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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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쓴다는 것은 단순한 능력이 아님을 이런 책을 읽을 때 깨닫는다. 보통사람의 글이 사실이나 경험의 서술, 조금 더 나아가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잘쓴 글은 독자를 흔들고 이끈다. 늘 겪으면서도 직면하지 못하는 상황을 눈앞에 펼쳐놓기도 하고 부끄러워 숨기고 싶었던 마음이 거기 있기도 하고, 같은 아픔에 감정을 격동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찌꺼기를 뱉어내고 말개진 아침을 맞이하게 하기도 한다. 이상은 내가 이 책을 읽고 생각한 '잘쓴 글'의 특징이다. 다른 측면에서의 잘쓴 글도 물론 있을 것이다.

읽어보니 왜 이 작가님의 단편을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각편들은 다 다른 소재와 다른 인물의 이야기면서도 묘하게 관통하는 한줄기가 있는 느낌이다. 그게 작가의 마음 아닐까 생각했다. 별볼일 없고, 어쩔 수 없고, 답답하고 연약하고 속물적인 존재로 이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부끄럽지는 않고 싶어하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부끄러워지는)

이 인물들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이들이 특별히 멋져서가 아니고, 그나마 1이라도 성찰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다. 알츠하이머가 뇌의 기능을 하나하나 정지시키듯이 마음의 기능이 정지된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들이 오히려 쿨해보이고 멋져보이기도 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갈 바를 모르고 주춤대는 자신의 마음과 고민을 조심스레 꺼내놓는 화자들에게 우리는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담겼다. 보통 내가 단편 리뷰를 쓸 때는 한 편 한 편 언급하다가 글이 길어지곤 하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으려고.... 각 편이 다 매력적이었지만 특별히 인상적인 작품도 있는데, 그건 다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1. 어떤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내 이름이어서 깜짝 놀람. (좀처럼 없는 일) 그가 하는 일과 상황에도 공감되어서 마음이 많이 갔다.

2. 각 편 제목들이 다 좋아서 어떤 제목이 표제가 되어도 다 좋을 듯했다. 그중에서 표제작이 된 <안녕이라 그랬어>는 '음 그래 역시 표제작이 될만한 작품이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갔는데, 다른 작품이 표제작이었어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기도 하다. 40대의 에이미(은미)가 시골집에 내려와 엄마를 간병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팔리지 않는 시골집에 발이 묶인 상황에서 화상영어공부를 통해 로버트라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가 줄거리고, 그 이면에는 옛 연인인 헌수와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하던 날에 들었던 'Love Hurts' 라는 노래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영어에 서툴렀던 그녀는 당시에 'I'm young' 이라는 가사를 '안녕'이라고 들었었지. 안녕. 너무 많은 뜻이 담긴 한국말. 지금도 영어에 유창하지 못한 그녀는 마음에 가득한 지난일과 감정을 결국 말하지 못하고 '안녕'의 뜻을 로버트에게 설명하다 대화가 종료된다. 그 뜻은 '평안하시라'였다. 누군가에겐 영어만큼이나 어려운 평안하다는 일. 하지만 그들의 평안을 빌고 싶다. 지금 몇살이든, 옆에 누가 있든 없든, 돈이 있든 없든. 안녕이라고. 안녕하라고.

3. 마지막 작품 <빗방울처럼>에 나는 가장 이입되었는데, 그 이유는 작품 속 사건이 내 인생에 실화였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난 작품만큼 복잡하고 심각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인간이란 어쩜 그렇게 자기 경험 위주인지 모르겠다. 그 사건은 바로 '누수'였다. 윗집 누수가 우리집에 피해를 주고 그게 금방 해결되지 않는 상황.

지수에 비한다면 나는 문제를 함께 걱정할 가족도 있고, 집도 아파트고 윗집주인과 연락도 하고 있으니 어찌든 해결방안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작품에서 묘사한, 신경쇠약에 걸릴 것 같은 그 물방울소리가 몇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다. 그런데 그 소리에 반전이 있다. 우리집이 그랬듯이 지수네도 누수는 고쳤고, 천장 도배도 새로 했다. 그런데도 들리는 물방울 소리의 환청. 그건 신경쇠약의 소리가 아니라 이번엔 살라는 소리였다.
안돼.
그러지마.
살아.
물방울은 이제 천장이 아닌 지수의 뺨에 흐른다. 하지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본인이 너무 맘에 들어 우겨서 계약한 빌라집에서 전세사기를 당하고, 떠앉은 빚을 해결하느라 착한 남편이 과로로 죽고, 집은 물이 새고 혼자 남은 지수는 그걸 어떻게 감당할까. 누수의 스트레스는 그 힘듦의 천분의 일도 안될텐데도 그걸 겪어봤다는 이유로 나는 마치 그녀를 이해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물방울의 환청이 그녀에게 살라고 하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그게 처음 만난 외국인 도배사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는 한마디에서 퍼진 파동이라는 점에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내게 소설은 다른 읽을거리에 밀려 늘 뒷전이었는데 일을 그만둘 시점이 되자 비로소 손에 조금 잡히는 느낌이 든다. 누수라는 단순경험이 주인공에게 연민과 응원을 가져다주는 걸 보니 내가 못한 경험을 소설을 통해서 간접경험하는 것도 세상살이에 나쁘지 않아보인다. 다음 책으로는 요 책 전에 나온 장편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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