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평점 :
도서관 신간코너에 이 책이 꽂혀 있는데 작가 이름이 클레어 키건? 남이 집을세라 얼른 집어들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맡겨진 소녀>를 읽었으니 이 책이 세번째인가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이 책은 다섯번째, 내가 몰랐던 두 권이 더 있었다. 그런데 출간 순서는 쓴 순서와 다르다. 우리나라에선 다섯번째로 출간된 이 책이 작가가 가장 먼저 쓴 책이라고 한다. 2,30대의 젊은 시절에.
그래서 그런가..... 앞서 읽은 두 권에서는 상황은 열악할지라도 믿을만한, 완벽한 선인은 아니라도 고민하며 따뜻하게 살아가려 애쓰는 인물들이 있었는데 이 책은 그저 서늘하고 가혹하기만 하다. 젊은 시절 매서운 눈매로 세상을 보던 작가가 나이가 들면서 빛의 따스함을 조금씩 넣기 시작한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 책들도 문체가 부드럽지는 않았다. 매우 절제된 언어로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하지만 독자들은 차갑고 절제된 언어 사이에 따스한 공간들을 제법 만들 수 있었고 비교적 짧은 그의 작품들을 풍요롭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역순으로 본 셈이긴 하지만 한 작가의 작품 세계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너무 무섭긴 했지만.ㅠ
간결함이 특징인 작가는 단편 길이도 여느 책들보다 짧아서 300쪽 남짓 되는 이 책에 실린 단편이 무려 15편이나 된다. 짧아도 어느 하나 가벼운 게 없어서 읽는데 시간은 제법 걸렸다.
첫번째이자 표제작인 [남극]부터가 입을 틀어막을 섬뜩함을 선사했다. 작가가 '바람피면 골로간다' 이런 정도의 주제로 작품을 쓰진 않았을 텐데 대체 이게 뭐람? 한 여자가 문득 남편 말고 다른 남자랑 자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맹랑하게도 실행에 옮겼다.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온다는 핑계로 도시로 떠났다. 의도한 대로 착착, 남자도 만났고 만족한 시간도 보냈고... 하지만 그녀는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이게 형벌이라면 형벌치고는 너무 가혹하지.... '바람 피우지 말고 정숙하게 살아라'도 아닌 것 같고 '모험 걸지 말고 살던 대로 살아라'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뭐지? 하룻밤 함께했던 여자에게 그녀의 입으로 말했던 지옥을 그대로 선사하는 남자는 대체 어떤 인간인가? 세상에는 저런 인간이 어느정도 비율로 존재하는 것일까?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게 아닐까? 이 작품은 이처럼 세상과 인간에 대한 공포심과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최후는 나오지 않았고 최후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최후라고 한다면 그건 어떤 최후일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총질 칼질만 무서운게 아니다. 이런게 더 무서운 것 같아. 어휴.ㅠ
[키 큰 풀숲의 사랑]에서 사랑은 말하자면 불륜이다. 아내 있는 의사와의 사랑. 이 작품에선 잔인하거나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랑의 측면에서 본다면 아프다기보다 어정쩡하다. 오히려 그래서 슬프달까... 남자는 아내한테 들켰고 가정을 선택했고 여자한테는 10년 후를 기약했는데... 그리고 그 약속은 10년이란 세월에 빛바래고 바스라져 버렸을 수도 있었는데, 의외로 그들은 거기에 왔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의 어색하고 민망한 구도가 사랑의 모양이 참 별로라고 알려주는 듯.... 풋풋한 청춘사랑이 아닌 담에야 사랑이 로맨틱하긴 어렵다. 오히려 모냥빠지고 비루하다. 어느 순간에는 '깨게' 된다. 이 작품이 말해주는 서늘한 현실은 이것일까? 확실히는 모르겠다.
[진저 로저스 설교]도 내게는 순위권으로 끔찍했다. 화자인 여자아이는 막 사춘기에 들어선 소녀이고, 내가 보기엔 성적 호기심이 강렬한 아이인 것 같다. 그집 농사일을 많이 돕던 아저씨가 폭설로 하루 그집에 묵던 밤 어떤 일이 일어났고 이후 아저씨는 목을 매었다. 근데 어리둥절한 점은 그 가족이 춤추고 놀면서 이야기가 끝난다는 거야. 마치 필사적으로 즐거우려고 하는 사람들처럼.... 이 작가는 '필요없는 문장은 하나도 쓰지 않는다' 라는 평이 있던데, 그렇다면 문장을 굉장히 경제적으로 쓴다는 것이고 계산되어 있다는 뜻도 되겠다. 그런 관점에서 난 한 문장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데 "부모님이 미리 이야기를 나눴음을 깨닫는다. 세워둔 계획이 있는 것이다." 라는 문장이다. 이어서 오빠에게 춤을 가르치는 내용이 나와서 그얘긴가 하고 슬쩍 넘어갈 수 있겠지만 왠지 그 문장이 도드라졌다. 오빠의 비난의 눈길과 달리 부모님은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걸 알고 있으며 그 흔적을 지우려고 하는게 아닐까.
