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인 줄 알고 펼쳤는데 80여 쪽으로 글밥이 좀 있는 그림동화책이었다. 그래도 그림을 단순 삽화라고만 부르기엔 아까울 만큼 비중이 높고 매력적이다. 투명수채화의 번짐 효과가 바다라는 배경과 근사하게 어울릴 뿐 아니라 인물들의 개성을 살려주고 깊은 인상을 남긴다.제목인 ‘바다의 여왕’은 등장인물의 이름이었다. 이야기에서 ‘인물’이란 꼭 사람만이 아닌 것은 아이들도 다 아는 사실, 여기서 그 인물은 ‘배’였다. 씨 아저씨의 배였을 시절, 씨 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이제 곰의 배가 된 후에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짓는다. 이 책에서 ‘작명’은 상당히 중요하다.‘바다의 여왕’과 ‘곰’은 서로에게 의미가 된다. 씨 보이였던 시절 주인에게 괄시받고 지저분하며 애물단지 같았던 배는 곰을 만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된다. 깨끗하게 단장하고 꼭 필요한 만큼씩만 고기를 잡으며 둘은 유유자적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요렇게 끝나도 좋겠지만 이야기의 스케일이 커지려고 평지풍파가 몰려온다. 말그대로 풍파. 거대한 파도가 몰려와 그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밀려 깨어보니 무인도.... 하지만 괜찮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니까.하지만 진짜 위기는 ‘바다의 여왕’의 엔진 고장이었다. 곰은 노를 저어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다 육지에 다다랐는데 거기는 곰의 마을이었다. 그들은 환대받았고 고장도 고쳤다. 하지만 거기서 놀림과 구박 속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존재를 보았으니 바로 ‘사람’ 여자아이였다. 도입부에서 곰이 사람 마을에서 당했던 차별과 판박이 구도로, 이 대목도 생각할 거리가 많다.이제 셋이 뭉쳤으니 이야기는 더 흥미진진해져야지. 여자아이가 들려준 ‘바다 고양이’ 이야기도 신기하다. 그리고 작명의 시간이 왔다. ‘바다의 여왕’ 빼고 나머지 둘은 아직도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여자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얘”라고 불렀다고 한다. (곰은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엄마가 없는 것보다도 자기를 “얘”라고 부르는 엄마가 있는 게 어쩐지 더 서글픈 것 같다고 한다.) 이것도 아련하고 짠하게 마음에 남는 대목이었다.둘은 드디어 서로에게 딱 어울리는 좋은 이름을 생각해 내는데, 여기에 적지는 않겠다. 그들이 지은 이름 (실제로는 작가의 작명)은 참 예쁘고 감각적이다. 작가의 역량은 이런데서도 발휘되어야 하네.^^그들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곰 마을에서 계속 머무를 수 없었다. 그들은 미련없이 바다로 떠난다. ‘바다의 여왕’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그들의 새로운 항해가 시작된다. 그들은 바다고양이를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바다에서 또다른 어떤 존재를 만나게 될까? 어린이 독자라면 더욱 다채로운 상상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여기저기서 배제되고 차별받던 존재들이 모여 의기투합하고 그곳을 미련없이 떠나 그들 나름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게 현실에서는 쉽지 않겠지.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그게 가능해야 우리는 꿈을 꾸고 위로를 받겠지.“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학창 시절 감성을 담아 주고받던 싯귀가 오랜만에 생각나는 그림동화책이었다. 동시에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꼭 깎아쳐서 차별을 두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의 모습, 존재들의 깊은 외로움과 그들이 만났을 때의 연대감 등 많은 것을 하나 둘 주워모으며 읽게되는 책이었다. 알라딘 순위에 보니 오늘 기준 ‘100세 그림책 주간 23위’에 올라있던데, ‘100세 그림책’ 분류에도 찬성한다. 어린이들에게도 재미있지만 어른들이 책모임에서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