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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평점 :
훌륭한 작가이자 교사이신 분이 이 책을 짧게 언급하며 포스팅하신 걸 봤다. 그때 난 마침 도서관에 있었고 운좋게도 책이 딱 있었다. 당장 대출해와서 읽었다. 요즘 독서력이 떨어진 나를 흔들어주는 책이었다. 가독성이 엄청 좋아서 하룻밤 사이에 읽었다.
불펜의 시간이라.... 나도 오래전 한때 야구를 무척 좋아했던 추억이 있지만 경기장 응원을 가본 적이 없어서 불펜의 위치나 생김새는 잘 모른다. 물론 눈에 훤히 보이는 곳에 있지 않겠지.... 대기하며 몸을 푸는 공간으로 알고 있다. 기약없는 공간, 함성과 스포트라이트에서 비껴나 있는 공간. 어떤 인생에게든 내리막길이 있다. 오르고 싶었던 곳에 끝내 오르지 못하는 인생도 있다. 불펜의 시간이란 그런 이들이 살아내고 있는 시간이 아닐까. 나도 예외는 아니다.
세 젊은이가 번갈아 중심인물로 나온다. 새파란 젊은이들은 아니고 세상 물을 10년쯤 먹은 30대 정도인 것 같다. 공통점은 모두 야구와 관련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가장 먼저 나오는 준삼은 중학교 때 감독의 눈에 띄어 야구부 생활을 했다. 거기 mvp 혁오가 있었다. 혁오의 활약은 눈부셨고 투구폼은 완벽하고 유려해서 아름다웠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차이를 인식한 준삼은 졸업과 동시에 야구를 그만뒀다. 공부하고 대학 졸업해 지금은 증권회사 말단으로 있다.
이어서 나오는 혁오. 이미 준삼이 그가 얼마나 훌륭한 선수인지 알려준 바 있다. 하지만 프로에 입단한 혁오는 그의 명성에 걸맞는 활약은 커녕 믿을 수 없는 슬럼프를 보여줬다. 극복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고 지금은 중간 계투 요원으로 길어야 2이닝 정도 던지는 미미한 존재감으로 살아남아 있다.
마지막 기현. 여자다. 초등학교 때 오빠 따라 들어간 야구부에서 남자들을 뛰어넘는 기량을 보여주며 주전으로 활약했지만, 진학을 앞두고 여자선수들을 위한 팀이 더이상 없다는 것을 알고 울면서 야구를 그만둔다. 지금은 스포츠신문사의 기자가 되었다.
세 명의 서사가 유기적으로 얽히면서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내 마음을 쓰이게 한 사람은 혁오였다. 그의 트라우마가 죄책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무딘 사람에게는 그냥 지나가버릴 사건이었고, 더한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 웃으며 사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다. 그 생생하게 벼려진 양심이 오히려 판타지였다. 준 성자를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현실에 이런 사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이 사람 때문에 이 책을 끝까지 읽었던 것이 사실이니 뭐라 말할 수가 없겠다.
배구선수 출신이었던 혁오의 엄마는 패배한 사람의 눈을 오래 보지 말라고 아들에게 늘 충고했다.
"경기에서 이기면 기뻐하되 우월감을 느끼거나 상대를 얕잡아보진 말라고, 노력해서 얻은 승리라 해도 뽐내지는 말라고 했다." (37쪽)
혁오 또한 엄마의 당부를 늘 기억했지만 결정적 순간에 참지 못하고 상대방을 잔인하게(?) 이겼다. 눈빛으로 쐐기까지 박았다. 상대방이 엄청 못나게 굴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대응이었다. 사이다라고 박수를 받을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극적 사건이 이어졌고 혁오의 죄책감은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혁오의 죄책감과 자기형벌은 요즘 이슈가 된 고교야구 조롱응원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다. '승리에도 신사적이어야 하고 사려깊어야 한다'는 원칙을 딱 한번 어긴 댓가로 스타플레이어에서 멀어진 혁오를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학생 선수들만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 혁오의 엄마가 가르친 저 원칙들을 유난하다 느끼는 스포츠판 전체가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페북에서 초등학교에서 티볼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글을 읽었다.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았다. 티볼에서는 세레머니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하 그렇구나. 그렇게 패자를 배려하고 신사적인 승부를 가르치는 거구나. 그게 스포츠계 전체에 확대되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불상사가 있었겠나? 나는 지역의 문제로 말하고 싶지 않고, 스포츠맨십의 문제로만 말해도 분명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이들이 어릴 때, 그리고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에 '포커 페이스'를 지도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요구한 포커 페이스 상황은 세 가지였다.
1. 짝꿍이나 조원 정할 때
2. 시험지(결과) 받았을 때
3. 게임이나 경기 끝났을 때
물론 3번은 칼같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날뛰지는 못하게 했고, 1,2번은 워낙 강조하다보니 아이들을 혼낼 때도 있었는데 그럴때 약간의 불만을 감지한 적도 있다.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다시 한다면 더 강력하게 할 거다. 저항을 느껴 멈칫거리기도 했던 마음을 후회한다. 한편으론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무례가 이런다고 사라질까 싶은 회의적인 마음도 든다.ㅠㅠ
아무튼, 이 면에서 뻔뻔하지 못했던 혁오는 길고 긴 '불펜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내면이 허락하는 자신만의 리그를 만들어 선수생활을 해나간다. 나머지 두 인물도 구조조정의 피바람이 부는 회사 속에서, 거짓 기사와 부당한 압력이 판치는 신문사에서 그들만의 '불펜의 시간'을 살아간다. 표지를 봤을 때 야구소설이었던 이 작품은 박진감 넘치는 경기와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기는 커녕,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되나 하는 고민을 독자가 함께 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것이 대다수 인간들의 삶이다. 지금 정점에서 승리와 성취에 취해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펜의 시간은 올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무게가 나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혁오의 양심수준만 빼고는 모든게 현실적이었어....^^;;;; 그 비현실적 양심 수준이 우리 세상에도 좀 섞여들어오면 좋겠다. 문학이 그정도는 지향해도 괜찮잖아? 그래서 요즘같은 슬픈 뉴스와 아우성은 좀 적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