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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 1~2 세트 - 전2권 - 펀자이씨툰 ㅣ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
엄유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평점 :
이 책은 ‘펀자이씨툰’이라는 인스타툰에서 관련 내용만을 모아 엮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인스타를 안해서 접해본 적이 없는 내용이다. 책을 읽고보니 너무 매력적이어서 출간된 ‘펀자이씨툰’을 모두 읽어보리라 결심할 정도였다. 이 책 앞에 출간된 책들은 작가 본인의 이야기인 듯한데 재미있을 것 같다. 기대가 된다.
이 책은 작가의 어머니에 대한 책이다. 제목인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가 바로 어머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족들의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전작들은 본인의 이야기, 이 책은 부모님과 가족의 이야기. 말하자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내용들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그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내 기준으로는 그런데, 요즘 같은 인스타의 시대에는 예사로운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흔히 인스타의 폐해라고 거론되는 보여주기, 과장, 가식의 느낌이 없는 점이 매력인 것 같다. 진정성이 느껴진다. 진정성을 꾸며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 책의 가치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검색해보니 작가의 어머니는 그 연세에 드물게 상당히 많이 배운 분이고, 교수에다 작가인 분이었다. 강연도 많았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센스와 유머가 아주 깔끔하게 떨어지는 분, 교양을 잃지 않으면서 웃기시는 분이다. 그런데 이렇게 학식 있고 지혜로우신 분도 피해갈 수 없는 질병, 알츠하이머가 찾아왔다. ‘순간을 달리는’ 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붙은 것이다.
어머니는 이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당당하고 꼿꼿하다. 결정적으로, 여전히 웃기신다. 아버지 또한 적절히 장단을 맞추시고. 이렇게 잘 어울리는 노부부도 드물겠다 싶었다. 작가님 또한 부모님의 그런 모습에 마음속의 염려와 고통을 애써 잠재우며 씩씩하게 대처한다. 알츠하이머가 이야기의 발단인데, 이렇게 유쾌하게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다니, 정말 특별한 가족이라 하겠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음이 곳곳에서 배어나온다. 다 같은 인생인데 당연한 일이다. 부모님은 자식이 부담 갖고 찾아오길 원치 않으셨지만, 돌봄을 책임지게 된 자식의 입장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작가님처럼 위 아래 형제가 모두 외국에 나가 독박 돌봄 처지가 된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시설에 보내드리는 것은 최후의 경우가 아니면 결정하기 어려운 선택지다. (시설 얘기까지 책에 나오진 않았고 내 생각이 그렇다) 본인의 작업도 해야 하는 작가님 입장에서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많은 갈등이 따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부분도 책에는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었고 많이 공감했다. 그렇다고 다른 가족들이 못됐거나 얌체인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때로 화를 내고 갈등하기도 한다.
어머니의 상태는 계속 나빠지고 있다. 옛 기억은 생생하지만 조금 전 기억을 잊는 것이 주 증상이었는데 가장 가슴이 철렁한 일,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게 너무 가슴아플 것 같다.ㅠㅠ) 그리고 기억을 더 이상 쌓을 수 없어 생기는 한계를 절감한 순간, 공황장애가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렇게 아픈 일들을 굳이 감추지 않으면서도 마냥 슬픔만을 주지는 않는다.
“엄마는 더 이상 글을 쓰거나 사람들 앞에 서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스스로도 기억할 수 없을 꺼져가던 말들이 나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누군가에게 웃음과 위로가 된다.
그렇게 잠깐 다시 빛이 난다.
만약, 크리스마스 전구의 불빛이 꺼지는 순간이 없다면
그리고 다시 켜지는 순간이 없다면
우리가 반짝임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었을까?”
어머니는 소멸되어가는 당신의 기억 대신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딸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딸은 불행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슬픔을 크리스마스 전구에 비유할 수 있게 살아주시는 어머니가 계셔서 참 다행이다.
소통의 의욕을 잃어버린 나의 모습을 생각한다. 같은 말을 수십번 물어보는 부모님 앞에서 나는 참고 대답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슬프다. 이런 생각을 한 김에 전화라도 한 번? 그리고 펀자이씨툰 전작들을 읽으러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