세상에 가해자 역할이나 억울한 입장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체로 경향성은 있다. 물리적 우위에 있는 남성과 어른이 주로 가해자 쪽에 있다. 하지만 아닌 경우도 있다는 걸 간과하고 프레임대로만 판단했다가는 큰일을 치를 수 있다. 그치만 이게 입증이 쉽지 않고, 영원한 비밀로 묻히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세상 일이란게 이렇게 어렵다. 애건 어른이건 남자건 여자건 뻔뻔한 쪽이 갑이고 여린 쪽이 을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상이 그래서 잔인한 거 아니겠어. 이렇게 서늘한 이야기가 또 한 편.ㅠ
읽다보니 살짝 희망적인 작품도 발견하긴 했다. [화상]이라는 작품이었다. 아 근데 그건 다 읽고 나서 마지막에 발견한 한줄기 카타르시스이고, 그 과정은 너어무 끔찍해. 소재가 바퀴벌레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리만 발견해도 잠을 못 자는 내게 그 근원지를 터뜨려 쏟아져나오는 바퀴벌레떼에 대한 묘사는 너무 고문이었단 말이지... 와 작가님 젊었을 때는 정말 장난아니셨구나....ㄷㄷㄷ 그래도 새엄마를 아직 어색해하는 재혼가정이 바퀴벌레 소탕에 함께 몰두한 장면을 보니 이제 박멸만 하면 깨끗해지겠다 싶기도 했다. 그렇게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바퀴벌레를 소재로 넣은 건 너무 악취미다 싶긴 했지만 희망의 극대화다 이렇게 해석해도 되려나? 내맘대로.^^
첫 작품 [남극]과 유사한 섬뜩함을 담은 작품도 있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화자가 누군가한테 말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 화자가 여자라고 느낀 건 나의 착오일까? 작가의 유도였을까? 심지어 본인이 어부라고 소개했는데도 난 여자 어부네... 라고 생각했다는....;;; 중간쯤에 남자인 걸 깨달았는데, 그는 살인 범죄자에게 말려들어서 그의 배로 단둘이 바다 위에 있었다. 배도 그의 배이고 범죄자는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니 뭔가 방법이 있을 것 같았지만 결말은 [남극]의 그녀와 비슷한 신세... 진짜 이 작가는 독자에게 긴장감을 넘어 심리적 고통을 안겨주는데 천재적인듯... 화자는 자신의 선택이 '뱀보다 마귀를 선택한 것' 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심리적 배경이 목사였던 아버지가 어린시절 자신에게 행했던 잔인한 처벌 때문이었음을 알려준다. 어릴때 그는 도둑질을 한번 했고, 아버지는 죄에 대한 경고를 아주 섬뜩한 방법으로 했다. 뱀으로... 죄를 지어도 신이 무조건 용서하실 거라는 식의 도덕적 불감증을 가진 종교교육도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공포와 죄책감으로 강박하는 교육은 더더욱 끔찍하다. 인간에겐 중간보다 양극단으로 가는 경향이 있는 것일까. 그게 자식을 이와같이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라는 심리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게 만든 건 아닐까. [남극]에서는 조심하지 않아서 파멸한 주인공을 그리더니 여기서는 저지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늪에 빠진 주인공을 그리는가.... 이러나 저러나 참 지독한 심리극이다.
너무 길어지니 마지막 [여권스프] 한 편만 더 얘기하고 마칠까 한다. 마지막답게 최악의 고통을 그렸다. 나는 고통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누군가랑 고통에 대해서 잠깐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마음이 힘들대도 신체적 고통을 넘을 순 없는 것 같아." 나도 동의했지만 내가 마음속에 한가지 남겨둔 예외가 있었다. 바로 이 책의 이야기다. 자식의 실종, 즉 자식의 생사를 모르는 것이다. 연인의 배신도, 일의 실패도 시간이 지나면 어찌어찌 아물고 살게 마련이다. 하지만 자식의 실종은 하루하루가 데굴데굴 구르는 고통일 것 같다.
더구나 부부는 이 일에 있어 협력하거나 위로하는 관계가 아니다. 엄마는 아빠에게 "당신이 괜히 요정 얘기를 해서" 라고 원망하며 극도의 증오를 드러낸다. 그 원망의 형상화가 바로 '여권스프'이다. 그게 뭔지는 말 안할래... 아 너무 끔찍하다.ㅠ
인간은 이런 고통 가운데서도 본능적으로 고통을 잊는 '행위'를 하게 되어있나 보다. 아내의 가학행위도 일종의 그런 것 아닐까. 남편도 그렇다. 마지막 문장이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이다.
15편 중에 겨우 몇 편 골라 썼지만 그래도 글이 길어졌다. 한줄평으로 줄이라면 '심리적 고통의 총망라'라고 하겠다. 읽는 동안 재밌었다는 말은 못하겠다. 힘들었다. 하지만 알고 싶은 욕심으로 읽었다. 작가의 작품 경향이 20여년 간 이 책에서 <이토록 사소한 것들>로 옮겨간 과정을 볼 때, 다음 책이 나오면 꼭 읽고 싶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책은 이제 그만 읽어도 되겠다. 이 한 권으로 충분히 경험한 느낌이다. 실제로는 아직 더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