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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동네에 청년주택이 지어지고, 입주가 다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3층에 새 도서관이 들어섰다. 자그만 규모에 책도 적다. 하지만 다른 도서관에선 다 대출중이라 대기 걸어야 하는 책이 떡하니 새책으로 놓여있을 때가 있다. 이 책도 그런 행운으로 잡은 책이다. 내가 읽은 김애란 작가의 책으로 4권째다. 그동안 장편 2권 단편 1권 읽었는데 다들 '김애란은 단편!' 이러셔서 몇권 꼽아놓고 있었던 중의 한 권이다. 이 책 나왔을 때 유명세를 익히 알았는데도 그때는 넘겼다가 이제야 읽게됐네.
일곱 편 모두가 다른 상황 다른 인물이 나오는데도 어쩌면 마지막 한줄기 감정은 같은지. 그건 상실감과 외로움이다. 그냥 가을날 고독을 씹으며 왠지 쓸쓸해지는 그런 종류의 외로움이 아니고 통렬하게 깨달아지는 외로움. 그래서 제목에 '여름'이라는 계절을 넣은 걸까. 신록이 푸르고 생명력이 왕성한 여름이 아니고 작렬하는 태양이 두려운 맹렬한 여름.
첫 작품 [입동]은 젊은 부부가 거실 한쪽 벽에 도배를 하는 이야기다. 읽어보니 그들은 어린 아들을 어린이집 차량 사고로 잃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보고싶어 허공을 휘저어도 만져지지 않는 허망함에 애간장이 끊어질 것이다. 그걸 공감할 사람은 같은 입장밖에는 없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 그들이 같은 마음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같은 슬픔, 같은 고통. (그것마저도 안되는 부부들도 있으니) 이웃들은 처음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했지만 이제는 피한다.
"- 다른 사람들은 몰라.
- 다른 사람들은 몰라.
그러곤 내가 아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37쪽)
그 둘만의 공감 속에서 그들이 버티고 일어날 수 있기만을 바란다.
[노찬성과 에반]이 무슨 뜻일까 봤더니 사람 이름과 개 이름이었다. 노찬성은 남자 어린이고 에반은 개다. 찬성은 독자가 볼때 한없이 불쌍한 상황에 처했으나 본인은 그런 의식도 못하고 살아가는 듯하다. 아버지가 사고로 죽었으나 보상금도 나오지 않았고 할머니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죽어라 일해서 겨우 찬성이랑 먹고 산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찬성이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다. 바로 에반이라는 버려진 개였다.
에반이 어리고 건강한 개이기라도 하면 뭔가 웃을 일도 생길 것 같잖아. 근데 늙고 병들었다. 모아둔 전재산을 들고 동물병원에 가서 알게된 건 에반이 암이라는 것과 '안락사'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거였다. 검사할게 많다는 수의사의 말에 "이만오천원어치만 검사해주세요." 하는 찬성이가 왤케 슬퍼.ㅠㅠ
"있잖아, 에반. 만약에 못 참겠으면.... 나중에 정말 너무 힘들면 형한테 꼭 말해. 알았지?"
안락사라는 선택지를 조용히 받아들이는 찬성이는 나이만 어린 어른인가. 그 어린애가 안락사비를 마련하려고 전단지 알바를 한다. 딱 그만큼의 돈을 모았다. 에반은 그돈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을 것인가, 아니면.....
[건너편]은 지친 커플이 마침내 헤어지는 이야기다. 오래된 연인의 헤어짐이 이렇게 무기력하고 쓸쓸할 수가. 딱히 유능하지도 않고 의지력과 인내심이 강하지도 않고 부모 재산이나 배경도 없는 평범한 젊은이가 취업에만 젊은시절을 낭비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우면서 동시에 너무 현실적이다. 이렇게 헤어진 커플들이 실제로 많을 것이다. 말하자면 흔한 얘기인데 작가님의 펜끝에서 나오니 유독 쓸쓸하고 눈물겹네.....
