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뒤늦게 읽고서 조승리 작가의 책을 더 찾아 읽게 되었다. 이번엔 소설이다. 이책이 작가의 첫 소설이고 며칠 전에 <용궁장의 고백>이란 소설이 새로 나온 것을 보았다. 대충 소개를 훑어보았는데 심상치가 않아보였다. 과연 대단한 필력을 품은 작가였구나!이 책은 단편소설 네 편과 에세이 한 편이 들어있는 책이다. 각 단편들의 주인공들이 모두 시각장애인이라는 얘기는 미리 들었다. 읽어보니 그 모든 주인공이 작가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자전적 소설이라 하겠다. 어느정도 픽션은 추가했겠지만 그게 극히 일부일 것 같았다. 더구나 주인공의 생각이나 감정은 정확히 작가의 것 그대로라고 느껴졌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책의 다른 버전처럼 느끼면서 읽었다.첫편 [네가 없는 시작]부터 가슴에 콱 들어와 박혔다. 어린 중고등 시절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이자 지극히 현실적인 이별 이야기이기도 했다. 남자아이도 엄마에게 버림받고 아빠마저 돌아가셔서 가엾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그래도 불안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자신의 불행이 더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밝히는 순간 이 사랑이 끝이라 생각해서 언젠가 다가올 그 끝을 최대한 미루며 안타까운 사랑을 누린다. 혹시나 붙잡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는 헛된 것이었다. 대부분은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떠나간다. 나도 그럴 것 같기 때문에 누구를 비난은 못하겠다. 그렇게 여자아이는 '네가 없는 시작'에 발을 내디뎠다.두번째 제목은 [내 안의 검은 새]이다. 내 안의 검은 새는 불안과 공포라고 나는 해석한다. 앞이 보이는 내 안에도 검은 새가 있다. 시력을 잃어가는 그에게는 오죽할까.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푸른 하늘을 훨훨 나는 새를 바라본다. 엄마의 품에 안겨서였다.이 작품 안의 엄마와 아빠는 대조된다. 아빠란 인간의 행태가 너무 화나는데, 사실 평균치에서 크게 벗어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주말부부인 이집에서 농사일은 거의 엄마 차지인데, 엄마가 농사규모를 늘린 다음부터 (아무래도 딸의 앞날 때문이지 않을까) 아빠도 손을 보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엄마는 지치도록 농사일을 하고 들어와서도 식구들 끼니를 챙기고 딸의 마음까지도 챙긴다. 하지만 아빠는 안하던 일 좀 했다고 온갖 생색을 내며 딸에게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이 대비를 보며 나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아무래도 아버지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아서.자식이 안타까울 때, 그 마음을 화를 내고 구박하며, 한숨쉬고 한탄하면서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일종의 애정표현이라고들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히 이기적인 애정표현이라는 걸 (말하자면 애정이라 하기도 어렵다는 걸) 이 아버지를 보면서 깨달았다. 딸은 더욱 움츠러들고 작아지고 자신을 무가치하고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마음 속의 검은 새가 더욱 커지는 일이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엄마의 사랑은 의지로 가득했고 단호했다. 이 사랑이 자식을 살린다. 부모라고 모두다 이런 사랑은 가진 것은 아니다.[브라자는 왜 해야 해?]에서 주인공은 그리 불쌍하게 표현되지 않았는데 나는 이 작품이 특히 슬펐다. 성인 장애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 단면을 조금 본 것 같아서 그렇다. 자신을 지킬 지능을 갖지 못한 성인 장애인들이 얼마나 함부로 취급되어 왔는지, 동시에 주변에 얼마나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하는지 알 것 같아서다. 그 손길이 충당되면 큰 문제가 없겠으나 그렇지 못하다면 당사자도 주변인들도 다 괴로운 게 현실이다. 주인공이 특수학교(맹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야무지고 머리가 좋기 때문에 역할이 많이 주어져 여기서 '부장님'으로 통한다. 맹학교지만 성인 중복장애 학생들을 받았다. 주인공의 기숙사에도 두 명의 언니가 있다. '브라자는 왜 해야 하냐'고 하루종일 묻는 부희 언니가 그 중 한명이다. 가끔 다녀가는 부모들을 보며 주인공이 품는 씁쓸함이 곧 독자의 씁쓸함이다. 이 작품이 가장 실화 같았다. 작가님의 특수학교 시절 경험이 반영된 것 같다. 주인공의 성정도 실제와 가장 비슷한 듯하다. 야무지고 부당함을 참지 못하는 '부장님'.마지막 [나의 어린 어둠]도 작가의 수기 같았다. 바쁜 농사꾼인 엄마의 딸로 지낸 어린시절부터 눈의 질병을 알게되고 받아들이는 시기까지의 이야기다. 엄마의 사랑을 대표하는 '호박부침개'가 오감을 자극한다. 따도따도 끝이 없는 고추밭의 암담함에서 농부의 고단함을 실감하고, 자전거를 사랑했던 아이에게서 작가의 성정을 본다.소설 뒤에는 에세이 한 편이 추가되어 있다. 쓰는 열망이 살아났다 식었다 하다가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그 열망이 좋은 열매를 맺어서 정말 다행이다. 좋은 선생님이자 공감하는 독자인 스승을 만난 것도 다행이다. 무엇보다 본인의 노력과 끊이지 않는 이야기의 씨앗이 계속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첫문단에서 언급한 신간소설도 그렇게 해서 나왔으리라."나는 캄캄한 눈으로 세상 가장 어두운 곳의 이야기를 밝은 세상에 내놓겠다고 다짐한다."마지막 문장이다. 든든한 느낌으로 진심을 다한 응원을 보내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