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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하루
차인표 지음 / 사유와공감 / 2024년 11월
평점 :
(당연한 말이지만) 차인표 님은 진정 작가가 맞구나 생각했다. 배우로 각인된 분이어서 본업은 아닌 걸로 생각했던 걸까. 스토리와 문장들에 좀 놀라면서 읽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로 유명한 분이고 나의 20대에 혜성같이 나타나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윙크를 날린 그를 에세이도 아닌 장편소설로 만난다는게 상상이 잘 안 갔기 때문인 것 같다.
이분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언젠가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이라는 작품이 유명해져 역주행을 할 때부터다. 궁금해서 도서관에 가면 한번씩 찾아보곤 했었는데 항상 대출중이었고 나도 다른 읽을거리에 밀려 잊어버렸다. 이번에도 역시 대출중이었지만 타관에 이 책이 한 권 남아있어서 상호대차로 대출해 읽어봤다. 읽고나서 <언젠가 우리가...> 책에 당장 대출예약을 눌러놓았다. 차인표 소설의 독서가 앞으로 몇권 이어질 듯하다.^^
이 책은 <오늘예보> 의 개정판이다. 3인의 인물들 이야기가 따로 또 같이 얽힌 책이었고 개정판에선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 추가되어 이야기가 더 풍성해지고 완성도도 높아진 것 같다.
각각의 이야기는 웃기면서도 무척 비극적이다. '코믹 감동 소설' 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물론 대사 등이 무척 웃기니까 코믹 맞지만 이렇게 비참한 스토리에 '코믹'자를 붙이는 게 맞나 읽는 내내 생각했다. 하지만 후기 성격의 마지막 장, [20년 후 그들의 하루]를 보고는 푸하하 웃고 완전 인정하고 말았다. 비참한 인생들은 어떤 선택으로 인해 완전히 바뀌었다. 어쩌면 이 후기는 없어야 현실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게 있어 좋았다. 한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이걸 '차인표식 이야기'라고 부르면 안될까. 이런 이야기도 있길 나는 바라니까.
각 편의 구성은 꿈-오전-오후-해 질 무렵으로 모두 동일하다. 이런 면에서도 상당히 짜임새 있다고 느꼈다. 각 인물들의 이야기는 독립적이면서 다른 인물의 이야기에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그 등장시점이 절묘한 것도 웃음포인트 중 하나다. 차인표식 작명도 코믹하다.
첫 인물은 '나고단' 씨다. 그는 키가 작아 1번을 벗어나지 못했던 어린시절부터 한번도 기를 펴보지 못하고 살다 기껏 벌인 일들은 다 말아먹고 40대인 현재 노숙자다. 그가 노숙자 무료급식소에서 동료(?) 노숙자들을 보며 느낀 마음에 너무 공감이 갔다. 내 마음의 치부를 들킨 것처럼 섬뜩한 마음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모른 체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다. 부끄러움은 이미 배고픔이 먹어 버렸다. 그런데 인간에개는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있다. 억울함이다. 무엇이 억울하냐고? 자신이 여기에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동급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죽도록 억울한 것이다." (27쪽)
고단 씨는 자신이 이걸 잘 아는 이유가 초딩 시절 선생님과 친구들이 심어놓은 '독 가시' 때문이라고 말한다. 느닷없이 민주적 방법이라며 자유 짝짓기 방식이 도입된 학교. 키 1번 고단 씨를 고르는 여학생은 없었다. 하지만 반에는 코흘리개나 코딱지 같은 녀석들도 있었기 때문에 고단 씨의 마음에는 일말의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결국 끝까지 남은 건 고단 씨였다. 그 억울과 수치의 독 가시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이 대목을 읽으며 찔리고 염려가 되었다. 저렇게 사람이 사람을 지명해 고르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지만, 가끔씩 학생들이 강력하게 원할 때 버스 좌석이나 모둠구성을 하며 자유방식을 사용해본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해야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는 있었지만 혹시나 이런 상처가 남지 않았기를....
그는 결국 많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다는 한강 다리로 갔는데, 거기서 만난 공익들, 드라마 엑스트라 포졸과 만나 실랑이한다. 이들이 다음 편 인물로 등장할 때 너무 재밌었다.^^
두번째 인물은 이보출 씨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네 정도로 생각했는데 직업이 엑스트라, 즉 보조출연이다. 이 편에선 보조출연자들의 고충과 애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보출이 아닌 정식 연기자, 그것도 톱 주연을 주로 해온 차인표 씨가 이런 이야기를 쓰다니. 그래도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일종의 동료여서인지 내용이 너무나 생생하다. 이쪽 계통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쓸 수 없는 내용이니까.
보출 씨의 역경은 단지 보출이어서가 아니고, 그가 빚을 지고 쫒기며 아들을 누나 집에 맡겨놓고 떠돌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빚쟁이 또한 인생이 괴로운 사람이다. 그가 세번째 인물인 박대수 씨다.
