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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봄을 건너는 법 ㅣ 우리학교 상상 도서관
정은주 지음, 김푸른 그림 / 우리학교 / 2025년 11월
평점 :
분홍과 연두의 조합이 이렇게 예뻤던가? 표지와 책등의 색채가 내게 없던 핑크 취향을 불러올 것 같은 예쁨이다. 귀엽고 따뜻한 이야기에 고픈 사람들이 이 책을 집어들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은 핑크핑크하지만도 않고 귀염귀염하지만도 않다. 왜냐. 우리 주변의 이야기라서. 인생의 이야기라서. 인생이 핑크핑크가 아닌 것은 주지의 사실.
그러나 그 색깔이 존재하듯 우리 인생에도 그런 순간은 있다. 벚꽃잎이 흩날리는 순간. 시린 계절을 지나 봄을 맞은 우리는 잠시 분홍의 따스함에 머물렀다가 이번엔 폭염 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한다.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아이들도 살아내느라 힘들구나.
이 책의 주인공을 둘로 말한다면 화자인 김선아와 장애가 있는 강산에이다. 둘의 엄마가 절친이어서 어릴적에 사촌들처럼 자랐다. 산에 눈에는 선아밖에 없었고 선아만 따라다니며 동시에 선아를 든든하게 지켰다. 알고보니 산에한테는 '윌리엄스 증후군'이라는 장애가 있었다. 이후 산에의 특수학교 입학 등으로 두 집의 거리는 멀어진다. 5학년이 된 지금, 친구 관계가 쉽지 않은 선아는 고전중이다. 그 교실에 어느날 전학생이 왔다. 바로 산에였다.
몇년의 세월동안 산에의 마음은 변한게 없었으나 문제는 선아였다. 선아는 그러잖아도 마음처럼 되지않는 관계가 산에 때문에 더 어려워질까봐 전전긍긍한다. 그걸 꿈에도 모르는 엄마들은 선아에게 산에한테 잘해주라고, 도와주라고, 잘 부탁한다고 부담을 준다. 산에는 예전처럼 반갑게 다가가고, 선아는 매몰차게 벽을 친다.
여기에서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의 '무리 소속'에 대한 갈구를 들여다보게 된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성향인데 그건 아마도 내가 살면서 대충 아무곳에나 속해 있었기 때문에 절실함을 몰라서 그런 걸까? 아이들은 학기초에 이것 때문에 엄청난 물밑 전투를 치느르라 소진된다고 한다. 마치 초반에 결과가 끝장나는 전쟁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 조급함이 이해되지 않는 나는 꼰대이겠지? 어쨌든 현실이 그러하니 나는 늘 아이들의 구도를 주시한다. 누가 누구랑 노는지를. 자유롭게 헤쳐모여의 유연함이 있는 반은 최고다. 어느정도의 고정성이 있지만 소외된 아이는 없고 서로에 대한 적의가 없다면 그럭저럭 괜찮다. 관계권력을 가진 아이가 있고 그 그룹에 들기를 갈구하며 탈락하면 마치 죽을 것처럼 구는 구도라면 최악이다. 나는 아직 최악까지 가보진 않았지만 이러한 이유로 학기초에 권력관계 관찰에 초집중한다. 이 권력이 발견되면 지혜로운 방법으로 무력화시켜야 한다. 안그러면 문제와 상처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아이들 일이라고 쉬운 게 아니다.
그래도 내가 봤던 아이들 중에는 그리 목매달지 않는 의연한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아이는 또 그런 아이를 만나게 된다. 보석끼리의 조합이다. 조급함만 없애면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데, 당장 죽을 것처럼 울고 뒹굴고 보호자까지 여기에 가세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다.
이 책의 선아는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고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여기에 주인공 두 명을 더 추가한다면 햇살이랑 민준이다. 햇살이는 인지능력도 산에보다 더 부족해보이고 수업방해나 고집 등 교사를 곤란하게 하는 특성도 훨씬 심한데 장애인은 아니라고 한다. 특수교육대상자가 아니니 도움반에 가지 않고 지원인력도 당연히 없어서 담임선생님 혼자서 감당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부모님이 인정하지 않고 검사를 거부해서다. 여기서 또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현실을 보게된다. 부모의 동의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 동의가 없으면 속수무책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이또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 시선과 그로인한 두려움이 부모의 마음을 닫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모두가 함께 힘들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민준이로 말할 것 같으면 안좋은 소문이 따라붙은 (알고보면 억울한) 독립적인 남자애다. 특이하게도 민준이에겐 햇살이를 안정시킬 수 있는 면이 있다. 햇살이와 짝이 되기도 하고, 선아, 산에와 넷이서 모둠이 되기도 한다. 선아가 느끼기에 소문에 비해서 상당히 괜찮은 아이다. 담임선생님이 민준이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민준이에게 또 오해가 닥쳤다. 그것도 햇살이네 쪽에서...ㅠ 이렇게 꼬이는 일들이 내 문장으로 쓰니 매우 짜증나 보이는데 책은 그렇지만은 않다.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반영했지만 현실의 서늘함이 표지의 그 따뜻함을 압도하지는 못하는 이야기라고 할까.
되게 슬픈 대화도 있었다. 선아 엄마가 늦던 날, 산에 엄마가 와서 따뜻한 밥을 차려주었다.
"선아야,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긴데, 산에가 다른 애들한테 놀림당하거나 무시당해도.... 너 나서지 말고 모른 척해. 이모가 산에 키우며 살아 보니까... 사람들 시선이 제일 무섭더라. 사람들이 눈빛 하나로 정말 어마어마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더라고. 산에야 어차피 장애인이니까 감당하고 살아야 돼. 세상이 좀 바뀌어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하루아침에 되겠니? 그런데 너는 산에 때문에 그런 시선 받을 필요 없어. 그니까...."
어떤 마음을 거쳐 산에 엄마가 이런 말을 하게 되었을지 과정을 짐작해보면 너무 슬프다. 특히 찔리는 말은 '눈빛'이다.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당할 수 있을까? '눈빛'에 이르니 나는 바로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어떤 폭력을 행사하며 살았는지 다 알 수도 없다.
선아와 산에, 햇살과 민준, 그리고 다양한 성향의 주변 친구들을 통해서 작가는 장애와 비장애 어린이들이 함께 어울려 갈등하고 해결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그 과정을 '봄을 건너는' 일로 표현했다. 실제로 학기초에 부딪친 일들이니 액면 그대로의 뜻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잔인한 봄을 지나 싱그러운 여름으로 진입하는 아이들.
저학년때는 그래도 가능했던 어울림이 고학년으로 가면서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점이 내겐 여전한 고민이다. 놀이, 관심사 등에 격차가 점점 벌어지며 아이들은 의무감의 시간 외에는 단짝들과만 지내고 싶어한다. 강제할 수 없고 부작용도 우려되는 부분이라 아쉬운 마음이 남을 때가 많다. 무리없고 자연스러운 호의가 가득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눈빛에 칼날이 없는 세상.
고통없는 인생은 없고 누구에게나 아픔과 장벽이 있다. 산에도 햇살이도 딱 그만큼만 아플 수 있다면 좋겠다. 선아도 민준이도 다른 친구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