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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평점 :
이 작가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2024 알라딘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고 한다. 투표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만약 했다면 나도 그 책에 표를 주었을 것 같다. 사실 다른 책들 중 읽은게 별로 없어서 공정한 한 표라 장담할 순 없지만, 어쨌든 많은 독자들이 추천한 데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그 이유를 '보편적 주제'라고 생각해본다. 하나 더 말한다면 절제된 표현?
그보다 먼저 나온 이 책을 나는 이제야 읽게 되었는데, 마찬가지로 절제된 표현이 전혀 다른 내용의 두 책을 뭔가 비슷한 느낌으로 연결해 준다. 이 책은 심지어 98쪽. 채 100쪽도 되지 않는 분량이다. 굉장히 슬프고 힘든 사건이 나오는 줄 알고 읽었다가 중간에 엥? 하고 좀 갸웃. 마지막엔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 책이 뭔가 처참한 상황과 감정을 담았으리라 짐작했던 건 영화 이미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맡겨진 소녀는 원래 불행했고 더 큰 불행을 겪으리라는 막연한 짐작을 했었다. 영화보다 책을 먼저 보려고 아직 보지 않았는데 읽었으니 이제 봐야겠다. 영화는 제목이 살짝 다르다. <말없는 소녀> 그 제목의 이유도 알겠다. 원제도 그렇고, 번역 제목도 두 개 모두 괜찮은 것 같다.
짧은 분량처럼 이 책에서 다룬 시간도 길지 않다. 화자인 소녀가 동생의 출산을 앞두고 먼 친척집에 맡겨졌다가 출산 후 다시 집에 돌아가기까지 짧은 여름날의 일들을 담았다. 사건들이라기엔 평범한 일상이다. 친척집에 맡겨진다는 설정도 이야기에선 흔한 일이다. 특별하지 않은 일을 담은 길지도 않은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많은 독자를 모으고, 영화로까지 제작되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말없음'의 아름다움이라 표현하고 싶다. 이 소녀의 성격이기도 하고 맡아준 부부가 소녀를 칭찬한 점이기도 하고 영화의 제목이 된 낱말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작품의 성격이기도 하다. 서사의 특징이 말없음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왠지... 된다. '꼭 할 말만 하는' 이라고 바꿔 표현해도 되겠다. 버릴 문장이 없다는 것, 함축되어 있다는 것, 여운이 길다는 것, 그래서 짧지만 짧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라 하겠다.
소녀는 바쁘고 가난한 부모와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살뜰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라다가 맡겨진 집에서 비로소 가정과 양육자의 따스함을 느낀다. 그것을 격정적이지 않게, 누가 알아챌까 조심하듯이 조용조용 표현하고 있다. 거기서 느껴지는 간절함, 혹은 체념, 고마움과 애정 등의 감정이 간결한 문장으로 독자의 마음 속에 들어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사실 친부모는 무심하고 거칠어서 그렇지 막장은 아니고, 맡아준 부부 또한 세상 없는 선행을 베푼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크지 않다 할 수 있는 차이가 아이의 몸과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파장은 매우 컸다.
이 책은 말없음을 미덕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나는 그 미덕을 매우 지지하지만 모든 경우에서 그렇진 않다는 걸 인정한다. 예를 들면 빨간머리 앤은 특유의 수다스러움으로 주변에 빛과 온기를 주었지. 또 말이 많은 작품이 꼭 가치가 없으리란 법도 없지. 그래도 어쨌건 이 간결한 작품이 품고 있는 감정의 무게에 나는 감탄한다.
"어느 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 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여져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가지 일들이 마음 속을 스친다......."
아저씨는 그를 향해 돌진하는 소녀를 안아올렸고 아줌마는 옆에서 울음을 삼킨다. 아저씨의 시선 반대 방향, 그러니까 소녀의 시선 방향에 아빠가 걸어오고 있다. 그때 "아빠" 라는 따옴표가 두 번 나온다. 설명하지 않는 그 중의적 의미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양육이 고단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점은 공통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마음가짐에 따라서 괴로움도 될 수 있고 행복도 될 수 있다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교사로서 학생들의 양육자를 바라보며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많이 가진다. 갈수록 더. 나도 겨우 지나온 그 길이니 남 말할 주제가 못되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주로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 자기 자식이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도 싫을까?
- 자식한테 왜 저런 걸 먹일까? 따뜻한 밥 좀 해주면 안되나?
- 자기 직성 풀기 위해 자식을 키우나? 자식의 가치가 거기에 달렸나?
물론 아줌마 아저씨는 풍족한 편이었고 자녀도 없었고(여기엔 아픈 사연이...)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반면 소녀의 친부모는 가난하고 바빴다. 하지만 이 차이가 모든걸 결정하진 않는다. 자녀가 많다고 꼭 찬밥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라고 관심을 충분히 받는 것도 아니다. 아이가 느끼는 따뜻함과 충족감은 아주 섬세한 것들이었다. 보려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내가 안타까워하는 점은 바로 이런 점이다. 우리 사회 기준 이 친부모가 특별히 나쁜 사람들도 아니다. 더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최초의 따뜻함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그것을 어디에서 채울까.
<조립식 가족>이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중간에 재미없어져서 관두긴 했는데, 거기서 세 아이를 품어 친남매처럼 기른 아빠(최원영 분)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모든 공간에 스며들어 그곳을 채웠다. 그는 허름한 칼국수집을 운영하는 별볼일 없는 사람일지 몰라도,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양육의 외주화가 두드러지는 이 시대에 말이다. 집에 돌아오기 며칠 전 우물에 젖어 감기 걸렸던 아이가 절대 그 이야기를 부모에게 하지 않고 입다물려는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난의 화살을 남에게 돌리려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연상되는 게 많았다. 내 눈에만 그게 두드러진 것이려나.
이제 며칠 내로 영화를 봐야겠다. 세상이 참 힘들고 아픈 때다. 말없음의 미덕을 말하면서 말이 너무 길었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