박대수 씨는 조폭 출신이고 전과도 있다. 뒤늦게 딸을 낳고 착하게 살아보려 하지만 딸이 난치병에 걸려 위독하다. 골수 기증자가 필요한데 희귀 혈액형이다. 그는 최후까지 남은 부하, 충성심은 끝내주지만 눈치와 센스는 디럽게 없는 김부장을 대동하고서 돈떼먹고 날른 보출 씨를 찾아다닌다. 정말 싫은 종류의 사람들이지만 아픈 딸 봉봉이 얘기가 나오면 너무 슬퍼....ㅠㅠ 그는 돈을 찾겠다고 눈이 벌게서 다니는데 병원에선 마지막을 예감한듯 "아이 옆에 있어주세요" 라고 전화가 와....ㅠ
마지막, 개정판에서 추가된 인물은 별명이 독자(독구은둔자)인 정유일 씨다. 지금은 공익이라 초소 근무를 하는데, 제대 후에 아무 대책이 없다. 한달에 두번씩 꼬박꼬박 헌혈을 하시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비명횡사하시고 유일 씨는 더 안으로 웅크러들고 식욕만 비정상적으로 폭발하여 100키로 거구가 되었다. 거구인데 안쓰러.... 아들 가진 엄마 마음인지...ㅠ 유일 씨는 꿈에서 아버지를 자주 만나는데 아버진 참 좋은 사람인거 같다. 마지막 꿈에 아버지는 기차 같은 것을 타고 떠나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슬픈 날, 힘든 날, 고통스럽거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에는 여러 생각 말고 오늘 하루에만 집중해. 딱 하루 동안만 오늘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잘 살아 보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술이나 담배를 끊고 싶다면 여러 생각 말고 오늘 하루만 끊어봐... (중략) ... 신에게 내일까지 보장해 달라고 매달리지 마. 내일은 내일 살면 돼. 오늘은 오늘을 살아." (280쪽)
눈물이 핑 돌았던 장면은 나고단 씨와 정유일 씨가 연결된 장면이었다. 나고단 씨가 죽으려고 하던 순간 "하늘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라고 작가는 표현했다. 물론 신의 음성이 그렇게 들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소설적 표현으로는 좀 안맞다고 생각하며 넘긴 장면이었는데, 마지막 편에서 보니 그건 하늘이 아닌 정유일 씨의 목소리였던 거다. 둘다 모른 채로 고단 씨의 귀에 들린 그 소리. 신은 그렇게 일하실 수도 있는 거다.
웃기면서도 애절했던 장면은 카메라 앵글에서 알짱대는 고단씨가 안비키고 고집부리자 "놔둬, CG로 지우게." 하자 고단 씨가 열폭하는 장면이다.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지운다'는 말에 열폭하는 것, 이거 코믹 장면일 수도 있지만 엄청 현실적이라고 난 생각했다. 나의 존재는 그런 것이다. 누군가는 나의 존재로 기뻐하고, 누군가는 나의 부재로 슬퍼하고. 그러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울부짖었을 것이다. 죽겠다고 나선 길에서 말이다.
"지우지 마, CG로 지우지 말라고. 난 아직 살아있어. 너희들이랑 똑같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고. 엉엉. 니들이 뭔데 날 지워. 엄연히 살아 있는데 왜 지워... (중략)... 지우지 말라고, 이 개새끼들아." (89쪽)
이렇게 돈없고 친구없고 가족없고 (혹은 아프고) 비참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중 네 장면을 작가는 잘도 포착했고 그것을 참 절묘하게도 잘 엮었다. 그러나 마지막 후기, 여기서 어떤 독자들은 홀딱 깰 수도 있겠다. 역시 배우라선가 참 드라마스러운 결말이네 할 수도 있겠다. (진짜로 분위기가 딱 드라마적^^)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난 이게 좋았다. 하나의 기회와 실행에서 번져간 도미노가 행운과 행복의 도미노가 된 이 이야기가 좀 허황하긴 해도 마음에 든다. 이렇게 절묘하게 얽히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들 삶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며칠전 청춘을 같이 보낸 친구를 만나고 왔다. 바빠서 못만난 세월이 길지만 아직도 "아이그 이것아" 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친구. 차가운 밤의 거리에서 헤어지며 친구가 내 얼굴을 장갑으로 감싸며 인사를 해주었다.
"행복해라 이것아.^^"
대화 중 딱히 이유 없는 내 마음의 불안을 캐치한 친구가, 차인표 작가님과 똑같은 인사를 해준 것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인 내가 "당신은 소중해요."라는 인사를 많이 하며 살아왔던가 돌아보게 된다. 이 인사가 많은 독자들에게 전해지길 빈다. 이 인사를 또 듣고 싶은 마음에, 차인표 작가님의 창작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