤에서 리뷰를 마무리해야겠다. 한 작품에 딱 한 번 나온 이 말이 왜 책 전체의 제목이 되었을까? ‘노 ○○ 존’이라는 말에는 배제가 담겨있다. 어린이로부터 시작된 것 같지만 노인, 남성, 여성, 외국인.... 등 많은 대상을 넣을 수 있다. 그게 확장되다보면 결국 ‘피플’이 되는 것 아니겠나.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 하...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나다. 인간들이랑 부대끼는 거 이제 좀 그만하고 싶어서 정년이 아직 멀었는데도 직장을 그만뒀다. 집에 누구 오는 거 끔찍하게 싫어한다. 혼자 해도 되는 일은 웬만해선 혼자 한다. 혼밥 정말 좋아한다. (요즘 식당에 혼밥자가 대세긴 하더라) 약속은 최소한만 만든다. 어디 가서 시끄러우면 본능적 짜증이 난다. 웃는 소리도 거슬린다..... 아 이렇게 쓰다보니 인격파탄자 같잖아....? 그건 아니고 나 평범한 사람이긴 한데......^^;;;;; 이런 성향을 좀 경계하긴 해야 하겠다. 노 피플 존만 찾아다니다가 결국 각자가 모두 고립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되면 안되니까.

책 소개글에서 “현대인의 모습을 세밀한 배율로 조정된 작가 고유의 매크로렌즈로 관찰한다” 라는 문장을 보았다. 매크로렌즈에 동의한다. 아주 고기능의 매크로렌즈다. 작지만 엄청 자세한 세밀화처럼 이 작품도 짧지만 쓰기에는 아주 오래 걸렸을 것 같다. 환부를 굳이 보여주는 것은 치유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 그 갈망에 많은 이들이 마음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