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숲을 지날 때 온그림책 19
송미경 지음, 장선환 그림 / 봄볕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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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경 작가님 작품의 특이한 분위기는 한두번 느낀 것이 아닌 바, 새로운 것 하나가 또 왔구나 하는 생각으로 맞이했다. 이 책은 그림책이다. 그림책 치고는 글밥이 조금 많긴 해도 어쨌든 그림책이니 길 수도 복잡할 수도 없는데, 헉 나한테만 이렇게 난해한가.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건 아마도 내가 정답을 찾아서 그런 게 아닐까. 이것은 무슨 의미, 이건 무슨 상징 이렇게 줄을 긋고 납득이 되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독서를 해온 탓이 아닐까. 어느 작품이나 해석은 열려있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면 그만인 것이다. 작가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꼭 나의 감상과 일치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이 책은 불안을 통과해 마음이 편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내가 그림책 한 권의 독서에서도 정답을 찾지 못할 때 당황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는 당위에 가까운 추구가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 추구가 더 이상 의미 없어졌을 때 오히려 편안하고 평화로움을 느낀다. 이해가 가는 느낌이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안개 숲’ 이란 여러 감정, 그중에서도 ‘불안’이 가장 짙게 깔린 곳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은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다. 안개 속처럼 보이는 것도 안보이는 것도 아니게 뿌옇다면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안개는, 무겁다. 모든 것을 무겁게 바닥으로 끌어당긴다. 그러나 한편으론 감싸준다. 포근하게. 장선환 그림작가님은 어둠 속 안개숲의 느낌을 너무나 잘 그려냈다. 꿈속에서 가본 것 같은 절반의 기시감을 준다. 나도 언젠가 저 속에 있었어, 불안하고 외로웠지. 눈물겨웠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 그런데 지금은 여기에 있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송미경 작가님의 다소 기이한 동화들은 이렇게 나의 무의식에 잠겨있었던 것 같은 안개처럼 뿌연 감정을 건드린다.

어느날 느닷없이 어른들은 모두 동물이 되었고, 달라진 세상에서 다르게 주어진 역할들을 부여받아 살아간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부모를 잃었지만, 아가들은 동물들이 방문해 보살피고, 어린이들은 동물 부부에게 입양되고, 청소년들은 필요할 때 약간의 조력 외에는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게 된다. 연이는 청소년이다. 늑대 부부에게 입양된다는 동생 설이를 늦기 전에 만나려고 서둘러 가는 길에 안개 숲을 통과한다. 사슴과 함께. 몇몇 동물들을 만나며.

상상도 못했던 변화가 세상을 뒤덮었지만 비명도 탄식도 들썩임도 없었다. 당연한 줄 알았던 관계의 끈이 스르륵 풀려버렸지만 아쉬움도 눈물도 없었다. 그 모든것이 담담하고 당연하게, 평온하게 남았다. 비오면 우산을 쓰듯 자연스럽게. 다시 원래의 세상이 된다 해도, 아니면 이것이 쭉 세상의 방식이 된다 해도 그다지 놀랍지도 서럽지도 않을 것 같다.

안개숲을 빠져나와 함박눈의 세상이 된 마을에 들어서서, 연이는 찾던 동생 설이를 만났다. 한발 늦었다. 설이는 이미 늑대 가족의 일원이 되어 눈밭을 뛰고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아쉽지 않았다. 연이는 눈을 맞으며 그들이 떠난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요즘 내가 자주 접해야 하는 한 가정이 있다. 어른이고 아이고 다 힘들어해서 지켜보는 것도 쉽지 않다. 무슨 일로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는 모르나 부모는 만회하려 죽을 힘을 쓰는데 아이는 부모를 한계로 밀어붙인다. 얼마전엔 “고아원에 보내 달라”고 소리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리는 걸 보았다. 가족이란 무엇이길래 이렇게 상처를 주고받아야 하는지? 인간은 왜 노루나 사슴처럼 태어나자마자 겅중겅중 뛰어나가지 못하고 저렇게 오랜 세월 부모의 희생을 먹고 자라야 하는지, 그 희생의 밥을 먹지 못한 인간은 평생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랑만이 구원이라고 하는데 나는 인간이 사랑에 좀 초연해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외로움에 익숙해졌으면 좋겠다. 그 상태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말없이 동행해주고, 여기까지인 곳에선 미련없이 보낸다. 다시 기약할 수 없을지라도 슬퍼하진 않는다.
"어디서든 다시 만나자. 반드시 이 모습이 아니더라도."
어쩌면 더 어렵고 깊은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서늘하기도 하고 포근하기도 했던 안개숲의 느낌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연이 또한 그 느낌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한발 앞도 볼 수 없지만 내가 존재한다는 점만은 분명하고, 어떤 시공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내 존재가 바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때 내가 아끼던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릴 수 있다. 설이의 요요처럼.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이 모습으로 존재하기에 이대로 앞으로 나아가보려 한다. 살아가되 연연하지는 않을테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눈밭에 혼자 남은 연이가(사실은 내가) 불쌍하지 않아보인다. 차갑고도 다정한 그 기운은 어쩌면 우주를 운행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도 이르렀다. 이처럼 감상은 각자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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