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양귀자 지음 / 쓰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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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시절 이름높던 양귀자 작가님의 소설들을 다 흘려보내고 뒤늦게 읽어보는 중이다. 지난번에 <모순>을 읽었고 이번에 읽은 책은 <희망>이다. 출간된 순으로 놓는다면 이 책이 먼저다. 처음엔 상,하 두권으로 나왔던 듯한데 합권하여 재출간되니 분량이 600쪽에 가깝다. 그래도 가독성이 워낙 뛰어나 큰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총 10개의 장인데 배경이나 인물을 설명하는 1,2장만 넘어가면 읽기에 엄청나게 가속이 붙어서 어느새 마지막장을 보게 된다.

90년도에 첫 출간되었다고 한다. 주 배경은 80년대 후반 쯤이라 하겠다. 학생운동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 이 책은 시대상을 진하게 담고 있다. 여러 인물들의 서사를 한데 모아야 하기에, 작가는 영리하게도 '나성여관'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다. 여관집 3남매와 이런저런 사연을 가진 장기투숙객들. 여관이라는 배경은 아주 밀도 높고도 자연스럽게 시대상을 담은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를 흡수하고 긴밀하게 엮어냈다.

30여년이 흐른 지금 보니, 여기 담긴 현대사의 질곡은 크게 세 가지라 하겠다. 첫째는 학생운동이다. 이 역할은 여관집 장남 진도연이 맡았다.
둘째는 이산가족의 아픔이다. 10호실의 장기투숙객 할아버지다.
셋째는 중동 건설 근로자 파견과 그로 인한 부수적인 불행들이다. 이 사연은 9호실 장기투숙객 찌르레기 아저씨가 안고 있다.
그외 화려함을 쫓아 퇴폐적인 삶을 선택한 누나, 쇠락해가는 여관을 지키며 악착같이 살아가는 어머니와, 기죽어 살아가는 아버지 등도 주요 인물이다.
이 모든 이들을 옆에서 보며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인물은 막내 진우연이다. 삼수생이라는 아주 애매하고 불안정한 신분이 관찰자와 고뇌자 역힐을 하기에 제격이다.

이산가족의 아픔에 대해서는 예전엔 역사나 도덕 수업 때 많이 다루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말에 힘이 잘 실리지 않는 것을 느끼곤 했다. 이제 해당되는 분들이 거의 생존해 계시지 않고, 들으면서 자란 나도 나이가 들었으니 젊거나 어린 세대들에게는 다가가기 힘든 주제다. 오랜만에 그 서사를 읽으면서 '그래, 참 기막힌 일이었다' 싶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 할아버지는 너무 싫었다. 북에 두고온 부귀영화를 평생 되뇌이면서 자신도, 새로 맺은 가족도 비참에 처하게 한 노인네가 꼴보기 싫었다. 딱한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짜증이 앞서는 나도 참 큰일이다. 남겨진 손자 민구가 얼마나 딱하냐고. 하지만 여관에 살던 기간 동안은 이런저런 사람들이 품어줬으니 90년대만 해도 옛날이었나 싶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소리니까.

중동 건설 근로자 이야기도 내가 어릴 때 있었던 일이라 실감은 못해본 역사이다. 이 책을 읽고 어느정도 실감을 했다고 할까. 찌르레기 아저씨. 겨우 만들어낸 따뜻하고 환한 가정이 뒤틀리고 꼬여 비참으로 끝나는 과정이 너무 안타까웠다. (물론 온갖 불행요인이 몰려서 그런 것이다. 중동에 갔던 것 자체가 불행은 아니지. 하지만 엄청 고생들은 하셨겠다. 가정을 위해 희생하려는 의식이 강했던 그때) 여관 주방 아줌마가 남몰래 흠모했을 만큼 아저씨는 독자에게도 참 마음이 가는 인물이다. 이 책에 진정성과 긴장감을 높여주는 아주 특별한 인물이다.

나머지 한 가지의 시대상, 학생운동. 이것은 내가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다닐 때 한창이었으니 가장 생생하게 체험한 시대상이라 하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밖에 안된 그들이 어찌 제적, 투옥, 고문을 불사하고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며 몸을 던졌을까. 분신의 기사도 쉽게 찾아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생명과 온 인생을 걸게 한 그 동력은 대부분 순수했었겠지. 이 책의 장남 진도연처럼.... 지금 우리가 너무 당연해서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민주주의가 많은 부분 그 외침 위에 세워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 정의감을 그대로 품고 있는가 생각하면 회의적이다. 이 책 이후 이어진 몇십년은 계속해서 진화해 나타나는 모순에 실망과 회의감이 더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흔히 후일담 소설이라고 부르는 소설들이 파장한 장터에서 부는 바람에 잔해들이 날리는 느낌이 드는 것은.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무게감을 갖고 있는 것이겠지.

결국 나성여관도 문을 닫고, 쓸쓸함 속에서 이야기는 끝나지만 그 쓸쓸함을 뚫고 나오는 희망을 담으려 작가는 노력했다. 그 3남매가 60대가 되었을 지금, 그 희망은 싹을 틔웠나?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하기 어렵다. 우연이를 비롯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 삶의 무게를 견디고 빗장을 열고 걸어들어가는 태도, 이런 것들을 더욱 보기 어려워졌다. 이 책이 화석이 되지 않고 우리에게 계속 그것들을 되살려 준다면 좋을 것 같다. 희망의 뿌리는 단단한 땅속으로 뻗을 테니까.

이 책을 읽으며 드라마로 딱이었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 보니 과연 있었네! 93년에 동명의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김호진 배우가 진우연 역할을 했었구나. 패악을 떠는 여관 안주인 역에는 나문희 씨가....^^ 유튜브에 있으니 심심할 때 하나씩 봐도 괜찮겠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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