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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ㅣ 소설Q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평점 :
성해나 작가의 최근 유명작들은 도서관에서 내 차례가 오기 어려워 이 책을 먼저 읽어보았다. 이 책 한권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알아보긴 힘들겠다. 비교적 소품 같은 책이었다. 이 책 바로 전에 뉴베리상 수상작인 어떤 동화책을 읽다 진도가 안 나가 겨우 끝냈는데, 이 책은 그 책의 반의 반도 안 걸려 다 읽었다. 무척 평이한 소재여서이기도 할 것이고 작품 길이도 150쪽 정도로 짧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매우 섬세하고도 무거웠다.
두 명의 주인공이 두 번 교차 서술한 이야기다. 기하와 재하. 이들은 여덟살 차이나는 재혼가정의 형제다. 배다른 이런거 아니고 각각의 가정에서 남으로 살다 재혼이라는 부모의 결정 때문에 가족으로 묶여버린 사이다. 둘이 친근하게 지내며 새 가정을 화목하게 묶었다면 좋았겠지만 감정이란 게 무척이나 복잡하고 미묘하여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참 슬펐던 것은 그 새 가족 4명 모두가 너무 이해갔다는 점이다. 결국 행복할 수 없었던, 그들의 상황과 감정과 순간의 결정과 행동들이 모두 이해되었다. 그러니 행복한 결말이란 엄청난 행운인가, 아니면 뼈를 깎는 노력인가, 그 합의 산물인가.
먼저 서술하는 기하는 아버지의 아들이고 형이다. 어릴때 엄마가 돌아가셨고 새로운 가족을 바란 적 없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가 새엄마와 어린 동생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들에게 딱히 적의는 없다. 그들이 애쓰고 노력하는 것도 안다. 하지만 도저히 마음이 말랑해지지 않는다. 새어머니를 저기요, 그쪽, 이렇게밖에 부르지 못하고 간절하게 다가오면 이렇게까지 하지 마시라며 더 멀리 달아난다. 새 모자와는 달리 새 부자가 친근해지는 모습을 보며 나이차가 많은 동생임에도 질투심과 반발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는 곧 대학에 갔고 기숙사에 들어가며 가족에서 빠져나왔다. 군대에 가면서는 완전히 멀어졌다.
재하네 친아버지는 폭군이고, 사별이 아니었기에 화근을 늘 안고있는 셈이었다. 이것부터가 엄청 기우는 조건이라 새엄마와 재하는 늘 눈치를 살피며 노력한다. 엄마는 기하에게 하나라도 더 잘해주려 애를 쓰지만 그 시도는 늘 튕겨나오고, 재하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재하는 심한 아토피라는 약점까지 있었다. 눈치보며 약이나 바르고 있던 모자를 크게 꾸짖고 아버지가 재하를 대학병원에 다니게 한다. 일에 바쁜 부모 대신에 기하가 병원길을 동행한다. 화를 내거나 나쁜말을 하지도 않지만 딱히 가까워지지도 않으며 그 시간들이 지나간다. 그들이 치료 후 대학로에서 늘 함께 먹었던 중국냉면이 겨우 둘의 한조각 따스함의 추억이 되었달까. 땅콩소스를 좋아하지만 버벅대는 재하의 그릇을 가져가 잘 섞어주고, 자신의 땅콩소스를 얹어준 기하. 환하게 미소지은 재하. 순간 미세하게 보인듯도 했던 기하의 미소.
하지만 '이후로 둘은 다정한 형제가 되었습니다'는 되지 않았고 다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이 상황까지도 이해가 되었다. 미안해하고 눈치보는 재하와 엄마도, 마음이 도저히 안 열리는 기하도 이해된다. 이 가정을 지키려고 애쓰는 아버지도 참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재하에게 좋은 것으로 주려 애썼고 내탓이라 자책하는 엄마에게 늘 단호한 태도로 자신의 의지를 알렸다.
기하는 성인이 되었으니 제갈길 가고 이렇게 가정이 안정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 기간은 4년이 끝이었다. 새엄마가 군에 있는 기하에게 전화해서 냉장고에 니가 좋아하는 콩잎짠지를 담가 놓았다고 말한 것은 이별 인사였다. 기하는 그것도 모르고 뜨악하고 짜증스럽게 받았을 것 같지만.... 아버지가 그토록 다시 세우려 했던 두번째 가정은 이렇게 끝이 났다.
기하와 재하의 두번째 서술들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이다. 먼저 기하. 그는 그동안 그 4년의 기억을 깨끗이 잊었을까. 아닌 것 같다.
"헤어진 이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뉘었다.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한번쯤은 더 만나도 좋을 사람. 내 삶에서 재하와 재하어머니는 언제나 전자였다가, 언제는 후자가 되곤 했다." (98쪽)
이런 말도 있다.
"그들과 함께 살았던 날들을 떠올리면 불안하고 미숙했던 내가 재하 모자에게 안겨주었던 자잘한 상처만이 선명히 상기되었다." (97쪽)
어느날 우연히 그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을 알게 된 기하는 그곳에 가본다. 그때와는 마음도 달라졌고 나이도 먹었지만 여전히 서툰 처신을 느끼며 돌아온다.
"재하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때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부르고 또 어떤 말을 나누게 될까.
이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132쪽)
기하가 왔던 날 하필 가게를 접는 모습을 보여줬던 재하의 마지막 서술이 이어진다. 그는 일본 고베에서 정착해 혼자 하루하루 일하며 단순하게 살아간다. 가게를 운영하던 시절의 불안과 염오는 옅어져가는 채로, 남는 시간에는 그옛날 새아버지가 주셨던 DSLR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그리고 지난 사진을 함께 보던 주인집 여자의 권유로, 아마도 받을 수 없는 편지를 형에게 부친다.
그들이 가족으로 묶였던 4년은 행복하기 어려웠지만 불행하지도 않았고, 좋은 기억이었다고 쉽게 말하긴 어렵지만 나쁜 기억도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아쉬웠던 기억. 더 잘했었더라면 싶지만 다시 돌아가도 딱히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 과거. 미안함이 옅은 흉터처럼 남은 과거. 상대가 잘 지내길 바라지만 그걸 내가 해줄 수는 없어서 그저 빌어줄 수밖에 없는 관계. 이런 관계와 감정이 은은하지만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들이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서로의 행복을 빌며 아쉬운 기억 속의 추억 한조각을 아름답게 여기며 살면 좋겠다. 재하의 이야기 속에 어머니가 "재하야, 니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나?" 라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재하는 형과 먹던 중국냉면이 떠올랐지만 "저는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대답을 듣지 못했어도 들은 것처럼 가슴이 무지근해졌다고 했다.(88쪽) 행복의 조각을 딱 맞추기는 어떤 이들에게 이토록 어렵다. 그래도 이들이 서로를 원망하지 않아서 난 다행스러웠다. 그것만으로도 나보다 좋은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성해나 작가의 작품세계 한쪽을 잘 느껴보았으니 다른 책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