이 책의 수록작들은 외롭고 슬프긴 해도 현실의 사람들을 보여주기에 서사를 따라가긴 어렵지 않다. 다만 [침묵의 미래] 이 작품만은 예외였다. 화자를 파악하는데서부터 어리둥절하다. 읽다보면 화자가 스스로 밝힌다.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이다." (125쪽)
공간적배경은 '소수언어박물관' 이라는 곳이다.
"지금 이곳에는 천여 명의 화자가 천여 개의 언어를 지키며 산다." (129쪽)
"멸종위기에 처한 언어를 보호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이 단지를 세웠다. 결과는 정 반대였다.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132쪽)
대단한 상징과 비유가 담긴 작품인 것 같다. 작가님이 담으신 걸 다 찾아낼 수나 있을까. 개인적인 상실감을 넘어서 인류적 상실감을 담은 작품이라고 할까. 내가 한번에 이해하긴 어려웠던 작품이다.
[풍경의 쓸모]에선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직업군으로 대학강사 이정우가 나온다. 착하고 조용한 성격인 그가 겨우겨우 버티고 지탱해온 것들에 균열이 가는 느낌으로 끝난다.
"마음속으로 '나는 공짜를 바란 적이 없다'고 중얼거렸다. 왕왕거리는 비행기 소음 사이로 누군가 내게 '더블폴트'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183쪽)
남에게 모질지 않게 살아왔는데 그게 본전도 아닌 실책(더블폴트)이 되어 기회가 다 상실되었다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걸까. 모질게 말한다면 이선생, 당신은 좀 똑땍이 할 말은 하고 처신해라! 라고 해야되는 걸까. 공짜를 바란 적은 없지만 비겁한 적은 있잖아, 라고. 그가 비겁하지 않았어도 삶이 그에게 주는 것은 마찬가지였을지 몰라도 자괴감만은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가리는 손] 에서는 죽음이나 이별로 인한 상실은 없지만 어쩌면 더 서늘한 상실이 있다. 다문화가정을 이뤘으나 남편과는 헤어지고 아들 하나를 정성껏 키우며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청소년기에 이른 아들의 내면은 엄마의 상상과 기대 범위를 넘어선다. 모종의 좋지 않은 일로 찍힌 영상에 아들의 모습이 담겼고, 아들의 변명에 남들은 넘어갔지만 엄마는 직감한다. 자식의 거짓말을, 그리고 '가리는 손' 안쪽의 진짜 표정을....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이건 정말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가장 슬펐지만, 상실감과 그리움도 가장 컸지만 왠지 절망감은 가장 덜한 느낌이었다. 남편이 떠났다. 교사였던 그는 현장학습에서 계곡사고를 당한 제자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같이 목숨을 잃었다. 혼자 남은 아내에게 나타난 피부질환은 그 내면의 고통의 형상화인 것 같았다. 안팎으로 처참한 그녀 앞으로 편지가 한통 도착한다. 죽은 학생의 유일한 유가족인 누나가 보낸 편지였다. 그제서야 그녀는 외면해왔던 상황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266쪽)
가버린 남편을 이해했다고 그리움이 줄어드는 건 아닐 거다. 더 커졌으면 커졌지. 마지막 문장도 '당신이 보고 싶었다'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맨 마지막에 자리한 건 슬픔 이상의 것이 들어있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2017년에 나온(첫 발표는 2015년) 이 작품에는 지금의 인공지능 채팅도구들이 아닌 초기 인공지능(시리)이 나온다. 아무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이런저런 질문을 해보는 주인공의 마음을 알 것 같다. 10년이 지난 지금의 인공지능은 답변이 더욱 정교해지고 공감능력은 사람보다 더 나은 지경이 되었지만.... 채워줄 수 없다.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아주 작은 답이 있다면 있고, 영 없다면 없는 것도 같다.
폭염 경보가 내려진 7월 말, 여름의 한복판에서 이 책을 읽었다. '바깥은 여름'이니 에어컨 켜진 까페에 들어와서. 지금은 시원하고 좋지만 문을 밀고 나가면 여지없이 폭염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감싸겠지. 이 책은 어쩌면 나의 '문 밖 세상'을, 그러니까 내가 열고 나갈 바깥을 보여주는 것일까. 알고는 있으라고. 어쩌면 선불, 혹은 후불의 위로 혹은 경고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