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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내리는 비, 잠비 - 2025년 제4회 비룡소 역사동화상 대상 수상작 ㅣ 일공일삼 116
김도영 지음, 해랑 그림 / 비룡소 / 2025년 7월
평점 :
출간되는 역사동화를 거의 다 챙겨보던 때가 있었는데 한동안 놓았다가 오랜만에 한 권 읽어보았다. 수상작이라 제목이 눈에 자주 띄었지만 잡지 않고 있다가 해를 넘기고 읽어본다. 한달음에 끝까지 읽었다. 상당히 매력있는 작품이었다.
역사동화 중에는 감정을 크게 건드리지 않으면서 당시 역사 사건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있고, 역사적 인물들에 이입될 수 있게 감정을 자극하는 작품들도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이 작품은 후자라고 하겠다. 주인공은 훗날 정조가 되는 왕세손 이산, 그리고 양반 아버지와 천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 규안이다. 전자는 실존 인물이고 후자는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또 이산이야? 할 수 있다. 매우 드라마틱한 서사를 가진 인물이어선지 책으로,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도 다루었다. 주로 당대 인기있고 잘생긴 배우들이 역할을 맡았다. 내가 기억나는 배우만 해도 이서진, 현빈, 이준호 등... 조금씩 다른 관점의 서사였지만 이산이 강인하고 능력 있으며, 그러면서도 고뇌하고 사랑하는 멋진 청년으로 나온다는 점은 동일하다. 이 책은 독자가 어린이니만큼, 11살 이산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만든 규안이라는 인물 역시 같은 나이로 나온다.
지금도 살기 힘든 세상이지만 역사서를 읽어보면 그나마 지금 태어나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첫 번째는 신분제도 때문이다. 내가 귀족이나 양반으로 태어났을 것 같지는 않고... 그럼 평생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죽도록 일만 하다 죽을 거 아니야? 두 번째는 비정한 권력투쟁 때문이다. 이건 어쩌면 지금이 더 교묘하게 잔인할 수도 있지만.... 하여간에 권력이 무엇인지 부모자식 간에도 죽고 죽이니. 특히 그 권력의 집중처인 궁궐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 권력 기반이 약하거나 흔들리는 경우에는 내일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곳이 바로 궁궐 아니던가. 이산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랬다.
가상 인물인 규안의 아픔은 신분제도 때문이다. 서얼인 규안은 홍길동전에서 보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의 딱 그 모습이다. 그뿐이 아니라 성품 고약한 부인과 친자들의 행패를 수시로 견뎌야 한다. 다 허물어가는 별채에서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 살아간다. 충직한 하인 큰노미를 붙여주신 것이 그나마 양반 아비가 베푼 배려였다. 작가는 이 규안이의 캐릭터를 다채롭게 창조하며 흔한 소재를 흔하지 않게 만들었다. 천덕꾸러기로 자라난 탓에 몸집이 작고 상처투성이고, 그렇다고 어른스러운 성품은 아니어서 작중 소소한 웃음을 유발하고, 그렇지만 생각은 반듯해서 속깊은 마음과 행동을 엿볼 수 있는 캐릭터. 독자들의 애정과 응원을 받을 만한 캐릭터다.
서로 다른 어려움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이산의 할머니(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 왕세손 옆에 둘 또래 아이를 구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설마 규안이 뽑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세손 또한 규안을 소 닭보듯 했지만 둘은 어느새 가까워지게 된다.
11살 규안의 눈으로 본 모습에 궁궐의 암투가 다 담길 리는 없다. 하지만 하나만 봐도 열을 알 듯한 장면은 바로 세손의 ‘불면’이었다. 세손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일도 없고 달게 자는 일도 없었다. 그의 선택은 오로지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의 몸에 밴 불안에 연민을 느낀다. 나는 가장 괴로운 감정이 불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객을 두려워하며 잠에 들어야 하는 삶은 어떠할까. 으으.... 모든 걸 포기하고 부도 권력도 없이 사는 게 낫지 그렇게는 한시도 못살 것 같다. 인간은 어쩌자고 그런 존재들일까.
규안의 다채로운 캐릭터 중에는 그의 재능이 있다. 귀가 특별히 예민하여 작은 소리까지 들을 수 있고 들은 것을 잘 기억하여 외국어에 소질이 있다는 점. 그래서 사역원에 들어가 역관이 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이렇게 귀가 밝은 규안의 특기는 세손에게 잠시의 단잠을 선사했다. 밥보다 잠을 더 좋아하는 내가 이 대목에서 흐뭇함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세손의 고단한 처지와 애씀이 시대를 넘어 느껴졌다. 이것이 역사동화의 역할이라면 이 책은 그 역할을 너무 잘해냈다. 그래서 역사동화상 수상작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잠비’가 이 책의 제목이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저하, 백성들은 여름비에 달콤한 잠을 청하고 다시 기운을 얻지 않사옵니까? 그렇게 이어나가는 삶을 생각해 보소서.” (124쪽)
규안이 세손에게 잠시라도 선사한 잠비의 평화로움. 내가 잠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선지 그 평화로움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누구든 큰 욕심 내지 않고 이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는 세상. 바로 그들이 꿈꾸던 세상이 아니었을까. 그런 세상은 왔나. 그렇진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나아온 것은 사실이다.
작가가 캐릭터를 창조할 때는 작명도 중요할 것 같은데, 이 작품에서는 특히 중요하고 어려웠을 것 같다. 해바라기 규에 편안할 안. 자식이 당하는 수모를 모른척 하는 아비가 지어준 그 이름에서 얼자인 그는 아비의 사랑을 믿었었지. 아비의 작명이지만 실제로는 작가의 작명인 이름. 그 이름 하나에도 작가의 고심이 느껴지는, 많은 감정이 꽉 들어찬 역사동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